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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말과 글의 모범이 돼 주십시오
[제언의 편지] 임형준 기자
2017년 07월 21일 (금) 12:08:26 임형준 기자 feyenoord24@naver.com

대통령님 안녕하십니까?

   
▲ 임형준 기자

저는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에 사는 올해 아흔인 이수열입니다. 영어투, 일본어투, 중국어투가 점령한 우리말을 바로잡는 일을 합니다. 신문, 방송, 교과서에 나온 외국어투 표현을 고치지요. 2004년 한글학회는 저를 ‘우리말·글 지킴이’로 선정했습니다.

19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대통령님은 촛불이 만든 대통령입니다.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시민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쳤지요. 대통령님, 하나 여쭙겠습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올까요? 아닙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으로부터’는 영어의 from을 해석한 것으로 우리말에는 없는 영어투입니다. 바르지 못한 표현의 대표 격입니다. 

저는 열일곱 나이에 선생님이 돼 47년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1993년 서울여고에서 정년퇴임했습니다. 학교에서 나온 뒤 신문을 보니 잘못된 표현이 무척 많았습니다. 신문, 방송, 교과서 할 것 없이 우리말이 외국어투에 오염돼 엉망이었습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바로잡기 위해 빨간 펜을 들었습니다. 신문 기사나 논설문을 고쳐 필자에게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방송과 교과서에 나온 표현도 바로잡아 책으로 펴냈습니다. 이 일을 한 지 25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대중매체에 나온 잘못된 표현이 많이 줄었을까요? 대통령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바뀐 걸 느끼지 못합니다. 

   
▲ 우리말과 우리글이 외국어투에 오염됐다. 오염된 말과 글은 우리 정신과 문화를 황폐하게 만든다. ⓒ Flickr

대통령님은 지난 4월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안보 불안 세력에게 안보 맡길 수 있겠나”라고 했습니다. ‘정체성’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정체’로 써야 옳습니다. ‘정체(正體)’와 ‘성(性)’ 모두 사물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정체성이라 하면 본질의 본질이라는 말이 됩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 젠체하는 식자들 간에 유행병처럼 만연해서 국어의 질서를 문란케 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취임사에 있는 잘못된 표현을 바로잡은 적이 있습니다. 김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 취임사 쓸 때 유의할 점을 취임사 기초를 쓴다고 알려진 이경재 당시 특보에게 편지로 부쳤습니다.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취임사의 잘못된 부분 30여 곳을 고쳐 <한겨레>에 보냈지요. 최인호 당시 교열부 편집위원이 1993년 3월 19일 자 신문에 ‘한국말 병과 대통령 취임사’라는 칼럼을 통해 이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지난 5월 9일 대통령님의 취임식을 TV로 봤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필사였던 윤태영 씨가 취임사를 썼다고 들었습니다. 머리를 싸매고 입술을 뜯어가며 썼겠지요. 취임사에 잘못된 표현이 많더군요. 대통령님은 “대한민국은 숱한 좌절과 패배에도 불구하고…”라고 하셨습니다. ‘불구(不拘)한다’는 ‘어떤 일에 얽매이거나 거리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이 필요 없이 상투적이고 획일적으로 써서 말과 글의 세련미를 해칩니다. ‘대한민국은 숱하게 좌절하고 패배했지만…’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대통령님은 사드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 및 중국과 진지하게 대화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대통령님, ‘및’은 우리말이 아닙니다. 국어 대사전과 우리말 큰 사전은 ‘및’을 ‘어찌씨(부사)’라고 해서 ‘그밖에 또’라고 풀이합니다. ‘어찌씨’는 글의 풀이말(서술어)을 꾸미는 말인 데 비해, ‘및’은 ‘임자씨(체언)’ 사이를 연결하는 구실만 합니다. 부사라고 할 수 없고 ‘이음토씨(접속조사)’라고 할 만한데, ‘및’은 반드시 띄어 쓰니, 토씨는 앞말에 붙여 쓴다는 한글 맞춤법 규정에도 어긋나 토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의 어떤 씨(품사)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우리말이 아닙니다. 국어사전에서 즉시 삭제하고 우리말과 우리글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합니다.

   
▲ 이수열 선생은 평생을 바른 우리말과 글 보급을 위해 애써왔다. 제언은 이 선생에게 양해를 구해 선생의 이름을 빌려 기자가 썼다. ⓒ 임형준

대통령님은 4년 중임제로 개헌한다고 하셨지요. 개헌할 때 헌법의 내용뿐 아니라 표현도 고쳐야 합니다. 헌법에도 외국어투가 남발되고 있습니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제9조)’, ‘국회는 선전포고, 국군의 외국에의 파견 또는 외국군대의 대한민국 영역 안에서의 주류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제60조 2항)’ 같은 표현은 일본어를 철저히 흉내 낸 기형문장입니다. 각각 ‘국가는 전통 문화를 이어받아 새로운 민족 문화를 창달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국회에는 선전포고와 국군을 외국에 보내거나 외국 군대를 대한민국 영역안에 머무르게 하는 일에 동의하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다’라고 써야 합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제34조 1항)’, ‘국회는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한다(제41조 1항)’ 역시 치졸한 영어 번역투입니다. 각각 ‘모든 국민에게 사람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 ‘국회는 국민이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로 선출한 국회의원으로 구성한다’라고 써야 합니다. 전문에 있는 ‘평화적 통일’과 제60조 1항에 있는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따위 표현은 ‘적(的)’을 여러 가지 문장 성분의 접미사로 쓰는 중국어투입니다. 제가 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대한민국 헌법>을 같이 보내드리니 꼭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대통령에게 책을 보낸 바 있는데, 청와대에서 “우리는 책을 받을 수 없다”며 돌려보내더군요. 뇌물이라 생각했나 봅니다. 대통령님에게 보내는 이 책은 뇌물이 아니라 헌법을 우리말로 바로잡아달라는 국민 한 사람의 마음이 담긴 청원입니다.

저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인연이 있습니다. 이 총리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할 때 저와 만난 뒤 기사를 썼지요. 그때도 김 대통령의 취임사를 호되게 비판했습니다. 바른 우리말 표현도 이 총리에게 열심히 가르쳐 줬지요. 이 총리가 24년 전에 배운 우리말 강의를 떠올려 대통령님에게 도움말을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가 저를 소금에 빗대더군요. 저의 깊은 지식과 열정이 우리말의 소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대통령님에게 보내는 이 편지가 소금처럼 짤 수도 있겠지요. 소금이 짠 것은 사실이지만, 소금이 짜지 않으면 그것을 어찌 소금이라 하겠습니까. 이 보잘것없는 글이 대통령님의 소금이 된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은 ‘겨레 얼’인데 외국어투에 점령당하는 상황을 내버려 둔다면…. 우리가 ‘언어의 노예’가 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켜야합니다.

대통령님은 청와대에 있는 위민관(爲民館)을 여민관(與民館)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국민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잘 드러난 행정입니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국민을 생각하신다면 말과 글도 잘 쓰셔서 우리말과 우리글의 모범이 돼 주시길 바랍니다.      

2017년 7월 21일
이수열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 드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지 어느덧 두 달이 되었다. 촛불 염원은 적폐청산과 사회개혁이었다. 5.18행사장에서 흘린 눈물과 유가족을 포옹하던 일, 의전없이 버스를 타거나 기능직과 식사하고 기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요구하던 초반의 감동은 연이은 인사 실패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여소야대라는 정치상황도 개혁드라이브에 걸림돌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취임 두 달,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비뉴스 젊은 저널리스트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쓴 제언의 편지를 연재한다. (편집자)

편집 : 황두현 기자

[임형준 기자]
단비뉴스 편집부장, 지역농촌부, TV뉴스부, 시사현안부 임형준입니다.
세상을 뒤집어 볼 줄 아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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