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교양특강]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작년에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발표한 ‘젠더사회규범지수’ 통계를 보면, 한국의 젠더(사회적 의미의 성) 의식은 지난 5년간 급격하게 퇴행했어요. 가장 퇴행한 국가가 칠레, 두 번째로 퇴행한 국가가 대한민국입니다.”

김정희원(43)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지난 9일 충북 제천시 세명대 학술관에서 ‘페미니즘과 공정담론’을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인문사회교양특강 연사로 초청된 그는 이준석 개혁신당 국회의원 당선인이 2021년 국민의힘 대표가 된 과정과 2022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반페미니즘(반여성주의)과 결합한 공정담론이 한국의 성평등 인식 후퇴에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서 공정과 정의, 다양성과 차이 등을 주제로 연구하는 김정 교수는 2022년 ‘공정 이후의 세계’를 출간해 주목받았다.

반페미니즘과 공정담론 확산이 대중 인식에 영향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가 지난 9일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인문사회교양특강에서 ‘페미니즘과 공정담론’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전예나 기자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가 지난 9일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인문사회교양특강에서 ‘페미니즘과 공정담론’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전예나 기자

지난해 UNDP가 발표한 젠더사회규범지수는 각 국가의 젠더 규범이 2010~2014년과 비교해 최근 5년간(2017~2022년)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통계다. 설문은 ‘정치는 남성이 해야 한다’ ‘육아는 여성이 해야 한다’ 등 전통적인 성차별주의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김정 교수는 “이러한 (성차별적) 젠더 규범을 하나라도 가진 사람의 비율이 미국은 약 50%인데, 한국은 90%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국의 지수는 해마다 나아지고 있었으나, 윤석열 당시 대통령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거는 등 정치인의 반페미니즘 발언이 이어지면서 2017~2022년에 매우 악화했다. 당시 윤 후보 등 보수 정치인들은 ‘구조적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할당제는 불공정한 정책이다’ 등 반페미니즘과 결합한 공정담론을 확산시켰다.

지난해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한 젠더사회규범지수. 2010~2014년과 비교해 2017~2022년 각 국가 내에서 젠더규범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이 지표에서 한국은 칠레에 이어 2번째로 크게 퇴행한 국가로 나타났다. 출처 UNDP
지난해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한 젠더사회규범지수. 2010~2014년과 비교해 2017~2022년 각 국가 내에서 젠더규범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이 지표에서 한국은 칠레에 이어 2번째로 크게 퇴행한 국가로 나타났다. 출처 UNDP

김정 교수는 또 “윤석열 정부의 4대 국정 기조가 공정·상식·국익·실용이며 첫 번째 가치가 공정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지적했다. 높은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 기후위기 등 다중재난의 시대를 헤쳐 가야 할 정부가 ‘공정’을 앞세운 것은 정치적 계산이 있어서라는 의미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논란과 사회지도층 자녀 특혜 논란 등으로 불거진 ‘공정에 대한 사회적 열망’을 읽었다는 말이다.

김정 교수는 “굉장히 열심히 살고 있지만 노력한 만큼 보상받지 못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다고 반사적으로 느낀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사회에서는 전통적인 기득권도 노력한 만큼 공정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박탈감을 느낀다”며 미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키멜이 제시한 ‘피해 입은 특권’(aggrieved entitlement) 개념을 소개했다. 이는 전통적 특권을 누릴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 특권을 보상받지 못할 때 억울함 등 피해자 정서를 갖게 되는 현상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4년제 대졸, 군필, 남성이 정규직 일자리를 얻지 못할 때 박탈감을 느끼는 현상을 예로 들 수 있다. 한국에서 20대 남성이 불공정 문제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피해 입은 특권층’의 박탈감이 백래시로 표출

김정 교수는 “이러한 박탈감을 해소하는 방식이 구조적, 정책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희생양을 찾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 희생양을 지목하는 과정에서 백래시(진보적 변화에 대한 반발)가 등장한다는 설명이다. 미국 사회에서는 이민자를 향한 적대감과 혐오가 희생양 찾기의 사례지만, 아직 이민자 문제가 본격화하지 않은 한국에서는 여성, 퀴어(성소수자), 장애인 등이 백래시의 희생양이 된다고 김정 교수는 말했다.

김정 교수는 공정에 대한 열망이 ‘내가 노력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논리와 결합하면서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권층과 사회 지도층의 공정 가치 훼손이 깊이 숙의됐다면 불평등이나 특권의 문제 등 구조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겠지만, 한국에서는 ‘부모 찬스 떼고, 계급장 떼고 순수하게 능력으로 붙자’ 식의 능력주의 논의로 비화했다는 것이다.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들이 김정희원 교수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이날 특강에는 줌 화상회의로 연결한 청강생 등 40여 명이 참여했다. 전예나 기자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들이 김정희원 교수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이날 특강에는 줌 화상회의로 연결한 청강생 등 40여 명이 참여했다. 전예나 기자

김정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공정담론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가장 유리한 담론”이라고 강조했다. 공정담론은 역사적 불평등, 젠더 차별 등의 구조적 문제를 삭제하고 개별화한 노력과 경쟁만을 강조해 결과에 대한 책임도 개인에게 돌린다. 그래서 기득권에 유리한 담론이라는 얘기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이 공정담론을 내면화할수록 시장 중심주의 등 개인화된 해결책을 선호하게 된다”며 “이 때문에 재분배 등 사회구조적 개선은 더욱 요원해지고 불평등과 차별은 악화되는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공정담론의 배경에 ‘개별주의적 존재론’이 있다고 말했다. 개별주의적 존재론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 이에 따른 보상을 중시하고 사회구조와 관계에 주목하지 않는다. 개별주의적 존재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연대하지 않으며 불평등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김정 교수는 “개별주의적 존재론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공정담론은 원자화 모델”이라며 “원자화 모델이 강화되면 타인을 경쟁상대로만 보고 취직, 승진, 분배 등 모든 것을 ‘제로섬 게임’(한쪽의 이득이 다른 쪽의 손실이 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다.

관계적 존재론과 페미니즘의 힘

김정 교수는 공정 담론의 대안으로 페미니즘의 힘을 강조했다. 그는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이성애 중심주의와 같은 억압적 체계에서 오는 폭력과 차별을 탈피하고 해방되고자 하는 운동”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특정 집단이 아닌 모두의 해방, 모두의 평등을 추구하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훼손하는 개별주의적 존재론에서 벗어나 관계적 존재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계적 존재론은 ‘사회가 존재하기에 개인이 존재한다’는 인식으로, 인간이 본래 취약하며, 일관되지 못하고, 서로에게 기대야 살 수 있는 상호 의존성을 가진 존재라고 본다. 그리고 사회에는 권력 격차 등 구조적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기울어진 운동장 안에서 각자 열심히 뛰는 대신 불평등한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정 교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아나 쿠퍼(1858~1964)를 인용해 “어떤 집단이 계속 차별을 받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불평등으로 인한 피해를 보거나 폭력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공동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관계적 존재론에서는 상호성, 돌봄, 평등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부상한다”고 소개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 홍성민(25) 씨는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개방적으로 논의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김정 교수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특히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와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된 반페미니즘 담론이 정당화되고 규범성을 부여받아, 혐오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예전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고 답했다.

같은 대학원 조벼리(23) 씨는 “공정과 관련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김정 교수는 “개인의 관심에 따라 우선순위가 다르겠지만, 국가 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구조적 불평등을 고려해 재정 정책을 펴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지출을 통해 빈곤계층, 소수자 등을 위한 안전망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 정부는 재분배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대학원 강민정(24) 씨는 “경쟁이 필요할 때도 있는데, 공동체의 연대를 해치지 않으면서 건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방법과 현실에서 연대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물었다. 김정 교수는 기후위기 등으로 경제사회 전반이 재편돼야 하는 상황에서 경쟁 논리는 더 이상 개인과 사회를 잘 살게 하는 데 유효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연대를 위해서는 아주 작고 가까운 것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며 ‘콩깍지 만들기’를 제안했다. 콩깍지 안에 대여섯 개의 콩알이 모여 있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상호부조하고 연대할 수 있는 그룹을 먼저 만들자는 뜻이다.

강연에 이어진 질의답변 시간에 강민정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이 질문하고 있다. 전예나 기자
강연에 이어진 질의답변 시간에 강민정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이 질문하고 있다. 전예나 기자

같은 대학원 김동연(31) 씨는 “이미 자산을 많이 가진 기득권층이 관계적 존재론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겠는지” 질문했다. 김정 교수는 “관계적 존재론의 필요성을 가장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은 여성, 장애인, 퀴어, 빈곤계층 등 한국 사회에서 타자화된 존재들”이라며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윤리나 선의로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자고 이야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소득세 개편, 부유세 도입 등 법적·정책적 압박이 필요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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