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서울 광화문 ‘927기후정의행진’

지난해 ‘12.3 비상계엄’ 직후부터 지난 4월까지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던 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십자각에 지난 27일 오후 ‘비건 감자튀김 연대’ 등 단체명이 적힌 수백 개 깃발과 함께 인파가 모여들었다. ‘지구 좀 그만 덥혀’ ‘망해버린 지구에 케이팝은 없다' 등의 손팻말을 들거나 'MAKE EARTH GREEN AGAIN'(지구를 다시 푸르게)이 적힌 모자를 쓴 남녀노소도 속속 자리를 잡았다. 형형색색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가운데 ‘927기후정의행진’ 집회가 시작됐다.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등 664개 단체로 구성된 927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는 2019년 이후 다섯 번째인 이날 행진에 전국에서 시민 3만여 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이날 행진은 서울 외에 부산·광주·대전·제주·청주·산청·완주 등에서도 열렸다. 

서울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열린 927기후정의행진의 참가자들이 집회 진행자의 선창에 따라 ‘온실가스 감축 목표 대폭 강화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참가자들은 ‘고래가 죽으면 다음은 우리다’ 등 다양한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각자 들고나왔다. 김동윤 기자
서울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열린 927기후정의행진의 참가자들이 집회 진행자의 선창에 따라 ‘온실가스 감축 목표 대폭 강화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참가자들은 ‘고래가 죽으면 다음은 우리다’ 등 다양한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각자 들고나왔다. 김동윤 기자

‘기후정의로 광장을 잇자’ 다시 모인 사람들 

황인철 927기후정의행진 공동집행위원장은 오후 3시쯤 집회를 여는 발언에서 “이곳은 겨울부터 봄까지 응원봉과 깃발을 들고 내란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바로 그 광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탄핵 이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지만 수많은 위기는 여전하다”며 “내란에 맞섰던 용기, 눈보라 속 노래와 사랑을 되살려 9월의 행진을 이어가자”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이지현 참여연대 사무처장 등 사회자 2명은 참가자들과 함께 안전한 집회를 위한 ‘평등 약속’을 낭독했다. ‘나이, 성별, 성적 지향, 가족 형태, 장애 등으로 다른 참여자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등 5개 조항이었다.

황 위원장 발언에 이어 기후위기 최전선에 있는 당사자들이 나섰다. 충남 부여에서 유기농업을 하는 25년 차 농부라고 자신을 소개한 권혁주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은 “50년만의 홍수 아니면 가뭄, 100년만의 폭염 아니면 폭설 피해가 매년 반복되는 시대”라며 “수확을 위해 들인 땀과 노동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상황을 농민들은 수도 없이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측할 수 없는 기후재난에 노심초사하며 농사짓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 없는 세상에서 당당히 농사짓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박치우 씨는 “기후위기가 심화하고 탈석탄으로의 에너지전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지금, 발전소 노동자들은 공감과 두려움 속에 서 있다”며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기후위기를 막아내는 일과 노동자의 삶을 지키는 일은 충돌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며 “기업과 정부가 책임 있게 나서서 공공재생에너지를 확대하고, 노동자와 지역사회가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공공재생에너지란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이 협동조합 및 시민과 협력해 투자하는 공적 소유의 재생에너지를 말한다. 

권혁주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맨 오른쪽)이 기후재난 속에서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노총 택배산업본부 쿠팡 CFS지부의 이윤정 조합원(가운데)과 공공운수노조 발전HPS지부 부산지회의 박치우 조합원은 노동자들의 현실을 설명했다. 김동윤 기자
권혁주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맨 오른쪽)이 기후재난 속에서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노총 택배산업본부 쿠팡 CFS지부의 이윤정 조합원(가운데)과 공공운수노조 발전HPS지부 부산지회의 박치우 조합원은 노동자들의 현실을 설명했다. 김동윤 기자

본집회 마지막 순서는 청년·청소년, 이주민, 지역민, 여성, 종교인 등 12명이 함께한 927기후행진 선언문 낭독이었다. ‘기후정의로 광장을 잇자’ 제하의 선언문은 ‘기후정의에 입각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전환계획 수립’ ‘탈핵·탈화석연료, 공공재생에너지 확대로 정의로운 에너지전환 실행’ ‘성장과 대기업을 위한 반도체·AI산업 육성 재검토와 생태계 파괴 사업 중단’ ‘전쟁과 학살을 종식하고 방위산업 육성과 무기 수출 중단’ 등을 요구했다.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프리 팔레스타인’을 외치다 

본집회가 끝난 오후 4시부터 참가자들은 종각역, 을지로입구역, 시청광장을 거쳐 광화문으로 다시 돌아오는 1시간 30분가량의 행진을 시작했다.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원 20여 명은 수달, 산양, 두루미, 따오기, 반달가슴곰 등 멸종위기 생물을 상징하는 탈을 쓰고 행진에 나섰다. 경남 김해시 동광초등학교  고두철(43) 교사는 “멸종위기종을 널리 알리고 보호하자는 메시지를 담고자 동물탈 퍼포먼스를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 정덕초등학교 4학년생 6명은 담임교사와 함께 걸었다. 정수민·최예서·박솔리·이윤서·공하율 등 어린이들은 한목소리로 “동물들이 아프지 않은 세상이 되면 좋겠다” “동물들이 멸종되지 않고 다양성이 지켜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환경과생명을지키는교사모임 회원들이 수달, 따오기, 두루미 등 멸종위기 동물의 탈을 쓰고 행진하며 생물다양성 보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민기 기자
환경과생명을지키는교사모임 회원들이 수달, 따오기, 두루미 등 멸종위기 동물의 탈을 쓰고 행진하며 생물다양성 보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민기 기자

오후 5시 정각부터 3분 동안은 사이렌 소리에 맞춰 죽은 듯 도로에 눕는 ‘다이 인’(Die-In) 침묵시위가 진행됐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 도착한 일부 행렬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단학살을 비판하는 시위를 병행했다. 이들은 대형 팔레스타인 국기를 들고 ‘방위산업, 무기수출 중단하고 반전평화 실현하라’ ‘생태계 파괴하는 전쟁 지원 중단하라’ ‘프리 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 해방) 등의 구호를 외친 뒤 다이인 시위를 이어갔다. 직장인 윤묘능(35) 씨는 “도시 한복판에 누워서 기후위기와 전쟁에 대해 생각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되어 뜻깊었다”고 말했다.

927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오후 5시가 되자 길바닥에 누워 기후위기 대응과 전쟁 반대 등을 호소하는 ‘다이인’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민기 기자
927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오후 5시가 되자 길바닥에 누워 기후위기 대응과 전쟁 반대 등을 호소하는 ‘다이인’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민기 기자

행진 참가자들은 윤석열 전 대통령 퇴진 요구 시위에서 불렀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에스파의 'Whiplash'(위플래시) 등을 함께 부르기도 했다. 참가자들 가운데는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기 위해 다회용기와 텀블러에 간식을 담아온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행렬은 출발지인 동십자각에 돌아와 마무리 집회를 연 뒤 오후 5시 50분쯤 해산했다. 성소수자 인권단체 무지개행동의 이호림 활동가는 마무리 집회 발언에서 “기후위기가 만들어내는 불안과 불평등은 극우정치의 토양이 되고, 이미 취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삶을 더 위태롭게 만든다”며 “기후위기에 맞서는 우리의 행동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싸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927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다양한 구호가 담긴 현수막과 손팻말, 조형물 등을 든 채 나아가고 있다. 이날 행진은 서울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출발해 종각과 시청 등을 거쳐 출발지로 돌아오는 경로로 진행됐다. 이민기 기자
927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다양한 구호가 담긴 현수막과 손팻말, 조형물 등을 든 채 나아가고 있다. 이날 행진은 서울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출발해 종각과 시청 등을 거쳐 출발지로 돌아오는 경로로 진행됐다. 이민기 기자

전쟁·야구 등 모든 것이 기후위기와 닿아있다

한편 이날 본집회에 앞서 낮 12시 반부터 광화문 서십자각 터에서 오픈마이크(자유발언대) 등 사전 행사가 진행됐다. 탈핵시민행동이 운영한 부스(천막)에서는 참가자들에게 해바라기 머리띠를 나누어 주었다. 탈핵활동가 이영경(50) 씨는 “해바라기는 태양광발전, 풍력발전 등 친환경 에너지를 상징한다”며 “에너지전환을 위해 탈석탄과 탈핵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의 이서염(29) 자원활동가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수백 년 전부터 서구 자본주의 식민점령 정책으로 고통받아 왔다”며 “전쟁을 막는 것과 기후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분리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연대하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개인 참여자인 남혜원(22) 씨는 "(행사에서) 기후 문제를 넘어 국제 전쟁과 기업의 불평등에 대해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나와 좋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의 이서염 자원활동가가 팔레스타인 국기와 함께 ‘한국석유공사 가자지구 수탈 중’이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의 자회사인 영국 기업이 가자지구에서 이익을 취한다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민기 기자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의 이서염 자원활동가가 팔레스타인 국기와 함께 ‘한국석유공사 가자지구 수탈 중’이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의 자회사인 영국 기업이 가자지구에서 이익을 취한다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민기 기자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야구팬 모임 ‘크보플’에서 활동하는 제제(37·활동명) 씨는 자신이 응원하는 야구팀 기아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오픈 마이크 무대에 섰다. 그는 “여름철 야구장에서는 더위를 식히겠다며 ‘워터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폭염 상황에서는 누군가 씻고 마실 물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현재 야구장에서는 일회용품을 쓰지 않기가 매우 어렵다”며 “개개인에게 부담을 전가하기보다는 야구팀을 운영하는 기업이 구장 내 다회용품 이용 도입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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