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2024 대산농촌재단 장학생 하계연수

지난 3일 오전 9시 전북 고창군 성송면 도덕현유기농포도원에 21인승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농업 관련 전공 대학생과 농업전문기자를 지망하는 대학원생, 재단 직원 등 15명으로 이뤄진 대산농촌재단연수단이 내리자, 도덕현(64) 대표가 반갑게 맞이했다. 일행이 2000평 규모 대형 비닐하우스에 들어서자, 아직은 설익은 청포도가 천장 가득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하기 싫은 사람은 구실을 찾는다’ ‘결과를 능가하는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등이 쓰인 노란 현수막 10개도 보였다. 도 대표의 농사 철학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도 대표는 ‘유기농 작물은 생산량이 떨어진다’는 고정관념을 깬 포도 농사꾼이다. 일반적인 포도나무 한 그루당 포도 50~100송이가 열리는데, 이 포도원에서는 4500송이라는 기록이 나왔다. 온도변화와 병충해, 비바람을 막기 위해 하우스 재배를 선택한 데다, 토양을 건강하게 하는 유기농법을 쓴 덕분이라고 도 대표는 설명했다. 이 기록은 나무의 수명 등 조건 때문에 정식 등재되진 않았지만, 세계 기록을 관리하는 기네스북이 확인해 주었다고 한다. 유럽야생포도와 머루포도를 접목한 품종 개량도 생산성 향상에 한몫했다는 설명이다.  

수십 배 생산성 비결은 땅을 건강하게 되살리는 것 

전북 고창군 성송면 도덕현유기농포도원의 2000평 규모 대형 비닐하우스에서 포도송이들이 익어가고 있다. 김지영 기자
전북 고창군 성송면 도덕현유기농포도원의 2000평 규모 대형 비닐하우스에서 포도송이들이 익어가고 있다. 김지영 기자

이 포도원은 도 대표가 2004년 땅을 인수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지 농사를 짓던 곳이었다고 한다. 비료를 너무 많이 쳐서, 피에이치(pH)3.9까지 토양이 산성화한 상태였다. 작물이 자라기에 적정한 산도는 pH6.5~7.0 정도인데, 지나치게 산성화한 땅에서는 미생물이 살기 어려워 농사가 잘 안된다. 도 대표는 토양을 회복시키기 위해 2미터(m) 간격을 두고 땅을 1m 깊이로 한 줄씩 파냈다고 회고했다. 거기 스프링클러로 물을 틀고, 비료 성분을 물에 녹여 제거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두 달 내내 반복하니 토양의 산성도가 pH6.4로 회복됐다. 도 대표는 밭을 갈지 않은 채(무경운) 포도나무 묘목을 심었고 비료와 농약, 가축분뇨로 만든 축분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신 대나무 톱밥, 두부 비지, 현미 쌀겨, 버섯을 배양하는 배지 등으로 만든 발효 퇴비를 썼다고 한다. 발효 퇴비는 탄소를 많이 품고 있어, 유기물 활동을 왕성하게 한다. 이를 ‘탄소순환농법’이라고 부른다. 현재 도덕현포도원 토양의 유기물 함량은 약 7%로, 일반 농경지 토양의 2배 이상이다.

도덕현 대표가 대산농촌재단 연수생들에게 유기농 포도 재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지영 기자
도덕현 대표가 대산농촌재단 연수생들에게 유기농 포도 재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지영 기자

도 대표가 유기농의 가치를 깨달은 것은 과일 경매사로 일하던 시절 만났던 ‘유기농 선배들’ 덕이었다. 그는 전북 정읍시 신태인군에서 1994년까지 경매사로 일했는데, 당시 작고 못난 모양 탓에 제값을 못 받으면서도 유기농으로 과일을 재배하던 농민들에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도 대표는 “당시 건강하게 키운 유기농 과일은 제값을 못 받고, 예쁘고 크게 키우기 위해 약물을 투입한 과일은 비싸게 팔렸다”며 “그때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던 농부들의 철학에 젖어 들어 지금까지 이렇게 유기농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철학과 함께, 땅의 힘을 살려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을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그래서 최근 전북 고창군 신림면에서 농사를 짓는 한 제자가 농협 서울 가락공판장에서 복숭아 8개에 30만 원의 최고가를 받은 일도 있다고 한다. 도 대표는 “5년 후에 은퇴하고 유기농에 대한 신념이 있는 사람에게 (포도) 묘목을 양도할 생각”이라며 “이 나무를 물려주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까지 물려주는 것과 똑같다”고 말했다. 도덕현포도원은 연간 10~11톤(t)의 포도를 생산해서 약 2억 원의 수익을 내고 있다. 

성공한 귀농인의 당당함 보여주는 ‘보리 언니’

연수생들은 지난 3일 오후 파릇파릇한 청보리가 넓게 펼쳐진 전남 영광군 군남면 포천리 죽신마을에 도착했다. 열세 가구가 모여 사는 이곳의 마을기업 지내들영농조합법인을 찾아서다. ‘물이 많은 땅’이라는 뜻의 ‘지내들(池內)’에서 이름을 딴 이 조합은 쌀, 보리 등의 농사뿐 아니라 농산물 가공과 판매 등의 모든 단계를 조합원들이 함께하고 있다.

이 조합에서 ‘보리언니’로 불리는 이선화(41) 기획팀장이 연수생들을 맞이했다. 전북대 미술학과를 나와 약 10년 동안 광주광역시에서 가구 디자이너로 일했던 그는 2015년 부모를 돕기 위해 찹쌀, 보릿가루 등을 온라인에서 팔았다가 500만 원 이상의 수익을 낸 일이 있다. 이를 계기로 2016년 아예 귀촌을 결행했다. 

“지금이야 광고를 넣지 않으면 플랫폼에서 개인이 수익을 내기가 힘든 구조인데, 그때만 해도 온라인으로 수익이 곧잘 났어요. 과연 내가 디자인으로 늙어서까지 먹고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때라, 농촌에 답이 있는 것처럼 보였죠.”

당시 이 팀장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지내들영농조합법인이 이미 결성돼 있었기 때문에, 이 팀장은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원래 여성 농민 6명과 남성 농민 3명이 결성했던 조합인 만큼 여성의 발언권이 컸고, 온라인 브랜딩과 디자인에 강한 이 팀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됐다. 이 팀장은 먼저 온라인 판매처를 개설해, 그동안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 팔아왔던 농산물을 전국 각지에 있는 소비자에게 판매했다. 또 조합원들과 함께 2차 가공품 개발‧생산에도 나서서 보릿가루, 쌀가루에 이어 곤약젤리, 핫도그, 떡볶이 등 간편조리식품까지 판매했다. 2차 가공품들은 모두 외부 위탁생산(OEM)으로 만든다. 지내들은 현재 연 매출 10억 원 이상을 기록하며, 수익금 일부를 마을회관 운영 자금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 팀장을 비롯한 청년들은 도시에 있을 때보다 농촌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더 인정받는다고 느꼈다고 한다. 현재 지내들영농조합법인에는 7명의 청년이 활동하고 있다. 

“제가 엄청난 걸 한 게 아니거든요. 전공자도 아니고요. 그런데 여기(농촌)에는 메일 주소 하나도 제대로 쓰기 어려워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아요.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기른 농산물을 온라인에서 팔 수 있게끔 도와주는 청년들이 필요하죠. 청년 대부분이 가진 기본적인 역량이 농촌에선 빛을 발할 때가 많아요.”

지내들영농조합법인 이선화 기획팀장이 대산농촌재단 연수생들에게 조합 활동과 청년의 역할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정 기자
지내들영농조합법인 이선화 기획팀장이 대산농촌재단 연수생들에게 조합 활동과 청년의 역할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정 기자

이 팀장이 처음 귀농했을 때는 ‘실패해서 돌아온 것 아니냐’는 시선에 자존심을 다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에 먼저 정착한 청년들이 ‘농부’라는 명함을 당당히 건네는 것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고. 이 팀장은 현재 청년농업인연합회, 청년여성농업인협동조합, 지오쿱전남청년농부협동조합 등에서 활동하며 다른 청년들과 농촌 생활 및 농사법에 관한 정보교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래 친구가 많이 없는 농촌에서 이런 네트워크는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 준다”고 강조했다. 특히 여성 청년들은 농업 기술이나 판매 방식 등에 관한 정보를 나누는 것 외에, 육아로 인한 활동 단절을 극복하는 일 등 생활면에서도 협력하고 있다고 한다.   

지리산을 넘어 전국을 잇는 사회적 협동조합 

연수단은 다음날인 4일 오후 2시 반쯤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작은변화베이스캠프 들썩’을 찾았다. 지리산을 상징하는 산 모양 지붕이 높이 솟은 건평 50여 평 규모 2층 건물의 1층 대강당에서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 산하 작은변화연구소의 조양호(51) 소장이 연수생들을 환한 미소로 맞았다. 지리산이음은 지리산권 내 시민사회의 소통 증진을 목적으로 설립된 조합이다. 

조 소장은 “지리산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5개 시군이 걸쳐 있는 산”이라며 “각 시군의 활동가들과 주민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려는 취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리산에는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 등 5개의 시군에 걸쳐 1361개 마을이 있다. 조 소장은 “같은 마을 활성화 사업을 해도, 구례군과 하동군에서 서로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며 인적 교류에 관한 갈증이 있어 조합을 만들게 됐다고 덧붙였다.

사회적협동조합인 지리산이음의 조양호 작은변화연구소장이 대산농촌재단 연수생들에게 지리산이음의 설립 취지와 활동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곽재화 기자
사회적협동조합인 지리산이음의 조양호 작은변화연구소장이 대산농촌재단 연수생들에게 지리산이음의 설립 취지와 활동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곽재화 기자

지리산이음은 스위스의 휴양지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 즉 다보스포럼을 본떠 2015년부터 10년째 ‘지리산포럼’을 열고 있다. 사회공헌에 관심 있는 시민단체 활동가 등이 매년 100여 명씩 모여 3박 4일 동안 장애인 인권, 정보공개 권리, 디지털 민주주의, 기후행동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다. 지리산이음은 또 강연장인 ‘들썩’을 운영하며 전국의 사회공헌 분야 조직을 대상으로 워케이션(일과 휴가의 결합)과 숙박형 워크숍 등을 지원하고 있다. 또 작은변화지원센터는 지리산 지역의 사회공헌 활동을 지원한다. 지역활동가(로컬 크리에이터)에게 활동비를 지원하고, 교육과 네트워킹(교류)의 장을 만들어 준다. 지리산포럼 홍보 행사를 서울에서 열어 지리산권을 홍보하는 일도 하고 있다. 

서울 태생인 조 소장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활동가 등으로 일하다, 제주살이를 거쳐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정착했다. 그가 제주에서 가져온 아이디어가 ‘마을카페 토닥’을 여는 것이었고, 이것이 지리산이음의 모태가 됐다고 한다. 토닥에서는 영화 모임, 공부 모임 등을 열고, 만화책을 비치해 어린이들의 아지트(비밀장소)처럼 꾸미기도 했다. 이어 마을 교류를 위한 세미나 등의 활동으로 발전시켜 나가다가, 2014년 지리산이음을 설립하게 됐다고 한다. 

대산농촌재단의 연수생들이 조양호 소장에게 지리산이음의 활동 등에 관해 질문하고 있다. 곽재화 기자
대산농촌재단의 연수생들이 조양호 소장에게 지리산이음의 활동 등에 관해 질문하고 있다. 곽재화 기자

조 소장은 로컬 크리에이터 등으로 귀촌 활동을 하는 청년들이 지역 주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로컬 크리에이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선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선주민과의 관계’”라며 “귀촌인이 적극적으로 다가가 농촌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연수생 박순재(24·강원대 동물자원과학과) 씨는 “귀농인들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텃세가 꼽히는 걸로 안다”며 “외지인에 대한 산내면의 열린 자세와 더불어 조 소장을 비롯한 귀촌인의 적극적인 태도는 농촌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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