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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구름'에 갇힌 일본
[저널리즘특강] 한승동 전 <한겨레> 선임기자
주제 ②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
2018년 06월 14일 (목) 21:42:56 이창우 박진홍 기자 fallingmee@naver.com

“일본 정부는 대사관 앞에 소녀상 세우는 걸 아주 싫어하잖아요. 일본은 거기서부터 잘못됐어요. 일본이 소녀상에 거부감을 가질수록 과거사 문제는 안 풀릴 거예요. 일본 정부가 못 한다면, 대사관 직원들이라도 나서서 소녀상을 세우고 매일 닦아야 합니다.”

한승동 전 <한겨레> 선임기자는 일본 특파원을 지냈고 <지금 동아시아를 읽는다> <대한민국 걷어차기> 등 일본 관련 책을 저술한 일본 문제 전문가다. 그는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 강연에서 일본 정부와 국민들이 소녀상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를 “뭐가 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하면서 인권 유린을 저질렀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를 잊었다는 뜻이다. 그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조선을 침략한 시기를 ‘찬란했던 시절’로만 기억한다.

   
▲ 한국 사회 이념 갈등의 원인을 미일 중심의 동아시아 정세에서 찾은 <지금 동아시아를 읽는다>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패권 전략을 다각도로 분석한 <대한민국 걷어차기>는 한 기자의 대표 저서다. ⓒ 알라딘

‘언덕 위의 구름’과 시바 사관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을 요약하면 ‘메이지 영광론’입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러일전쟁까지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아시아의 ‘가련하고 외로운 소년’ 일본이, 밀려오는 서구 열강에 메이지유신으로 잘 대처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겁니다. 서구와 어깨를 겨루며 국제법을 준수하는 훌륭한 모범 국가였죠. 그런데 러일전쟁 이후 군부의 잘못된 야심으로 일탈을 시작하면서 일본은 치매에 걸렸습니다.”

한 기자는 일본인들이 그릇된 역사 인식을 갖게 된 배경에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의 역사관이 있다고 꼬집었다. 시바 료타로는 일본에서 서점에 따로 코너가 있을 정도로 인기작가다. 한국에서는 장편소설 <료마가 간다> 시리즈로 유명하다. 한 기자는 “그의 역사관은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을 보면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설은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산케이신문>에 연재돼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책은 2천만부가 넘게 팔렸으며, NHK는 이 소설을 2009년 13부작 드라마로 만들어 3년간 방영했다.

   
▲ <언덕 위의 구름> 일본 문고본 표지(왼쪽)와 NHK 드라마 DVD 표지. ⓒ 라쿠텐

<언덕 위의 구름>은 1868년 메이지유신 직후부터 1905년 러일전쟁까지를 다룬 작품이다. 해군 장교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육군 장교 아키야마 요시후루, 시인 마사오카 시키가 주인공인데, 이들이 우정을 나누며 바다와 땅에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게 주 내용이다. 소설은 이들을 내세워 러일전쟁 전까지 근대화 시기를 일본인 모두가 역동적이고 희망에 찼던 시절로 묘사한다. 제목 <언덕 위의 구름>도 메이지 시대에 일본인들이 일치단결해 매달렸던 근대화라는 목표와 희망을 상징한다.

반면 시바 료타로는 “1926년 쇼와(히로히토 일왕 연호) 시대는 귀태(鬼胎: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일컫는 말)와 같았던 시기”라며 매섭게 비판했다. 그에게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2천만명 가까운 사람을 죽게 한 ‘15년 전쟁’은 정상이 아닌, 지워버려야 할 나쁜 역사다. 언뜻 보면 일본이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는 모양새다. 한 기자는 “시바 사관에 따르면 일본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이를 인정한다. 단 ‘15년 전쟁’에 한해서”라고 강조했다. 즉 중국과 미국, 동남아시아에서 행한 전쟁 범죄는 인정하지만, ‘언덕 위의 구름’ 시절 행한 조선 침략과 인권 유린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메이지 영광론’은 허구다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는 저서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에서 시바 사관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일본은 15년 전쟁 시기만 잘못된 게 아니라, 근대화를 시작한 시점부터 이미 잘못됐다는 거죠. 조선 침략은 왜 잘못이 아니냐는 겁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나라여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조선 침략사 등 근대 한일관계사 진실 규명에 힘써 온 역사학자로, 한국에서는 ‘일본의 양심’으로 통한다. 그는 <언덕 위의 구름>이 조선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시바 사관은 좋았던 기억은 메이지 시대에, 나쁜 기억은 쇼와 시대에 기계적으로 가뒀다. 이런 ‘메이지 영광론’ 때문에 조선 침략과 수탈로 일본이 근대화의 물적 토대를 쌓아 제국주의로 나아갔다는 불편한 진실은 가려졌다.

나카츠카 교수는 메이지 시대에도 ‘나쁜 기억’이 있음을 꼬집었다. 메이지유신 30여년 뒤인 1894년, 일본은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핑계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다. ‘매일 12명 이상, 103명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버린 주검이 680명에 이르렀다. 근방에는 악취가 진동했고, 땅은 하얗게 사람 기름으로 얼어붙었다.’ 당시 농민군 진압에 참여했던 일본군 병사가 쓴 ‘진중일지’ 내용이다. 기록에는 ‘붙잡아서 총살’ ‘심하게 고문’ ‘모조리 총살’ ‘불태워 죽여라’ 같은 표현도 곳곳에 등장한다. 일지를 발굴한 이노우에 가쓰오 홋카이도대 명예교수는 “일지가 일본군 학살에 따른 지옥도를 증언한다”고 말했다.

   
▲ 1995년 일본 홋카이도대 연구실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 지도자 박중진 등 6구의 유골. ‘1906년 9월 20일 전라남도 진도에서 사토 마사지로가 채집했다’는 문서도 함께 들어있었다. ⓒ KBS

청일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은 건 조선인이었다. 역사학자 하라다 게이이치는 청일전쟁 희생자를 일본인 2만, 중국인 3만, 조선인 3만 이상으로 추산했다. 나카츠카 교수는 동학 농민군 학살을 일본군이 최초로 저지른 ‘제노사이드(대량학살)’로 규정하고, 그 흐름이 3.1운동 진압과 난징대학살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찬란했던’ 메이지 시대부터 이미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이다.

시바는 <언덕 위의 구름>에 “조선은 어쩔 도리가 없다, 자신의 의사와 힘으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능력은 전혀 없다”고 썼다. 시바 사관에 따르면 일제의 조선 ‘진출’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한 기자는 “동학농민운동이야말로 조선이 스스로 구체제를 뒤엎고 근대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일본이 들어와서 그야말로 박살을 내 버렸다”고 지적했다. 근대를 건설할 기회는 학살로 철저히 막고, 구체제가 무너진 뒤 분출하는 조선인의 에너지를 조선이 아닌 일본 제국건설에 쓰게 만든 장본인은 ‘아시아의 가련한 소년’ 또는 ‘모범 국가’였다.

‘언덕 위의 구름’에 일본을 가둔 ‘삿초 동맹’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춘 뒤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키나와와 조선을 정벌해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 남으로는 타이완과 필리핀 일대의 섬들을 노획해야 한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도자로 여겨지는 사상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유수록>에서 일본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나카츠카 교수는 이른바 ‘정한론(조선을 정벌해 일본을 발전시키자는 주장)’을 비롯한 그의 구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과 닮았다고 지적했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조선을 정벌해 명나라까지 속국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했다. 히데요시는 망상에 그쳤지만, 요시다 쇼인의 주문은 메이지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 등 그의 제자들에 의해 실현되기 시작했다. 한 기자는 “일본군이 15년 전쟁 동안 확보한 영토는 요시다 쇼인의 구상과 거의 일치했다“고 강조했다.

“‘정한론’은 지금도 일본 외교의 알파와 오메가예요. 일본이 살기 위해서는 한국을 점령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골수에 박혀있는 자들이 아직도 일본 사회의 주류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본이 위험한 거예요. 그들이 예전 같은 힘을 갖고 있든 없든.”

시바 료타로만 ‘메이지의 영광’을 파괴한 책임을 군부의 일탈로 돌리는 게 아니다. 전후 일본 사회는 좌우를 막론하고 시바의 역사관을 공유해왔다. 패전 직후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전후 일본을 이끈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정권은 <일본 외교의 과오>라는 외무성 문서에 ‘청일‧러일 전쟁을 포함한 그때까지 일본이 벌인 전쟁과 대외정책에는 과오라고 할 만한 문제는 없었다, 큰 성공을 거둔 시대라고 해도 좋다’고 썼다. 도쿄 전범재판에서도 1928년 ‘장쭤린 폭살 사건(만주 점령을 위해 일본군이 꾸민 사건)’ 이전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그 결과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극소수 전범들만 교수형에 처했고, 조선 식민지배 과정에서 저지른 범죄는 잊혔다.

   
▲ 도쿄 지요다구 기타노마루(北の丸) 공원에 있는 요시다 시게루 동상. 1946년부터 1954년까지 5번이나 총리를 역임한 그는, 현 부총리 아소 다로(麻生太郞)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 flickr

당시 도조 히데키와 함께 A급 전범으로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 갇혀 있던 사람 중에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도 있었다. 요시다 시게루 정권 때인 1948년 석방된 그는, 1955년 양대 보수 정당인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을 합쳐 자민당을 결성한 ‘보수 합동’을 이끄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이 일로 원내 제1당이던 일본사회당은 1996년 해체될 때까지 만년 야당으로 전락했다. 이후 기시는 총리가 돼 전후 일본 재건을 지휘했다. 한 기자는 “기시를 석방하고 활동 자금을 댄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고 꼬집었다. 미국이 냉전 체제에서 우위를 잡기 위해 ‘일본을 영원히 좌파가 정권을 잡을 수 없는 체제로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한 기자는 여전히 굳건한 ‘삿초 동맹(薩長同盟)’을 일본이 시바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로 들었다. 삿초 동맹은 에도 말기인 1866년 사쓰마(薩摩)번(현 가고시마현 일대)과 조슈(長州)번(현 야마구치현 일대)이 맺은 정치‧군사 동맹을 말한다. 견원지간이던 이들이 힘을 합치면서 에도막부가 무너졌고, 메이지유신이 성공했다. 이후 이들은 요직을 차지하며 일본 사회 주류가 됐는데, 그 후예들이 지금도 여전히 ‘메인 스트림’을 쥐고 있다는 게 한 기자의 설명이다.

   
▲ 일본 군정을 장악한 사쓰마‧조슈 출신 인사들. ⓒ 박진홍

요시다 쇼인과 조선 침략에 앞장선 그의 제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청일전쟁 때 제1사령관으로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온 ‘일본군의 아버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모두 조슈 출신이다. 기시 노부스케와 그의 외손자인 현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 역시 출신지가 같다. 사쓰마 출신 첫 총리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는 강화도조약 때 일본 전권대표였다.

현 일본 정부 2인자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으로 악명 높았던 ‘아소 탄광’을 세워 재벌이 된 아소 타키치(麻生太吉)의 증손자다. 아소 탄광이 있던 규슈 지역 일대는 사쓰마 세력의 본거지였다. 아소 다로의 외조부는 요시다 시게루다. 지금 일본을 이끄는 지도자들 뒤에는 정한론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고, 조선인을 핍박해 돈을 벌었으며, 전후에도 조선 침략만큼은 인정하지 않은 선조들이 있는 것이다.

‘사상적 퇴폐’를 몰아낼 두 가지 열쇠

‘‘삿초 사관’이라고도 이야기하는 시바의 역사관은 메이지유신이라 불리는 사건의 실상을 다수 은폐하고 때로 날조하기까지 했다. 놀랍게도 삿초 정권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로 민족 역사상 대패전을 당하고 이민족에게 지배당한 사태, 즉 ‘국가를 멸망시킨’ 사태를 경험하고도 전후 또다시 관군 사관은 불사조처럼 부활해 오히려 메이지유신이라는 것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미화했다.’ - 나카츠카 아키라 <시바 사관의 과오>

나카츠카 교수는 삿초 동맹의 후예들이 일본 사회 주류가 돼 조선 침략을 은폐하고 거짓과 날조를 반복해온 결과 일본 사회가 ‘사상적 퇴폐’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일왕부터 일반 서민까지 일본 사회 구성원 모두가 ‘메이지 영광론’에 취해 잘못을 단호히 제지해야 할 정치적 기반도, 윤리적 원리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삿초 동맹의 후예들이 계속 ‘메인 스트림’으로 남아있는 한, 일본이 조선 침략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날은 영영 오지 않는 게 아닐까?

한 기자는 “답은 뻔하다, 결국 일본은 반성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근거는 ‘상황 변화’다. 독일이 일본과 달랐던 이유는 주변에 영국‧프랑스 같은 힘센 견제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았다면 독일은 유럽 사회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은 달랐다. 냉전체제 아래 미국이 일본을 지지하는 한 ‘중공’으로 불리던 중국과, 북쪽으로는 못 가는 ‘이상한 섬나라’ 한국을 무시해도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중국이 무섭게 성장해 무역 비중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미국이 동북아에 끼치는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다. 일본이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손해고, 도덕적으로도 손해다. 이런 사실을 일본이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기에 스스로 태도를 바꿀 거라고 한 기자는 전망했다.

   
▲ 1991년 8월 14일 국내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공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 뉴스타파

물론 피해 당사자인 우리가 일본이 스스로 반성할 때까지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 한 기자는 일본에서 ‘사상적 퇴폐’를 몰아낼 또 하나 열쇠로 ‘끊임없는 지적’을 들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는 소련 붕괴로 냉전이 끝나고, 한국에서도 6월 항쟁으로 군부체제가 물러난 ‘상황 변화’ 속에서 용기를 내 일본군 위안부 실상을 증언했다. 그전까지 “일본군은 위안부에 관여하지 않았다”며 발뺌하던 일본은 김 할머니 증언 이후 발칵 뒤집혔다.

위안부 문제가 세계적 인권 문제로 커지자 93년 결국 관방장관이 나와 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반성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한 기자는 “결국 중요한 건 용기를 낸 김 할머니처럼 우리 정부나 시민단체가 끊임없이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문제 삼아야 한다”며 마지막으로 힘주어 말했다.

“일본이 조선 침략을 인정하는 것이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이나 이익의 관점이 아닌, 인권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키는 데 필요하다고 지적하는 거죠. 그렇게 계속 노력하다 보면 세상이 바뀌고, 주변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서 문제도 풀릴 겁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8년 1학기 [저널리즘특강]은 한승동 김영미 오연호 강정수 이정환 최경영 박인규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박선영 기자

 

[박진홍 기자]
단비뉴스 환경부 박진홍입니다.
진실 앞에서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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