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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힘들수록 도지는 병
[상상사전] '향수병'
2018년 08월 12일 (일) 21:52:56 나혜인 기자 nahyein8@gmail.com
   
▲ 나혜인 기자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요즘 부쩍 많이 드는 생각이다. 대학원 졸업반이 됐지만 취업은 어렵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가 복잡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공간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마음속 고민도 복잡하고 심각해진다. 이럴 때 과거를 찾는 향수는 쉬운 도피처다. 좋았던 옛 시절을 떠올리면 잠시나마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있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은 ‘꼰대’는 물론이고 친구나 후배에게서도 한번쯤 들어봤다. 향수는 보편적인 증상이다.

귀향을 뜻하는 그리스어 ‘nostos’와 고통을 의미하는 ‘algia’를 합쳐 만든 노스탤지어(nostalgia), 향수는 한때 질병이었다. 17세기 스위스 내과의사 요하네스 호퍼가 고국을 떠난 용병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다 식욕감퇴와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까지 하는 일이 벌어지자 이를 병리학으로 설명하려고 ‘향수병’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이후 19세기 말 향수에서 질병이라는 뜻이 사라지기까지 의사들은 향수를 뇌질환으로 인식했다.

20세기에 세계대전, 대공황 등 팍팍한 현실을 지나며 향수는 대중적인 감정이 됐다. 긍정적인 의미도 덧붙기 시작했다. ‘가장 멋진 슬픔’, ‘슬픔이 덧칠된 기쁨’ 등 현대 문학에서 ‘노스탤지어’를 설명하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달콤쌉싸름한’ 느낌을 준다. 슬프고 어두운 과거가 아름답게 포장된 때문이다.

   
▲ 한때 질병으로 치부되던 '향수'가 아름답게 포장된 건 그만큼 현실이 팍팍해졌기 때문이다. ⓒ Flickr

현실이 힘들수록 향수는 위력을 발휘한다. 음악, 영화, 드라마 등 대중문화 전반에서 ‘복고’가 먹히는 건 그만큼 지금 세상이 어렵다는 방증이다. 문화산업은 현실의 고통에서 탈출하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을 절묘하게 건드려 향수를 판다. <문화와 유행상품의 역사>를 쓴 찰스 패너티는 ‘복고풍이야말로 대중문화의 본질이며 노스탤지어가 거대 산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근거’라고 말했다.

우리 정치판에서도 향수는 유용한 상품이다. 이곳에서 주로 소환되는 과거는 박정희다. 그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산업화 시절은 슬프지만 멋지고, 한편으로 기뻤던 ‘달콤쌉싸름한’ 기억이다. 사실 지금 노인의 현실이 힘든 것과 ‘좋았던 그때’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잃어버린 젊음이 녹아 있는 옛 시절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일부 정치 세력은 대중에게 향수라는 감정을 파는 사업가처럼 이를 이용한다.

미국 사회학자 프레드 데이비스는 저서 <과거에 대한 동경: 향수의 사회학>에서 ‘과거의 모든 것이 지금보다 더 좋고, 건강하고, 행복했다고 믿는 ’단순한 향수‘만으로는 자아와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적었다. 그는 향수라는 감정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자아와 사회를 더 잘 이해하려면 반성적이고 해석적인 향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성적 향수’는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감정에서 나아가 그 감정이 얼마나 정당한지 의문을 가지는 단계다. 그때가 진짜 좋았는지, 과거에 정말 행복했는지, 혹 과거에 일어난 불행한 일들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자문해보는 것이다.

   
▲ 현재 노인의 힘든 현실과 ‘좋았던 과거’는 별 상관이 없지만, 일부 정치 세력은 여전히 그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 pxhere

이보다 더 깊은 해석적 향수는 노스탤지어라는 감정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새로움과 미래를 두려워해 향수를 느끼는 건 아닌지, 지금 부족하다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사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정의한 반성적, 해석적 향수는 심리학이나 정신과에서 치유 목적으로 사용한다. 향수가 질병 꼬리표를 뗀 지 10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과거 회상은 중요한 심리치료기법 중 하나다. 반면 ‘단순한 향수’는 광고업, 문화산업 등 노스탤지어를 상품화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 이들은 늘 과거를 아름답게 만들어 도피를 부추긴다.

반성과 해석이 뒤따라야 건강한 향수다. 대중문화도 그렇지만 정치판의 ‘단순한 향수 팔이’는 사회 진보를 저해하거나 비뚠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하다. 성찰 없이 미화한 과거는 자아와 사회를 왜곡하고, 현실 인식마저 비틀어버린다. 박정희 시대를 동경하고 이를 이용하는 세력은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에 신중해야 한다. 과연 그때 정말 행복했는지, 혹 그때 일어난 불행한 일들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과거를 떠나 지금 부족한 것, 이를 채우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가치를 고민해야 한다. 단순한 향수는 현실 도피에 불과하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박지영 기자

[나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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