[단비인터뷰] 수어통역사 고인경

TV 방송을 보면 화면 오른쪽 아래에서 누군가 열심히 손짓할 때가 있다.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 즉 농인을 위해 음성정보를 전달하는 ‘수어통역사’다. 과거에는 ‘수화통역사’로 불렸는데 2016년 제정된 한국수화언어법에 따라 수어가 공식 명칭이 됐다. 이들은 32만 명 가량인 국내 농인들에게 세상의 소리를 전해주는 통신원이다.

고인경(35)씨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국가공인 수어통역사 1600여 명 중 한 사람이다. 충남 천안의 나사렛대학교에서 수어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며 수어통역학과 학생들에게 강의도 하고 있다. 또 ‘MBC TV 특강’과 ‘EBS 뉴스’ 등 방송프로그램에서 수어통역을 해왔고 한국수어 관련 강의를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 ‘수어생각’을 운영하고 있다. 수어통역사의 세계를 엿보기 위해, 고씨를 지난 4월 26일 천안 나사렛대학 부근 카페에서 만나고 지난 26일 이메일로 추가 인터뷰했다.

농인 부모에게서 한국어보다 먼저 배운 수어

▲ 수어통역사 고인경씨가 자연스럽게 수어를 접하게 됐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 이자영

“어렸을 때 한국어보다 수어를 먼저 배웠어요. 보통 아기들이 ‘맘마’ ‘엄마’ ‘아빠’를 말로 배울 때 저는 수어를 배운 거죠.”

고씨의 부모는 둘 다 농인이다. 고씨처럼 농인 부모를 가진 청인(들을 수 있는 사람)을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라고 한다. 고씨는 다른 코다가 그렇듯 부모가 아닌 친척, 이웃이나 교회사람, TV 등을 통해 ‘말소리’에 노출됐고 자연스럽게 수어와 한국어를 함께 배웠다. 조부모의 권유에 따라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일을 시작했다.

“부모님이 농인이고 제가 수어를 할 수 있으니 수어통역사가 되어 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에요. (협회에서 일하며) 수어를 쓰고 수어통역교육을 받으면서 이 일에 매력을 느끼게 됐죠.”

수어통역사 1600여 명, 전국 230개 센터 등에서 활동 

그는 2007년에 국가공인 수어통역사 자격시험에 합격했고, 대학원에 진학해 전문지식을 쌓으며 활동을 시작했다. 함께 일하는 수어통역사들 중에는 부모가 농인이거나, 동아리 활동 중 수어를 배웠거나, 교회에서 농인 관련 봉사활동을 했던 사람 등 특별한 계기를 가진 사람이 꽤 있다. 수어통역사들의 상당수는 전국 230곳에 설치된 수어통역센터 소속으로 일한다. 한 센터에 4~5명 정도 근무하는데, 주민센터나 병원 등에서 지역 농인의 일상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통역을 한다. 프리랜서의 경우 방송이나 행사, 교육 등의 수어통역을 맡는다. 그 외에 자격증 없이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부모님이 농인이 아니었고 수어를 몰랐다고 하더라도 통역은 아마 제가 선택하고 싶은 직업이었을 겁니다.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알고 전문적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한 매력을 분명히 느꼈을 거예요.”

통역하는 일이 즐겁다는 고씨는 ‘국제수어통역사’의 꿈도 갖고 있다. 주로 영어를 국제수어로 혹은 국제수어를 영어로 통역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지금 공부를 하고 있고, 머지않아 활동 무대를 넓힐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영화진흥원 교육 프로그램으로 판문점 세트장에서 수어통역을 하고 있는 고인경씨(맨 오른쪽). ⓒ 고인경

못 듣는 학생들에게 말소리로 한국어 가르치는 현실

“농인도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권리가 있어요. (초·중·고) 12년 동안 수어로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많은 농인들이 제1언어인 수어처럼 한국어를 유창하게 이해하고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국내 농인들이 쓰는 한국수어는 농사회에서 자연언어로 발전한 시각언어로, 음성언어인 한국어와는 다르다. 고씨는 농인들이 수어와 한국어를 둘 다 유창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학교현장에서 한국어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수어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부족한 게 원인이라고 한다. 그는 “농인들도 엄연한 한국인”이라며 “읽고 쓰는 한국어도 가르치고 수어도 가르치는 이중 언어교육을 통해 농인들이 정보에 원활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 수어통역사 고인경씨가 '행복합니다'를 수어로 표현하고 있다. 고씨는 수어통역사로 일하는 것이 즐겁지만 국내 농인들의 교육환경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 이자영

지난 2월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개·폐막식 중계에 수어통역을 제공한 방송사가 한국방송(KBS) 한 곳뿐이어서 논란이 됐다. 이마저도 일부 장면만 제공해 비판이 제기됐다. 그는 “늘 그래왔잖아, 뭘 새삼스럽게...하는 생각을 했다”며 이런 부분에 사회가 좀 더 관심을 두는 것과 함께 농인 교육에 획기적 지원이 이뤄지기를 희망했다.

“배우고 싶고, 연구하고 싶어도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포기하는 농인들이 많은데 학부, 석사, 박사과정까지 장학금과 생활비를 100% 지원하고 취업 후 상환하는 방식으로 밀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농인의 감수성으로 이해하는 수어 연구, 교육, 통역, 복지, 스포츠, 예술 등이 발전할 것이고, 모든 농인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거예요.”


편집 :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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