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이슬람

▲ 곽호룡 기자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막 창시했을 때 그를 따르는 사람은 소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신의 계시를 들었다는 그의 말은 메카에서 무시당한다. 무함마드를 감싸 주고 보호해주던 아내 카디자가 죽고 위기가 찾아온다. 메카 사람들은 무함마드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계획을 알아차린 무함마드는 메카를 탈출해 메디나에 정착한다. 이 사건을 이슬람교도들은 ‘헤지라(성스러운 이동)’이라고 부르고, 무함마드가 메카를 떠난 날을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메디나에서 힘을 기른 무함마드는 군대를 이끌고 메카를 점령한다. 이를 ‘지하드(성스러운 전쟁)’라 부른다.

“유대인은 다른 사람이 그를 유대인이라 바라보기 때문에 유대인이다. 유대인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반유대주의자이다.” 사르트르가 <반유대주의 초상>에서 한 말이다. 한 민족이나 종교의 정체성은 그들을 혐오집단으로 모는 세력 때문에 더 강해진다. 여기에 고향 예루살렘에서 강제로 이주당한 ‘디아스포라’의 기억이 덧대져 유대교의 ‘시오니즘’이 자라났다. 오늘날 이슬람교가 처한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20세기 이슬람국가들은 중동의 석유를 둘러싼 미국과 전쟁에서 졌다. 패배는 그들을 굴복시키기는커녕 무함마드가 박해받은 ‘헤지라’의 기억이 더해져 이슬람 근본주의로 강화됐다.

프랑스는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사회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다문화사회일까? 프랑스 헌법은 인종의 구분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인종 별 인구통계를 잡지 않는다.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에게서는 모든 것을 박탈하고, 개인으로서의 유대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1791년 프랑스 혁명 입법회의에서 클레몽 토레네의 발언은 프랑스의 정신을 상징한다. 윤리학자 마이클 왈저는 이러한 프랑스 정신이 대혁명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는 대혁명 때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구체제를 무너뜨렸다. 피를 흘려 민주주의를 쟁취한 시민으로서 자부심이 프랑스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 '인권의 나라' 프랑스가 특정 장소에서 히잡과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자 무슬림 사회는 반발했다. ⓒ Gettyimages

개인을 중시하는 프랑스에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이민자의 테러와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극우당인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는 프랑스가 존중하는 가치 때문이라는 역설적인 지적이 나온다. 프랑스는 공공장소에서 히잡과 부르카의 착용을 금지한다. 여성의 인권이 종교의 관습에 앞선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무슬림 전문가 파르하드 코스로카는 <뉴욕타임스>에서 “독실한 무슬림들은 프랑스가 이슬람 정체성을 모욕한다고 여긴다”는 반대의 분석을 내놓는다.

왈저는 다문화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초기 상태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거칠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약속된 사회적 평등이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박탈된다면 이런 지나친 거칠음은 역사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거칠음’은 그 사회가 건강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왈저의 해결책은 이질적인 공동체를 그 자체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다른 공동체를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라면 핍박당하는 개인의 목소리는 아예 나오지 않을 위험이 있다.

오랜 시간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도 다문화사회로 가는 길목에 있다. ‘걔넨 원래 무식하고 더러워.’ 우리의 잣대로 그들을 판단한다면 갈등 해결의 길은 갈수록 멀어진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안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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