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중년 여인을 사랑한 청년의 슬픈 이별 ‘이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만한 데이트 신청 멘트가 또 있을까? 부담스럽지도, 거절할 수도 없게 만드는 질문이다. ‘이별의 슬픔’을 뜻하는 어려운 한자말로 제목을 단 영화 <이수>(離愁). 이 영화에서 스물다섯의 청년 시몽은 마흔의 커리어우먼 폴라에게 그렇게 접근한다. 그녀는 시몽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주었을까? 영화 <이수>는 오래된 사랑과 새로운 사랑에 혼란스러워하는 여자의 모습, 그리고 그녀의 선택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스물넷에 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원작으로 한다. <카사블랑카>의 주연 잉그리드 버그만, 히치콕의 <싸이코>에서 싸이코 역을 한 안소니 퍼킨스, 프랑스 샹송가수 이브 몽땅이 출연해 화려한 캐스팅으로 눈길을 끌었다. 배경은 프랑스 파리다.

이기적인 사랑에 진짜 사랑이 다치다

주인공 폴라(잉그리드 버그만)는 마흔의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폴라에게는 5년 된 애인 로제(이브 몽땅)가 있다. 왜 결혼하지 않냐는 질문에 폴라는 자유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작 폴라의 삶은 자유로움과 거리가 멀다.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집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의 애인 로제는 젊게 살고 싶다며 과속운전을 하고 젊은 여자를 만나러 다닌다.

로제는 폴라에게 시몽(안소니 퍼킨스)이란 고객을 소개해준다. 시몽은 폴라에게 첫눈에 반해 자신의 일도 내팽개치고 그녀를 쫓아다닌다. 열다섯 살 차이 시몽을 마냥 어리게만 생각한 폴라는 다른 여자를 만나러 다니느라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로제를 원망하면서 점점 시몽에게 흔들린다.

▲ 폴라는 시몽과 함께 브람스 음악을 들으며 로제와의 첫 만남을 회상한다. ⓒ 영화 <이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시몽의 데이트 신청에 폴라는 응한다. 브람스 교향곡 1번 제4악장을 시몽과 들으면서도 폴라는 처음 로제를 만났던 날을 회상한다. 그런 폴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몽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한다. 시몽은 왜 브람스 음악을 들으러 가자고 했을까? 전봇대에 브람스 음악회 전단지가 붙어서일까? 브람스의 음악을 들으러 가자고 한 순간부터 시몽과 폴라의 결말은 예견되었을지도 모른다. 브람스는 열네 살 연상인 스승 슈만의 부인 클라라를 사랑했다.

폴라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시몽을 잠시 만나지만, 로제에게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달라는 로제의 한 마디에 로제에게 돌아간다. 아낌없이 사랑을 준 시몽은 눈물을 흘리며 폴라 곁을 떠난다. 이때 비로소 폴라는 자신이 너무 늙었음을 원망하며 절규한다.

로제와 결혼한 폴라는 과연 행복해졌을까? 영화 중반부에 시몽은 폴라에게 프랑스에서 재판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재판정에 데리고 간다. 시몽이 자리에서 일어나 폴라에게 외친다.

“당신을 고발합니다. 비인간적인 짓을 한 당신을 고발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붙잡지 않고 그냥 스쳐 보내는 행동을 고발합니다. 행복하지 않는 걸 고발하고 무료하게 사는 걸 고발합니다. 사형을 받아야 하지만 독방형을 선고합니다.”

로제와 외식을 하기 위해 옷을 고르는 폴라에게 전화가 온다. 일 때문에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로제. 폴라는 그렇게 독방형을 선고받았다.

세계를 넘나드는 남성중심적 사고

요즘 ‘영포티’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젊게 살고 싶어 하는 중년 남성을 지칭하는 용어다. ‘영포티’를 노린 상품들이 나오고, 중년 남성과 어린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도 나왔다. 하지만 왜 꼭 중년 남성과 어린 여자가 사랑해야 하나? 중년 여성과 어린 남자가 연애를 하는 드라마는 거의 없다. 있더라도 항상 여성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어린 남자와 만나는 자신을 괴롭힌다. 하지만 중년남성들은 그런 죄책감에 빠지지 않는다. 어린 여자를 만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로제는 시몽과 좋은 한때를 보내고 있던 폴라를 찾아온다. 로제는 계속해서 폴라의 약한 심리를 건드린다. 로제는 자신이 젊은 여자와 만나는 것은 정상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바람을 피워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폴라뿐이라는 거다. 그러나 시몽과 폴라는 정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폴라는 다시 흔들린다. 로제를 사랑해서 돌아간다고 하지만, 정말 폴라가 전처럼 로제를 사랑할 수 있을까?

▲ 시몽은 폴라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만나게 되지만, 결국 그녀에게 이별 통보를 받는다. ⓒ 영화 <이수>

폴라는 자신이 늙었다고 말한다. 시몽과 헤어지면서 그리 됐다고 절규한다. 폴라는 불안했을지 모른다. 젊은 남자와 만나는 중년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자기 사고를 지배하는 남성 중심적 사고 때문에 말이다.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시몽을 만나는 것은 사회에서 정상적인 관계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시몽을 만나면서도 자신을 사회에서 정상적인 시선을 받게 해줄 로제를 다시 찾는다. 폴라는 로제와 결혼을 하고 나오면서 “치과에 다녀온 기분”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괴롭히던 사회적 시선, 죄책감을 벗어버렸다는 것처럼.

최근 여자 아이돌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또는 ‘girls can do anything’이란 문구가 쓰인 핸드폰케이스를 가졌다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여자 아이돌을 혐오한 이유는 ‘페미니스트’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우월주의로 잘못 받아들여져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페미니즘의 본질은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의 해방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들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폴라도 남성 가부장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 여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폴라가 페미니즘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로제를 기다리는 여성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행복한 삶을 사는 여성이 되지 않았을까?


 편집 : 박경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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