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업이슈] 산악대장 엄홍길을 키운 원도봉산

’높은 다락에서 술잔 들고 한번 웃어 보는데
수많은 푸른 봉우리 뾰족뾰족 무더기를 이루었고
십년 세월 하는 일 없이 귀거래시만 지었는데
백발이 다정하여 자꾸만 재촉하누나’

세종 때 문장가인 서거정이 도봉산 만장봉 아래에서 읊은 시 구절이다. 산 전체가 큰 바위로 이루어진 도봉산의 웅장한 경관에 감탄해서 지은 시다. 줄지어 늘어선 바위봉우리의 다양한 기복과 굴곡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절경으로 손꼽힌다.

지난 4월 15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생 둘이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에 참여했다. 전철 1호선 망월사역 3번 출구 앞, 사람들 시선이 모여 있는 곳에 엄홍길(57) 대장의 징표인 중절모가 한눈에 들어왔다. 팬들의 사진 촬영 요청에 엄 대장은 연신 미소 지으며 카메라 렌즈를 응시했다. 연간 1000만 명 이상이 찾는 도봉산. 서울의 병풍을 이루는 명산을 ‘연예인‘급 인기를 누리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함께 올랐다.

▲ 엄홍길 대장과 함께 원도봉산을 오르는 30여명 시민들. ⓒ 강민혜

도봉산은 경기도 의정부시, 양주시와 서울시 도봉구에 걸쳐있다. ‘원래 도봉산’이란 뜻으로 원도봉산이라고 자주 불리는데, 행정적으로는 북한산국립공원에 속한다. 도봉(道峯)은 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조선 왕조 개국의 길을 닦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엄 대장이 “출발합시다”라며 등산 시작을 알리자 참가자들은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선선한 날씨 덕에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전 날 내린 비가 매캐한 미세먼지도 쓸어내렸고 살랑살랑 불어주는 봄바람도 땀을 식혀줬다. 그러나 비탈길이 시작되자 금세 숨이 가빠졌다. 갈증에 물 생각이 간절해질 지음 엄 대장이 사람들을 불러세웠다.

“개인적인 생각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행동하시면 이 조직이 어떻게 되겠어요? 함께 가야 합니다. 빨리 가고 싶다고 해서 빨리 가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늦게 가도 등산하는데 힘들어집니다. 동반자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올라가야 합니다.”

▲ 시민들은 산행 초반에는 엄 대장을 앞지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뒤로 처졌다. ⓒ 강민혜

세 살 꼬마 엄홍길의 놀이터 원도봉산

“여러분이 앉아계신 돌이 제 집의 건축자재였습니다. 여기 돌로 지은 집이 있었고, 저기 앞마당에는 가을이면 밤이 우수수 떨어졌어요. 이 주위 나무들도 아버님이 심으신 것입니다. 저 큰 오동나무도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거죠.”

널찍한 공터로 자리를 옮기자 엄 대장이 오래된 나무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엄 대장은 원도봉계곡에서 자랐다. 막 걸음마를 떼던 세 살 때부터 서른일곱까지. 34년을 줄곧 원도봉계곡은 엄 대장을 품었다.

▲ 엄 대장이 어린 시절을 보낸 원도봉계곡. ⓒ 강민혜
▲ 어린 시절 집터를 시민들에게 자세히 설명하는 엄 대장. ⓒ 강민혜

소년 엄홍길에게 원도봉산은 ‘살아있는 놀이터‘였다. 버찌를 따먹으려고 나무를 기어오르고 토끼를 잡으려고 날다람쥐마냥 가파른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집 앞에 흐르는 계곡물은 한 순간 목욕탕이 되기도 우물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원도봉산을 처음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땀을 쏟아내며 올라온 길이 소년 엄홍길의 등하굣길이었다. 당시 정비도 되지 않은 비포장 길을 매일 오르내리던 그는 산 아래 ‘도시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겨울에는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눈을 헤쳤고 해가 지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숲 속에서 그는 부모님을 원망했다.

하지만 원망은 손바닥 뒤집듯 한 순간에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중2때쯤부터 ‘눈이 뜨였다’는 엄 대장은 산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고 했다.

▲ 망월사역에서 출발해 원도봉산을 오르다 보면 ‘엄홍길 집터’ 푯말을 만날 수 있다. ⓒ 강민혜

산이 줬던 고통과 상처는 그에게 ‘성장통‘과 같았다. 나무와 바위를 오르내리며 손이 베는 것은 그에게 일상이었다. 한겨울 찬바람에 입술이 트고 발끝이 얼어 터져도 그는 받아들였다. 그렇게 자연스레 엄홍길은 강해졌다.

집터를 뒤로 하고 한참 오르던 엄 대장이 멀리 커다란 두꺼비 모양을 한 바위를 가리키며 멈춰 섰다. 원도봉의 명물이라는 두꺼비바위에서 그는 클라이밍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바위에서 소년 엄홍길은 암벽등반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했다.

▲ 엄 대장이 어린 시절 등반 연습을 했다는 두꺼비바위. ⓒ 강민혜

원도봉산에서 기른 힘과 기술은 더 높은 곳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1988년 에베레스트를 기점으로 1995년 로체, 2000년 K2, 그리고 2007년 로체샤르까지. 그는 8000m급 고봉 16좌를 오르며 세계 정상급 산악인의 자리에 우뚝 올라섰다.

가파른 바위를 넘어서던 그가 아름드리나무 앞에 멈춰 섰다. 순간 나무를 끌어안더니 입을 맞추며 나무와 대화하듯 교감했다.

“올라가다가 오래된 나무가 있다 그러면 안아보세요. 그리고 기운을 주고받아요. 나무 한 그루가 한자리에서 백 년 오백 년 산다면 그 기운이 얼마나 크겠어요. 그 나무가 그냥 나무가 아니에요. 몇 세기를 살아간다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월성을 그리는 신라 고찰, 망월사

덕재샘에서 목을 축이고 가파른 숲길을 오르자 망월사가 보였다. 망월사는 의정부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639년에 신라 선덕여왕의 명으로 해호스님이 창건했다. 망월(望月). 신라 수도이자 왕이 있는 월성(月城: 지금 경주)을 그리며 나라의 융성을 기원한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실제로 망월사의 모든 건물은 월성을 바라보고 서 있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가 신라 패망 후 이곳에 은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만큼 망월사는 신라 왕실과 관련이 깊다.

▲ 망월사의 천중선원. 스님들의 참선수행공간이라 일반인들은 쉽게 출입할 수 없다. ⓒ 강민혜

바위와 한 몸처럼 붙어 자란 큰 나무를 지나 망월사의 돌계단을 올랐다. 그러자 시야에 지장전(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인 무위당이 들어왔다. 무위당 현판 뒤에는 특별한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다. 구한말 임오군란 때 서울에 주재하던 청나라 위안스카이가 직접 쓴 것이다.

엄 대장은 모자와 등산화를 벗어두고 보살상 앞에 배례했다. 오늘 남은 산행의 무사안전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그는 히말라야 16좌 원정을 가기 전에도 항상 절을 찾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집 위쪽 망월사에서 그를 위해 불공을 드리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원도봉산은 저에게 천하제일 명산이고, 기운이 좋은 산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저와 함께 이 산을 오르셔서 좋은 기운을 두 배로 받으실 거예요.”

가쁜 숨을 몰아 쉬는 일행이 하나둘 모이자 배례를 끝낸 엄 대장이 일일이 그들을 맞았다. 선선한 산바람이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식혀줬다. 망월사는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절이다. 지하철역에서 4km 정도를 걸어야 하고, 보폭을 빨리 해도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가 걸린다. 그래서 망월사는 신도들이 찾기 쉽게 코앞까지 도로를 닦고 주차장을 만드는 다른 절들과 사뭇 다른 풍경을 자랑한다. 망월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영산전 뒤로는 기세 좋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엄 대장이 으뜸으로 꼽는 풍경이다.

“영산전 뒤에 보이는 우측 봉우리가 도봉산에서 제일 높은 자운봉입니다. 739.5m입니다. 가운데가 만장봉, 좌측이 선인봉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 계신 위치가 가을에 오시면 입이 딱 벌어집니다.”

▲ 중앙에 보이는 건물이 망월사의 영산전이다. 그 뒤로 선인봉(왼쪽)과 만장봉(가운데), 그리고 만장봉과 거의 붙어있는 자운봉(오른쪽)이 보인다. ⓒ 강민혜

고행 끝에 얻은 행복이란 이런 걸까? 울긋불긋한 가을 단풍은 없었지만, 갓 돋아난 새싹의 청량함과 곳곳에 피어난 발그레한 꽃들이 홍엽의 빈자리를 대신했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엄 대장은 일행에게 과거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세계적인 산악인 3명과 이곳에 왔던 일화를 들려줬다.

“그 사람들이 이 풍경을 보고 감탄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더군요. 세계의 명산을 다 다녀본 사람들이 말이에요. 제가 벌어진 턱을 맞춰주느라 혼났습니다.”

엄 대장의 농담에 일행이 큰 소리로 웃었다. 동행한 모든 이들의 얼굴에서 힘든 기색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망월사의 경치를 소개하는 엄 대장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맺혀있다. ⓒ 강민혜

문인들이 사랑한 도봉의 정취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박두진의 시 ‘도봉(道峰)’의 몇 구절이다.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꼽히는 박두진은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적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줄곧 원도봉산에 올랐다고 한다. 그때 지은 ‘도봉’은 많은 이들에게 애송되는 박두진의 대표작이다.

원도봉산을 사랑한 문인은 박두진만이 아니다.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사대부들이라면 어김없이 도봉산의 정취를 시나 기록의 형식으로 남겼다. 사가정 서거정, 매월당 김시습, 백사 이항복, 우암 송시열, 율곡 이이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이들이 많다. 당시 원도봉산은 서울의 산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문인들은 원도봉산을 찾아 글을 썼을까?

▲ 포대능선에 오르면 원도봉산의 주봉들이 더 가깝게 보인다. 중앙의 뾰족한 봉우리가 가장 높은 자운봉이다. ⓒ 의정부시 문화관광 포털

울퉁불퉁한 암석들이 즐비한 길을 거친 숨을 쉬며 오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수십 년 전 포병부대가 있었던 곳이라 포대능선이라 부른다는 이날 산행의 정상에서는 원도봉산의 주봉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망월사에서 보았던 만장봉과 자운봉, 선인봉은 한층 가깝게 눈앞으로 다가와 위용을 뽐냈다. 1장이면 10척, 만장이면 10만 척의 어마어마한 높이다. 만장봉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자운은 불교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일컫는 말이다. 당나라 시인 유우성은 ‘山不在高 有仙則名(산부재고 유선즉명)’이라고 했다. 아무리 높고 웅장한 산이라도 신선이 없으면 여느 산과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신선이 도를 닦는 바위라는 선인봉마저 갖췄으니 원도봉산은 그야말로 명산이다. 엄 대장은 “아침에만 해도 어제 내린 비로 날씨가 우중충했는데, 시간일 지날수록 햇살이 비친다”며 “저의 모산인 원도봉산의 산신령이 저와 함께하는 여러분을 보살펴주고 있는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날 산행에 참여한 이유를 묻자 엄 대장은 이렇게 답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제가 이제까지 산에 오르면서 느꼈던 감정, 경험담을 공유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양한 사람과 자신이 보고 느낀 산을 나누고 싶다는 엄 대장 말에서 그 옛날 문인들 모습이 떠올랐다. 글로써 원도봉산의 정취를 후대에 전달했던 문인들 마음도 엄 대장과 같지 않았을까?

‘도전하는 산행’에서 ‘즐기는 산행’으로

포대능선 산불감시초소를 지나면서는 하산을 시작했다. 한가로이 주변 풍경을 둘러볼 여유를 가질 만큼 녹록한 길은 아니었다. 산에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위험하다는 말이 새삼 머리를 스쳤다. 바위 사이로 난 길을 쇠줄에 의지해 내려오며, 일행 중 몇몇은 아슬아슬하게 미끄럼을 탔다. 엄 대장은 하산 속도를 천천히 조절하며 일행에게 “조심하세요”란 당부를 수시로 했다.

▲ 원도봉산의 수려한 경치를 뒤로하고 하산하는 시민들. ⓒ 강민혜

계곡 물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힐 즈음 흙길이 끝났다. 왼편으로는 해골물 일화로 유명한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절, 원효사가 보였다. 절 내 위치한 나한전이 바로 원효대사가 참선 수행했던 토굴이다.

▲ 나한전 입구와 내부. ⓒ 의정부시 문화관광 포털

원효사는 여승들의 수도처다. 산속에 있는 절이라 건물들이 지형에 맞게 계단식으로 배치되어있다. 스님들이 참선수행을 하는 송라선원 앞마당에는 커다란 암반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을 정도로 산과 어우러진 건축미가 엿보였다. 일주문 앞에서 합장을 하는 엄 대장을 알아본 사람 몇몇이 “엄 대장님을 만날 줄 몰랐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며 반가움을 표했다.

▲ 송라선원 앞마당에 툭 튀어나온 흰색 암반이 보인다. 원효대사가 수행한 절임을 나타내는 원효대사 동상도 눈에 띈다. ⓒ 의정부시 문화관광 포털

“옛날에는 특정인, 전문 산악인들만 등산을 했었어요. 그야말로 도전하기 위해서 산을 올랐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즐기기 위해 산을 오릅니다. 등산이 그만큼 대중화한 거죠.”

엄 대장은 예전과 많이 달라진 등산문화를 좋게 평가했다. 특히 등산의 대중화로 사람들이 건강해질 것이라는 점을 으뜸으로 꼽았다. 그래서 일까, 하산 후 이어진 식사 자리에서 엄 대장은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이 술잔에 오늘 산행한 원도봉산의 기와 제가 히말라야에서 받은 8000m 16좌의 성스러운 기운이 채워져 있습니다.”

▲ 건배 제의를 하는 엄 대장의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하다. ⓒ 강민혜

그는 큰 소리로 “기! 기! 기!”라는 건배사를 외쳤다. 산에서 받은 건강한 기운을 나누겠다는 의미다. 먹음직스러운 두부전골보다도 엄 대장의 기운이 이날 함께한 사람들을 더욱 더 행복하게 했다.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대산농촌재단과 함께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이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편집 : 민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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