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정치보복

▲ 송승현 기자

나치 고위급 전범들의 후손을 추적한 책 <나치의 아이들>에는 전범들의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요제프 맹겔레는 우생학에 심취해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을 선별해 생체실험을 자행한 인물이다. 유전자를 이용해 신체를 바꾸는 데 관심 있던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쌍둥이를 발견하면 “쌍둥이”라고 소리치며 기뻐할 정도였다. 연합국의 나치 청산 과정에 숨어 살던 그는 말년이 돼서야 아들 롤프 맹겔레와 다시 만난다. 재회 장소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끔찍한 일에 대한 진실 여부를 묻는다. 요제프는 “그것은 연합국의 거짓말, 선전이다”라고 답한다. “당당하면 왜 재판을 받지 않냐”고 이어지는 질문에 그는 힘주어 내뱉는다. “정의는 없고, 복수를 원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 10월 29일은 촛불 1년째다.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났던 촛불집회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라는 외침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송승현

요제프는 자신의 범죄를 잊기라도 한 것일까?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당연해 보이는 사실도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신경과학으로 풀어낸다. 뇌 속의 개념들은 신경세포 접합 부분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시냅스에 들어있다. 주어진 사실이 의미가 있으려면 시냅스 안에 저장된 정보와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합리적이라는 딱지를 단 채 뇌에서 쫓겨난다. 최근 국정원 댓글 공작 등 연이어 드러나는 적폐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주변 세력이 내세우는 ‘정치 보복’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신경과학을 대입하면 그들 뇌에서 ‘적폐’라는 개념이 들어설 공간은 없다. 그러니, 억울하다는 주장만 되뇐다. 우리 사회가 고개를 꿋꿋이 세워 적폐와 마주하고, 단죄해야 하는 이유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통해 ‘평범한 악’이란 통찰을 펼친다. 아이히만은 재판정에서 단지 나치의 지침에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스스로 사고하지 않았고, 선악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렌트는 그의 죄를 덜어주지 않고, 악인이라 칭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이 자행한 악은 당시 독일에 퍼져있던 ‘인간은 절대적으로 불평등한 존재’라는 이데올로기의 결과였다. 아렌트는 ‘평범한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끝없이 사고하며, 결코 이성을 포기하지 말고 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라”고 주문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적폐 청산에 적극 나서고 있는지 되돌아보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 드리워질 ‘평범한 악’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질 뿐이다.

▲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시민들이 올린 촛불의 지향점은 ‘정치 보복’이라는 궤변의 ‘평범한 악’을 잠재울 적폐청산이다. ⓒ 송승현

독일에서 나치 청산이 한결같이 순풍을 탔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나치당의 일원으로 전후 복역까지 했던 게오르크 키징거가 1966년 총리에 오른다. 1968년 나찌라는 공격을 받기 시작한 키징거는 결국 1969년 총선에서 패해 총리 자리를 빌리 브란트에게 넘겨준다. 브란트는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지구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과거 나찌 독일과 분명히 선을 긋는다. 독일이 과거 나치의 죄를 떠안는 동시에 나찌를 청산하는 성과였다. 최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극우 정당이 부상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독일 정치지형은 과거 적폐를 단죄하는 데서 비롯됐다. 오늘 29일은 촛불 1년째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시민들이 올린 촛불의 지향점은 ‘정치 보복’이라는 궤변의 ‘평범한 악’을 잠재울 적폐청산이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조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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