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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은 왜 두 성씨의 집성촌이 됐을까
[지역·농업이슈] 양동마을 답사기
2017년 05월 25일 (목) 09:30:36 박기완 송승현 기자 wanitrue@gmail.com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을 계기로 청와대와 관련한 풍수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청와대 터가 안 좋아 대통령의 말년이 불행해진다는 건데 물론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그런 얘기가 도는 것은 우리 민족이 오랜 기간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과 집터(양택)는 물론 무덤(음택)까지 정해왔기 때문이다. 자연이 인간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생각에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곳에 터를 정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실제로 유서 깊은 마을은 대개 풍수지리적으로 빼어난 길지에 자리 잡았다. ‘배산임수’만 하더라도 찬 북풍을 막아주는 남쪽 산기슭에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과학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도 그중 하나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지역농업문제세미나’ 수강생들은 인걸을 많이 배출한 길지로 유명한 양동마을을 찾았다.

‘택리지’에서도 언급한 조선 제일의 터

“무릇 수구(水口)가 엉성하고 넓기만 한 곳에는 비록 좋은 밭이랑과 넓은 집 천 칸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水口)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구해야 한다... 이런 곳이라야 완전하게 오래 세대를 이어나갈 터가 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사람 사는 곳을 정하는 기준으로 수구(水口)를 꼽는다. ‘수구’란 한 지역의 아래쪽에 있는 강이나 개천의 물이 흘러가는 지점을 말한다. 양동마을은 '물(勿)'자 형국이다.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과 지맥 사이 골짜기에 두동골, 문봉골, 안골, 장태골이 마치 '勿'자처럼 자리 잡았다. 수구가 적당히 닫힌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인 덕분일까? 양동마을은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민속마을로 500년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 양동마을의 물(勿)자 형국.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www.culturecontent.com

양동마을은 집성촌이다. 집성촌이란 하나의 지배적인 동성동족(同姓同族) 집단이 특정 마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마을을 뜻한다. 양동의 독특한 점은 한 성씨가 아닌 두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성씨는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다. 초기에는 손씨가 이씨보다 7:3으로 많았으나, 현재는 이씨가 손씨보다 많다.

   
▲ 두 성씨 집성촌 양동마을의 역사는 500년간 이어져 지금도 50가구가 살고 있다. Ⓒ 임형준

시집가는 게 아니라 장가오는 동네 

양동은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게 아니라, 남자가 장가를 온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는 풍습이다.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했고, 그의 손녀와 혼인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다.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뒤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해 처가 재산을 상속받았다.

또 이광호의 증손자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양동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인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탄생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의 터줏대감은 사실 남자가 아닌 여자인 셈이다.

남귀여가혼의 풍습으로 이뤄진 양동에서 여자는 재산을 균등하게 배분받고, 남자와 똑같이 제사를 지내는 의무를 가졌다. 조선시대는 유교사회였다. 유교 하면 남성중심사상을 떠올리는 이가 많다. 그러나 양동의 풍습에 비춰보면 여성의 지위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문명의 이기들을 잘 감춘 마을

세월이 흘러 한양까지 4시간이면 당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양동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초가집과 기와집에 거주하는 주민이 50 가구에 이른다. 마을 전체가 국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만큼,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문화재 느낌을 자아낸다. 관광객인 스님 한 분이 기와집 한편에 ‘정’(井)자로 쌓아놓은 통나무를 가리키며 “해설가님, 이건 마을 우물을 보존한 건가요”라고 묻자, 이낙원 문화유산해설사는 웃으며 “그건 변압기입니다.” 예상 밖 대답에 순간 좌중은 웃음바다가 된다.

   
▲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양동은 변압기마저도 문화재 느낌을 준다. Ⓒ 임형준

양동마을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색다른 잔치를 벌인다. 줄 당기기가 바로 그것이다. 양동마을의 줄 당기기는 특히 마을에 우환이 많을 때는 반드시 하는 놀이다. 줄을 한번 당기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줄 당기는 날짜를 택하는 것은 해마다 다르고, 마을의 중간지점을 기준으로 아랫말과 웃말로 편을 가른다. 줄 당기기 결과 ‘웃말’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아랫말’이 이기면 마을이 ‘편안’해진다고 여겨왔다. 웃말의 승리가 부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아랫말의 승리는 정신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믿는다. 마을 단합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던 옛 모습 그대로다.

양동에 하버드대학 깃발이 걸린 이유 

양동마을은 양반 마을답게 과거 급제자도 많다. 손씨, 이씨를 합쳐 문과 26명, 무과 14명, 사마 76명으로 과거 급제자가 총116명이나 되고, 음직은 부지기수였을 정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특히 이언적 선생은 성리학의 이기철학을 이황에 앞서 최초로 정립했고,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다짐으로써 영남학파의 창시자가 되어 이황에게 영향을 주었다.

집성촌인 양동에 이언적 선생의 피가 흐르는 건 당연한 걸까? 무첨당으로 가는 길목 작은 초가집 앞에서 발길을 멈춘 이 해설사는 “여긴 문화재는 아니지만 양동마을에서 아주 중요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겉보기에는 여느 초가집과 다를 바 없지만, 자세히 보니 빨강색과 회색 깃발이 함께 걸려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양동마을은 학문이 높으신 분들이 많았지요. 그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이 집에 사는 분 자식 둘이 하버드대와 예일대를 나왔습니다. 저기 보이는 깃발이 하버드대와 예일대 깃발입니다. 아직까지도 양동에는 학문의 피가 흐르는 거죠.”

   
▲ 무첨당 가는 길목에 있는 초가집에 하버드와 예일대 깃발이 걸려있다. Ⓒ 임형준

양동마을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 해설사의 말에 자부심이 가득 묻어 나온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스님이 초가집에 붙어있던 'SKY Life' 위성 안테나를 가리키며 “어쩐지 그래서 안테나도 ‘SKY’를 쓰는군요.” 스님의 번뜩이는 재치에 또 한번 웃음이 터졌다.

밭으로 남은 옛 집터

양동마을 전체를 한 눈에 담아내기란 어렵다. 마을 전체가 구릉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답사단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때도 전경을 보기 위해 건너편 성주봉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농사로 먹고 살았던 마을인데도 양동 주민들이 거의 소유했던 안강평야는 마을밖에 떨어져 있다. 구릉에 위치한 마을은 ‘마을계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정된 평지에 집터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평지가 부족한데도 군데군데 작은 밭이 눈에 띈다.

   
▲ 양동마을에 나고 자랐다는 이낙원 해설사가 마을에 있는 밭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 임형준

“6·25 때 양동마을을 사이에 끼고 국군과 북한군이 대치했다고 합니다. 당시 소련군 하고 미군이 기술력 차이가 컸는데, 북한군을 소탕하기 위해 미군이 비행기로 폭격을 했어요. 원래 양동마을은 350가구였는데, 그때 200여 가구가 소실됐죠. 양동마을에 있는 밭은 전부 그때 건물이 소실된 집터라고 보면 됩니다.”

양동마을은 6·25전쟁 당시 북한의 남하를 막기 위한 최후저지선에 위치해 설창산에는 북한군이, 성주봉에는 국군이 주둔했다. 이 해설사는 자기 할머니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양동에 있었다고 한다. 그의 할머니는 한 민족이 서로 대치하던 밤을 “사방에서 반딧불 같은 것이 날아다녔다”로 표현했다고 한다. 양동이 84년 국가에서 ‘문화재 보존구역’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사용하지 않은 실탄이 마을 곳곳에 널려있었다.

집 앞에 심은 선비의 기개

“양동마을에는 다른 나무를 심지 않아요. 선비의 정신을 담은 나무만 있습니다.”

양동의 집 안팎에는 적어도 몇 백년은 살았음직한 나무들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과거 학식 있는 선비 집에는 선비의 품위를 상징하는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해설사는 “양반 집 앞에는 회화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전했다. 회화나무는 느티나무만큼이나 크게 자라고 천 년을 거뜬히 산다고 여겨진다. 또한 나뭇가지의 뻗음이 구불구불 제멋대로여서 선비의 기개를 상징한다.

일행 중 한 명이 구석에 있는 민들레 꽃을 가리킨다. “양동마을에는 서양민들레가 하나도 없어요!” 꽃을 받치는 총포가 위로 뻗어있는 걸 토종 민들레라 한다. 반면 서양 민들레는 총포가 아래로 뻗어있다. 마을을 구경하며 본 민들레의 총포는 전부 위로 뻗어있다. 들판에 피는 작은 민들레까지도 옛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을 주민들의 정신이 꽃 하나에도 담겨있는 듯했다.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연계된 이 강좌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역할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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