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 풍속문화사] ⑤ 제헌절 계기로 본 ‘함무라비 법전’과 법의 정신
[문화일보 공동연재]

부산했던 세기말을 막 넘긴 1901년. BC 6세기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궁전이 자리하던 곳이자 33세의 알렉산더가 BC 324년 그리스 장군들과 페르시아 귀족 여성들 간 합동결혼식을 치렀던 이란의 역사 고도 수사(Susa). 33세 신예 고고학자가 땀을 흘리며 유적지를 파헤치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이집트 학자 귀스타브 제퀴에(Gustave Jequier). 페르시아 유물 발굴 독점권을 얻으려 애쓰던 프랑스 정부와 교섭해 꾸려진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드 모르강의 수사 발굴팀 소속이던 제퀴에는 성채(Citadel)로 불리던 언덕에서 검은색 비석을 발굴해 낸다.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 17일은 제헌절이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가 7월 12일 헌법을 제정해 17일 반포했으니 올해로 69주년째다. 17일은 이성계가 고려왕으로 등극(실질적 조선 개국)한 1392년 음력 7월 17일(양력 8월 5일)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제헌절을 맞아 제퀴에가 수사에서 찾아낸 함무라비 법전을 통해 고대의 법 풍속과 법의 정신을 짚어 본다.

▲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함무라비 법전 비석. 상단부에 함무라비 왕(왼쪽)이 태양신 샤마시에게 예를 올리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 김문환

38만여 점의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지하 전시실 왼쪽으로 가면 드농(Denon)관이 나온다. 메소포타미아 발굴 유물을 전시 중인 이곳에 높이 225㎝의 검은색 섬록암 비석,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되뇌던 함무라비 법전이 탐방객을 기다린다.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 샤마시에게 법전 받아

꼭대기에 2명의 인물조각이 보인다. 왼쪽에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둥근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인물이 함무라비 왕. 오른쪽 옥좌에 앉아 신을 상징하는 고깔모자를 쓴 인물은 바빌로니아의 태양신 샤마시(Shamash, 수메르의 우투). 함무라비 왕은 왼손을 허리에 가지런히 대고 오른손을 가슴으로 공손히 들어 경배의 예를 올린다. 샤마시는 오른손에 권위를 상징하는 홀(Hole)을 쥐었다. 함무라비 왕이 신성한 법전과 정의실현의 의무를 부여받고 있음을 상징한다.

뜻밖에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적힌 점토판이 옆에 자리한다. 이 무슨 일인가. 함무라비 법전은 당시 점토판으로도 제작됐다.

섬록암 함무라비 법전은 수도 바빌론에 세운 전시용 기념비다. 마치 로마가 BC 451년 12표법(十二表法, Lex XII Tabularum)을 제정한 뒤 동판에 새겨 로마 포럼의 신전 앞에 로마 공화정의 상징으로 설치했던 예와 같다. 제국 각지로 보내 바빌로니아 총독들이 지키도록 한 실제 법전은 점토판으로 만들었다.

‘눈에는 눈’ 동해보복형(同害報復刑)…메소포타미아 법치 전통 

▲ 루브르 박물관에는 점토판에 새겨진 함무라비 법전도 전시돼 있다. ⓒ 김문환

악법처럼 비치는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진 것은 바빌로니아 왕국 6대 왕 함무라비(재위 BC 1790∼BC 1750년) 치세다.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통일한 뒤인 BC 1772년쯤으로 추정된다. 반고의 ‘한서(漢書)’ ‘지리지(地理誌)’에 은나라의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와 만들었다는 BC 10세기쯤 고조선의 ‘8조 법금(法禁)’보다 800여 년 앞선다.‘만약 누군가 남의 눈을 상하게 하면 그의 눈을 상하게 한다’, 함무라비 법전의 상징처럼 알려진 조항이다. 196조. ‘눈에는 눈’으로 알려진 복수법(復讐法)의 동해보복형(탈리오 법칙)을 보여준다.

함무라비 법전의 의미는 법전 내용 대부분이 남아 있는 가장 완벽한 보존상태의 가장 오래된 법전이란 점이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이보다 앞서 3개의 법전이 만들어졌다. BC 2050년쯤 수메르 우르 3왕조의 우르남무왕 법전(Code of Ur-Nammu)이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성문법이다. 그 뒤로도 에슈눈나 법전(Laws of Eshnunna, BC 1930년), 리피트-이슈타르 법전(Codex of Lipit-Ishtar, BC 1870년)이 등장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이런 법치 전통을 이어 함무라비 법전이 탄생한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이 바빌로니아 제국의 법전인데 왜 수도 바빌론(이라크 영토)이 아닌 수사(이란 영토)에서 발굴됐을까? BC 11세기 수사에 수도를 둔 엘람 왕국의 슈트룩 나훈테 왕이 바빌론에 침략해 전리품으로 약탈해 갔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란의 수도 테헤란 국립박물관에 가면 수사에서 발굴된 것을 기념해 복제품을 세워 놨다.  

판독된 246개 조항 가운데 32개 13%가 사형조항  

보존상태가 가장 완벽한 함무라비 법전이 끔찍한 조항으로만 가득한 악법인가?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섬록암 법전에는 총 44줄 28구절에 282개 법 조항이 새겨져 있다. 이 중 36개 조항은 마모돼 알 수 없고 246개 조항이 판독됐다. 이 가운데 32개 13%가 사형조항이다. 그러니 일견 잔인한 법전으로 비칠 만하다.

사형의 유형을 보면 먼저 신전이나 궁전에서 물건을 훔쳤을 때다. 도망간 노예는 물론 이를 도와준 사람 역시 사형으로 다스렸다. 노예 경제사회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군대에서 명령 불복종 역시 사형이었다.

▲ 함무라비 법전이 발굴된 이란 수사 유적지. ⓒ 김문환

함무라비 법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철저한 신분제라는 점이다. 부자나 노예가 아닌 자가 빈자나 노예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서 법의 보호를 받았다. 가령 의사가 부자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경우, 손을 잘랐다. 하지만, 노예를 죽음에 이르게 하면 벌금을 내면 그만이었다. 여성에게는 남성보다 더 가혹한 법의 심판을 내렸다.

간통 여인 사형…수메르의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에서 후퇴

우리 사회에서 2015년 범죄로부터 벗어난 간통을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어떻게 다스렸을까? 이 대목에서 먼저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의 여권(女權)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함무라비 법전을 만든 바빌로니아 왕국은 셈족 아카드인이다. 셈족에 앞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군 민족은 수메르다. 인류사 최초로 문자(쐐기문자)를 발명한 주역 수메르 민족은 셈족에 흡수돼 정확한 실상을 들여다보기 어렵지만, 흥미로운 점은 일처다부제다. 여인 한 명이 여러 명의 남자를 데리고 산 것인데, 고대 신석기 농경사회 영향으로 해석된다. 아카드인에게 멸망당하기 전 수메르 라가시 왕국의 기록을 보면 우르카기나 왕(BC 2380년∼BC 2360년) 때 일처다부제를 법으로 금지시킨다.

그러니까,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우던 무렵까지 라가시의 수메르 여인들은 여러 남자를 데리고 사는 특권(?)을 누린 셈이다.

600여 년이 흘러 라가시 왕국이 무너지고, 셈족이 메소포타미아의 주역이 된 뒤인 BC 18세기. 셈족 아카드인의 바빌로니아 왕국은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면서 일처다부제 금지를 넘어 여인에게 더욱 가혹한 면모를 보인다. 간통을 저지른 여자를 사형시켰으니 말이다. 물론 정을 통한 상대 남성도 함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남녀를 수장형(水葬刑)으로 물에 빠트려 죽였다. 근친상간, 그것도 자신의 아들과 관계를 맺은 여인에게는 더욱 끔찍한 형벌이 기다렸다.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火刑)이다. 하지만 남성인 아들은 타 도시로 추방당하면 그만이었다.

법전의 2분의 1은 계약 다룬 자본주의 법  

이제 함무라비 법전의 또 다른 측면을 보자. 법전 조항의 50%가 계약과 건축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자본주의 법전이란 점이다. 예를 들면 황소 한 마리를 끄는 일꾼의 임금이나 의사의 임금 등을 다룬다. 나아가 거래조건은 물론 집 지을 때 계약조건, 가령 건물붕괴 시 건축업자의 배상이나 남의 집에 피해를 줬을 때 배상 규정들을 소상히 담았다.

법전의 3분의 1은 상속과 이혼, 친권의 가사(家事) 문제다. 남성 중심의 혈통사회로 굳어진 가운데 순수 혈통과 친권 문제가 중요 관심사였음이 엿보인다. 흥미로운 대목은 성생활이나 음식 같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까지 법으로 규정하는 점이다. 남편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거나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 이혼을 요구해 친정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점도 눈에 띈다. 강력한 군사대국을 일군 만큼 병역의 의무 관련 대목도 빠지지 않았다.

함무라비 법전의 진정한 의미…애민정신  

함무라비 왕은 자신의 역할을 부각하며 정복 전쟁을 통해 넓어진 제국 주민들을 일관되고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목적으로 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법전 서문에 함무라비 왕이 직접 밝힌 제정 의도는 시공을 초월해 진정한 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해준다.

“정의를 온 나라에 퍼트리고, 사악한 자들을 없애며,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과부와 고아가 굶주리지 않도록, 평민이 악덕 관리에게 시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법을 만든다고 명시해 놓았다.

농민에게서 소를 압류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에서 보듯 생존권 보장의 애민정신은 법전에 담긴 인권 보장의 의미를 더욱 살려준다. 무죄 추정 상태에서 피고나 원고가 자신을 위한 증거 제시 권리를 부여받은 점도 인권 존중 조치로 손색없다.

공직자 관련 규정도 마찬가지다. 판결에 실수를 저지른 공직자는 벌금을 물 뿐 아니라 영원히 판사석에 앉지 못하도록 했다. 현대 공직자나 법조계 종사자들이 눈여겨볼 대목이 아닐까. 사심 없이 공정하게 법 적용과 판결에 임해야 하는 기본을 되새겨 주니 말이다.


문화일보에 3주 단위로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교수는 '동서문명사'와 'TV저널리즘'을 강의합니다. (편집자주)

편집 : 박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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