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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민주주의 위기, 중국이 대안 될까
[인문교양특강]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주제 ① ‘분노의 시대’에 대하여
2018년 02월 16일 (금) 21:29:00 김소영 박상연 나혜인 기자 kim314sy@gmail.com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강의를 시작하며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인도 작가 판카지 미슈라(Pankaj Mishra)가 2017년 초 쓴 <분노의 시대>(Age of Anger: A History of the Present)였다. 미슈라는 이슬람국가(IS),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에서 나타나는 국수주의·고립주의를 그간 서구 사회 엘리트들이 이상으로 여겨왔던 개인주의, 자본주의가 표준화·세계화하면서 나타난 부작용이라고 말한다. 김 발행인은 아직 국내 번역본도 출간되지 않은 이 책을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지금 이 시대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며 높이 평가했다.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강의하고 있다. ⓒ 김소영

트럼프, 브렉시트…지금은 ‘분노의 시대’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국내외 많은 언론에서 ‘트럼프 현상’이란 말을 붙였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의 당선이) 민주사회에서 한 번쯤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인가요?”

김 발행인은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분노의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해왔고, 인권 등 미국식 가치를 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강압적 수단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미국에서 트럼프 같은 희귀한 인물이 대통령이 된 그 자체가 기존 관념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충격적인 일이다. 김 발행인은 “결국 엘리트를 향한 민중의 분노가 ‘트럼프 현상’을 만들었다”며 “대중이 과연 엘리트의 ‘무엇’에 그토록 분노했는지를 우리는 들여다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득권층을 향한 서민들의 분노가 트럼프 투표로 이어졌다는 해석은 사실 당시 우리 언론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쇠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rust) 벨트’의 저소득·저학력·백인 노동자들은 트럼프를 당선으로 이끈 열렬한 지지층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김 발행인은 “당시 선거 결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교육받은 중산층 백인들도 트럼프에게 상당한 표를 던졌다”며 “힐러리를 향한 대중들의 분노가 상상 이상으로 컸다”고 말했다.

김 발행인은 “사실 당시 힐러리는 정치경력이나 지식 정도, 미국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세계사적 의미를 고려했을 때 이성적으로 당연한 대안이었다”면서도 “문제는 이성적인 사람들조차 힐러리로 대변되는 미국의 기득권층에게 표를 던지기 싫어했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제불황이 계속돼 서민들은 살기 어려운데 강연료로 수십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힐러리의 모습에서 대중들은 진정성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위선자’라는 적개심만 늘어갔다는 것이다.

   
▲ 2016년 트럼프 현상과 브렉시트 사태는 지금이 ‘분노의 시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Flickr

김 발행인은 트럼프 당선 다섯 달 전으로 돌아가 브렉시트 사태도 톺아봤다. 그는 단순히 유럽연합이 깨진다는 것보다도 그 균열을 만든 국가가 영국이라는 데 주목했다. 자유무역주의 토대를 닦은 애덤 스미스를 낳았고, 어떤 나라보다 자본주의, 보편주의, 세계주의를 선도했던 영국이 유럽공동체의 진보적 방향인 유럽연합을 박차고 나온 게 브렉시트라는 것이다. 김 발행인은 “영국은 브렉시트를 통해 보편주의에서 특수주의로, 코스모폴리타니즘에서 내셔널리즘으로 후퇴했다”며 “가난한 이탈리아, 그리스가 아니라 영국이 유럽연합을 거부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영국 엘리트 정치가들은 국민투표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이와 같은 결론을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이민자, 유색인종,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가 나날이 늘어가는 것 역시 그 뿌리는 ‘엘리트에 대한 증오’다. 경제성장이 안 되는 상황에서 기득권층에 대항할 여력이 없는 대중이 분노의 화살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김 발행인은 “시민적 안목을 교육받을 만한 여유나 기회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서구 근대 문명을 태동시킨 프랑스혁명 때의 자유, 평등, 박애나 오늘날 엘리트들이 설파하는 이성, 합리, 보편, 세계주의 등의 가치들은 대중들에게 공허하게 들릴 뿐”이라며 “기득권층이 쳐놓은 울타리 밖으로 배제됐다는 느낌을 받은 대중들이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지금 당장 저 유색인 때문에 내 자리가 없어진다’고 분노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원한을 품고 도덕을 외친 노예들

<분노의 시대>를 쓴 미슈라는 평소 서구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옥시덴탈리즘’을 비판해왔다. 김 발행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지도에서 좌표를 보듯, 인간이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려면 역사에서도 좌표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세상을 보느냐도 중요합니다. 미슈라의 <분노의 시대> 책을 보면 조금 다른 각도로 근대를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 발행인은 노예가 주인에게 품던 ‘원한’이라는 감정으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했다. 그는 철학자 니체가 논한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예로 들었다. 니체는 모든 생명체가 힘을 지니며, 서로 투쟁하면서 지배하는 힘(주인)과 지배받는 힘(노예)으로 나뉜다고 봤다. 이때 ‘도덕’의 역할이 커진다. 도덕은 강자에게 모욕당하는 약자들이 만든 자기방어용 장치이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 억압체제에 짓눌려 살던 최하층 약자들이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하며, 베풀라는 실천윤리는 노예가 주인의 강한 힘을 제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이었다.

도덕이 존재해도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노예는 주인에게 핍박받으면서도 언젠가 복수한다는 ‘원한’의 마음을 품는다. 김 발행인은 ‘원한’이라는 뜻의 불어 ‘ressentiment’를 소개하며, 영어 ‘resentment’가 뜻하는 ‘분노’와는 조금 뜻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원한’은 약자가 모욕을 받아도 달리 대처할 방법이 없는 무력감을 느끼는 감정 상태이다.

   
▲ 김 발행인은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으로 노예가 주인에게 느끼던 ‘원한’에 집중했다. 약자와 강자 사이에 권력 구조가 형성되고, 그에 따른 무력감, 원한 등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 김소영

영어를 써야 하는 지식인의 모욕감

노예와 주인의 계급 구조는 사라졌지만, 오늘날에도 ‘원한’을 가진 사람은 많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강자와 약자는 공존한다. 서구 문명 중심의 세계 질서, 계층적인 지식인 사회 등 현대 사회는 지배당하는 ‘비주류’ 다수를 필요로 한다. 비주류 약자는 끊임없이 강자의 횡포에 무력감을 느낀다.

김 발행인은 자기 경험을 토대로 비주류 지식인의 설움을 토해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그에게 영어는 ‘절대권력’이다. 아무리 좋은 글을 써도 영어가 아니면 독자는 제한된다. 영어권 출판물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쉽게 뻗어 나간다. 전 세계를 상대로 독보적인 발언권을 얻는 셈이다. 영어의 권위가 공고해질수록 영어를 쓰지 않는 사람조차 정신적으로 예속된다.

김 발행인도 때로 영어 원서를 읽으며 비판 없이 신뢰하는 선입견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를 ‘식민지 근성’이라며, “스스로 기만당한다”고 꼬집었다. 그런 그에게 은사 백낙청 교수의 가르침은 각별하다. 대학에서 ‘창작과 비평’ 수업을 진행하던 백 교수는 영어 소설을 교재로 수업하면서도, 학생들이 한 대목 한 대목 비판적으로 읽도록 연습시켰다. 영어책, 영어 문장이라면 무조건 정당하겠거니 믿던 20대 청년에게 백 교수의 가르침은 잊지 못할 “평생의 은혜”로 남았다.

‘모욕 속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사람을 가장 고약하게 만드는 건 ‘모욕감’이라고 생각해요. 혁명, 저항, 투쟁이라는 건 아주 배고픈 사람들이 주동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거든요.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혁명을 주동합니다. ‘배고픔’, 그것보다도 더 서러운 것은 ‘모욕감’이에요. 인간적인 자존심에 가해진 상처를 참을 수 없는 거예요.”

김 발행인은 개인의 모욕감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 없을 때 ‘원한(ressentiment)’의 감정이 싹튼다고 설명했다. 그는 단순히 개인감정뿐 아니라 하나의 집단에서부터 사회적 문화 현상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약자의 위치에서 모욕감을 해소하지 못하는 집단과 사회는 언젠가 ‘원한’의 감정이 분출한다는 말이다.

'아름다운 나라' 외친 중국, 서구 문명 대안 될까

김 발행인은 현재 나타나고 있는 주류 서구 문명의 부작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최근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언급했다.

“중국은 그동안 겸손한 자세로 고개 숙이고 있었습니다. 이번 당대회를 거치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어요. 얼마 안 가 미국을 능가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당대회였습니다.”

지난 10월, 제19차 중국공산당전국대표대회(당대회)가 열렸다. 당대회에서는 향후 5년간의 국정 방향이 제시된다. 김 발행인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당대회에서 연설하며 ‘아름다울 미(美)’자를 많이 사용한 데 주목했다.

   
▲ 2017년 10월 열린 제19차 중국공산당전국대표대회 개막식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등장하자 참석자들이 일제히 박수치고 있다. ⓒ The Guardian

“시진핑 주석이 연설에서 ‘생태 문명을 건설하겠다’, ‘미래 사회’와 ‘아름다운 사회로 가겠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최근 정치인 연설에서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건 흔하지 않은 말입니다. 중국 문화라는 큰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미국 사회에서 (정치인들은) 아름다운 사회(Beautiful society)를 건설하겠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근현대 국가는 부국강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김 발행인은 ‘아름다운 나라’를 언급한 정치인으로 시 주석 전에 백범 김구 선생이 있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나라’는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문화의 힘’과 관련된다.

서구 사회의 제국주의와 다른 중국 

“중국이 앞으로 큰 나라가 되겠다는 결심의 배후를 중국 전통, 역사 등을 고려해 세심하게 봐야 합니다. 중국 변화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한국 언론에서 제19차 당대회 보도와 논평을 보면서 느낀 건 우리나라 언론이 제국과 제국주의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제국주의처럼 중국이 커지면 경계해야 한다는 식으로 써놨는데 중국의 역사, 전통을 돌이켜보면 쉽게 제국주의란 말 갖다 붙이기 힘듭니다.”

김 발행인은 중국을 바라보는 한국 언론의 잘못된 시각을 조공제도와 연관 지어 설명했다. 조공은 과거 중국 주변 국가들이 중국에 정기적으로 예물을 바친 행위이다. 작은 나라가 강한 나라에 일방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치는 굴종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과거 동양에서 통용되던 지도자의 태도에 대한 기대와 상관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덕과 인격을 갖춰야 하며,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조공제도를 통해 변방 오랑캐들에게 예물을 받는 대신 그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고, 무역과 문화 교류 등을 했다. 김 발행인은 조공제도와 같은 역사를 통해 중국을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의 틀로 바라볼 수는 없다고 한다.

“현대 역사는 과거 역사, 전통이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자본주의라 해서 모든 국가가 똑같지 않습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전통이 달라서입니다. 그런 점을 놓치고 현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안에서만 중국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대안적 문명의 가능성

“중국은 여태껏 자신을 억압해 온 서구 근대 문명과 본질적으로 다른 대안적 문명을 창조하는 데까지 나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가가 중요한 질문입니다.”

19세기는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서구 사회가 식민지를 찾아 동양과 제3세계로 나아가던 때였다. 이 시기에 아시아 각국 지식인들은 대개 서구 사회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나라를 지킬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김 발행인은 그러한 아시아 지식인의 모습을 담은 미슈라의 다른 저서 <제국의 몰락에서>(From the Ruins of Empire)를 소개했다. 김 발행인에 따르면 이 책은 결론을 맺기보다 질문을 던진다. 경제 성장을 통해 서양과 맞먹는 경제력을 가진 중국과 인도는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 비전이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느냐”다.

   
▲ 판카지 미슈라의 <제국의 몰락에서>(From the Ruins of Empire)는 떠오르는 아시아 국가에게 새로운 대안을 묻는다. ⓒ Amazon.com

“시진핑이 연설에서 아름다운 사회, 샤오캉 사회(물질적으로 풍족한 중산층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통해 적어도 중국 지도부는 세계가 중국에 요구하는 게 뭔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실제로 추진하는 경제 정책은 구태 그대로입니다.”

김 발행인에 따르면 중국과 한국 지식인의 차이점은 “새로운 길로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느냐”다. 생태 문명 등을 언급한 시 주석의 당대회 연설과 달리 중국 정부가 추진 중인 계획은 원자력·화력발전소 등의 건설이다. 이는 서구 문명이 걸어왔던 방향과 유사하다. 다만 연설을 통해 중국은 스스로가 걷고 있는 길이 잘못됐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 발행인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이런 질문과 고민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쓴소리를 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7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정희진 김한솔 신형철 나영석 이택광 유진룡 김종철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조은비 기자

[김소영 기자]
단비뉴스 편집부, 국제부, 시사현안부 김소영입니다.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파고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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