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BBC코리아 최정민 PD
영국 공영방송 <BBC>는 2001년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기획, 취재, 촬영, 편집 등 영상 제작의 전 과정을 한 사람이 하는 ‘비디오저널리스트’(Video Journalist) 직군을 도입한 것이다. 가벼운 6mm 카메라와 간편한 영상 편집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가능해진 일이기도 했다. 현재 BBC는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현지 언론인을 비디오저널리스트로 채용하고 있다. 이들은 세계 곳곳의 긴박한 상황을 담은 영상을 만들거나, 자신의 개성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그 영상은 BBC의 국제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로 유통된다.
2017년 한국에 설립된 <BBC코리아>도 BBC의 해외 지부 중 하나다. BBC코리아는 대북 라디오 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에게 해외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주로 하지만, 한국의 이슈를 다룬 한국어 뉴스 콘텐츠도 직접 만든다. BBC코리아에도 비디오저널리스트가 있다. 최정민(54) PD다. 그는 이태원 참사 등 한국 사회의 중요한 사건이나, 탈북민과 장애인 등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주로 제작해 왔다. 파급력도 크다. 14일 기준, BBC코리아 유튜브 채널에서 그가 만든 영상들의 조회수는 도합 1700만 회를 넘었다. <단비뉴스>는 지난달 11일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BBC코리아 사무실을 찾아 최정민 PD를 만났다.
방송국PD에서 비디오저널리스트로
최PD는 1989년 사회교육학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재학 중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자신이 쓴 대자보를 사람들이 집중해 읽는 모습을 보고 짜릿함을 느꼈다. 대중과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1995년 <청주MBC>에 PD로 입사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CJB청주방송>, <Q채널> 등을 옮겨 다니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2003년 <MBC> ‘100분 토론’에서 프리랜서 메인 연출을 맡기도 했는데, 스튜디오에서 주로 일하다 보니, 다큐멘터리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졌다.
2006년 미국 영화학교 칼아트(CalArts)에서 3년간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를 공부했다. 졸업 후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다큐멘터리를 가르치면서, 개인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갔다. 지엠(GM) 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을 다룬 ‘검은 명찰’(2009)은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에 진출했다. 이후 잠시 1인 다큐멘터리 제작사를 운영하다가 2017년 BBC코리아 비디오저널리스트로 입사했다. 그가 오랫동안 흠모해 온 BBC의 다큐멘터리스트 아담 커티스(Adam Curtis)의 영향이 컸다.
쇼윈도 안에서 본 바깥 풍경
최PD의 영상 스타일은 그가 지난해 보도한 영상 ‘파주의 성매매 집결지, 용주골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서 잘 드러난다.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집창촌인 용주골은 1950년대 미군을 상대로 형성돼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용주골을 향한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지자, 지난해 초 파주시는 용주골의 강제 폐쇄를 결정했다. 성매매 여성들은 저항했지만 언론과 여론은 파주시의 편이었다.
최PD는 성매매 여성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사람들에게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용주골에서 ‘관리자’로 통하는 이의 도움을 받고, 성매매 여성을 직접 설득하여 촬영 허가를 받았다. 카메라를 들고 성매매 업소 내부로 들어갔다. 여성들은 모두 40대 이상이었다. 용주골에 남아있는 이유와, 용주골의 갑작스러운 폐쇄 결정에 대한 심경 등을 물었다. 여성들은 침대와 의자에 앉아 각자의 이야기를 처음 털어놓았다. 반응은 뜨거웠다. BBC코리아의 유튜브를 보면, 지난 13일 기준으로 이 영상의 조회수는 약 286만 회이고, 1만 2000여 개의 댓글이 달려 있다.
이 영상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최PD는 지배적 여론의 반대편에 서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비틀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걸 좋아한다. 최PD에게 공정성은 모든 입장을 기계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모든 입장을 두루 듣고 전체 맥락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가령, 용주골을 취재할 때 최PD는 파주시청과 시민단체들의 입장을 모두 들었다. 다만 그는 “영상에서 누구를 중심인물로 삼고 무슨 내용을 어떻게 전달할지는 결국 비디오저널리스트의 ‘주관적인’ 선택에 달린 문제다”라고 말했다.
사람의 얼굴을 입힌 뉴스
BBC는 2014년 디지털 시대의 생존 전략이 담긴 보고서 ‘2022: 5억 시청자를 향하여’(2022: Toward 500 Million)을 발간했다. 보고서는 텔레비전 뉴스 리포트를 잘라 온라인에 그대로 올리는 기존 방식으로는 수용자의 몰입도를 높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젊은 세대는 기존의 텔레비전 뉴스 리포트를 관행적으로 수용하던 세대도 아니다. 보고서는 기존의 뉴스 제작 방식에서 과감히 벗어나, 디지털 플랫폼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영상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개인의 서사에 집중하는 뉴스’다.
‘개인의 서사에 집중하는 뉴스’는 인물과 갈등, 배경 등 스토리텔링 요소가 결합된 뉴스다. 시청자는 영상의 서사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인물의 상황에 몰입하고, 갈등의 배경이 되는 상황을 이해한다.
최PD가 2022년 제작한 영상 ‘중증 발달장애 아들을 둔 엄마의 호소’는 개인에 집중하는 뉴스의 사례다. 서른 살 중증 발달장애인 ‘지니’는 정부의 탈시설 정책 때문에 10년째 시설 대기자 명단에 올라와 있다. 지니의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이 죽은 뒤 아들 지니가 정신병원에 갇힐 거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영상은 한 모자의 위태로운 일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정부의 일률적인 탈시설 정책을 드러낸다. 최PD는 이러한 접근법을 “뉴스에 사람의 얼굴을 입히는 과정”이라 표현한다.
마음을 건드리는 영상을 위한 노하우
최PD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는 상상력이 정말 중요하다”고 말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근간으로 하지만, 소재와 주제를 찾고 그것을 스토리텔링 하는 과정에는 제작자의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그는 이야기가 될 법한 주제를 먼저 정하고, 그 주제에 부합하는 인물을 찾는다. 코로나 시기에 자영업의 위기란 뉴스가 나올 때, 최PD는 어느 분야의 자영업이 가장 힘들지 상상했다. 맨몸으로 이용해야 하는 목욕탕이 떠올랐다. 취재해 보니 실제로 많은 목욕탕이 매출 급감으로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최PD는 서울에 있는 목욕탕을 돌아다니며 영상에 담을 공간과 인물을 물색했다.
최PD는 인터뷰의 즉흥성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터뷰이와 사전 취재를 할 때는 전화로 기본적인 사실 관계만 짧게 확인한다. 질문지는 인터뷰이에게 사전에 전달하지 않는다. 그는 “인터뷰이가 말을 미리 정리해 오면, 촬영할 때 부자연스러운 티가 난다”고 말했다. 최PD는 인터뷰를 시작하면 인물의 구체적인 경험과 감정을 즉흥적으로 이끌어내는 데 집중한다. 같은 질문을 변주해서 여러 번 던지기도 한다. 생생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야 시청자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자가 몰입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다양한 형식과 방법을 실험한다. 유튜브에서 인기 있는 영상들의 편집 스타일도 눈여겨보고 차용한다. 가령, 시청자를 잡아 끌만한 핵심 부분을 짧게 잘라 영상 맨 앞에 배치하거나, 점프 컷과 빠른 교차편집 등을 활용해 영상의 몰입도를 높인다. 구성에 대한 고민 없이 내용을 설명하는 데 치중하는 영상은 시청자를 오래 붙잡기 어렵다. “뉴스 영상의 편집 스타일이 외딴 섬처럼 고립되어 있으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진정성은 여전히 힘이 세다
최PD는 유튜브 시대에도 진정성은 여전히 힘이 있다고 믿는다. 한국 언론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가운데 상당수는 가벼운 소재를 흥미롭게 전달하는 ‘스낵영상’을 주로 제작한다. 그런데 “젊은 시청자층이 유튜브에서 스낵영상만 찾는다는 생각은 선입견일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관건은 전달 방식이다. 진지하고 무거운 소재라 해도 영상제작자가 깊이 고민해서 진정성을 담아 전달하면 젊은 시청자도 호응한다는 사실을, 최PD는 오랜 제작 경험에서 배웠다.
50대 중반의 최PD는 여전히 영상에 진심이다. 5분 길이의 인터뷰 영상을 편집하는 데도 일주일을 쓴다. 컷을 이어 붙이고, 자막을 쓰고, 음악을 선정하는 등 매 순간마다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주변에선 뉴스 영상 하나 만드는 데 적당히 빨리 하면 되지 않냐 묻지만, 그에게 뉴스는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과 다름없다. 굳센 ‘고집’ 덕에 이제 최PD의 영상 스타일은 BBC코리아에 뿌리를 내렸다. 그의 영상은 한국 시청자에게 BBC코리아의 색깔과 지향점을 알리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뉴스의 경계를 넓히는 시도를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