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국정원 특수활동비

   
▲ 이창우 기자

폐건물에서 ‘물건’과 돈을 주고받는 범죄조직을 정보∙수사기관 요원이 급습하는 연출은 진부하다. 현실은 다르다. 돈 가방을 건넨 쪽은 정보기관 간부다. ‘눈먼 돈’이라 불리는 특수활동비 40억원을 매년 10억원씩 청와대에 상납했다는 국정원 이야기다. 박근혜 정부 국정원장 3명 중 남재준·이병기 전 원장이 구속됐고, 남은 이병호 전 원장 역시 불구속 기소가 유력하다. ‘문고리 3인방’ 중 이재만 청와대 전 총무비서관, 안봉근 전 홍보비서관은 특수활동비 문제로 다시 재판을 받는다. 검찰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 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고 보고 사용처를 조사하겠다고 벼른다. 특활비 1억원 수수 의혹을 받은 최경환 의원 사례에서 보듯 국정원 눈먼 돈이 향한 곳은 청와대뿐 아니었다. 명색이 국가정보기관이라는 국정원 꼴이 말이 아니다.

▲ 이헌수 당시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이 돈가방을 들고 청와대 근처에 도착하면, 이재만 혹은 안봉근 전 비서관이 이를 직접 받았다. 지난 24일 이 전 실장이 검찰에 진술한 내용이다. 두 명의 전 비서관은 이 같은 사실을 인정했다. ⓒ Pixabay

대통령 비자금 조성은 빙산의 일각이다. 한국 정보기관은 국가가 아닌 ‘정권의 안보’에 헌신하는 일이 더 많았다. 통치자의 의중에 따라 동백림사건, 인혁당 사건, 부림 사건, 수지 김 간첩 조작사건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용공 조작이 이뤄졌다. 신민당 전당대회, 통일민주당 창당대회에 깡패를 보내 난장판을 만들거나 여당에 불법 선거자금을 지원하는 등 정치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테러를 막아야 할 정보기관이 외국에서 야당 정치인을 납치해 바다에 수장시키려는 시도까지 벌였다. 2012년 대선 국면에서 국정원이 저지른 댓글 조작 사건만 봐도 군사정권 시절과 달라진 게 없다. 국가정보원이 아니라 ‘국가전복원’이라는 농담이 나오는 이유다.

국정원법은 직권남용과 정치관여를 금지하고 처벌 규정까지 명시한다. 그런데도 상황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감시받지 않는 예산’에 있다. 올해 국정원 본예산은 4931억으로 모두 특수 활동비다. 예산 규모를 감추려고 다른 국기기관에 편성한 비밀활동비와 기획재정부 예비비까지 더하면 정확한 추산도 어렵다. 국정원이 ‘얼마 쓰겠다’고 총액만 통보하면 기재부, 국회 정보위를 거쳐 일사천리 통과다. 예산 집행 후 감사원의 회계감사도 받지 않는다. 민감한 정보 제출을 거부할 수 있다는 국정원법 덕분이다. 정보위에 자료가 제출돼도 통제된 장소에서만 열람할 수 있고 보좌진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 실질적 검토가 어렵다. 이런 사정이니 예산으로 댓글을 다는지, 대통령에게 상납하는지 알 길이 없다.

선진국에서는 정보기관의 예산 비공개를 허용하되 최소한 통제 아래 둔다. 미국 국회 정보위 의원들은 비밀유지서약을 한 보좌진의 도움을 받는다. 예산 규모를 들키지 않도록 분산 편성하는 작업도 의회 심사가 끝난 뒤 이루어진다. 보안 유지와 예산 통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 영국은 정보기관의 예산을 통합해 심사·결산의 실효성을 높인다. 독일에서는 2009년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정보기관이 ‘기밀’을 핑계로 의회의 자료 요구를 거부할 수 없도록 했다. 이런 대안들은 우리 정보기관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마련한 ‘15대 적폐’ 중심 법 개정안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이제는 ‘눈먼 돈’이 권력이 아닌 국민을 향할 때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남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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