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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은 왜 불국토(佛國土)가 됐을까
[지역⋅농업이슈] ‘지붕 없는 박물관’ 경주 남산 탐방
2017년 06월 29일 (목) 20:02:24 박상연 유선희 기자 choms335@naver.com

‘두 신이 있었다. 서라벌에 찾아온 신들은 경치를 둘러보았다. 그중 남신이 외쳤다. “우리가 살 곳은 이곳이구나!” 빨래하던 처녀가 남신의 목소리에 놀라 바라보니 산처럼 거대한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오고 있었다. 처녀가 깜짝 놀라 “산 봐라, 사람 살려”라고 외치며 정신을 잃었다. 처녀의 비명에 두 신은 그 자리에서 산이 되어버렸다.’
 
경주 ‘망산’과 ‘남산’의 유래다. ‘산이 된 신이 있는 곳’이니 산 자체가 신성할 수밖에. 신라인들의 천 년 보금자리 남산에는 다양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대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신비로운 이야기다.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그래서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는 염원을 신라인들은 이야기로 빚었다. 부처나 산신 같은 초인적 존재가 백성의 마음을 대변한다.

신라인들의 염원으로 빚은 세계문화유산

신라인들은 신이 남산 바위 속에 머물며 이 땅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산신과 바위신의 역할은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자연스레 부처와 보살로 옮겨갔다. <삼국유사> ‘감통’ 편에는 신라 32대 효소왕과 진신 석가의 설화가 있다. 왕이 남루한 행색만 보고 석가를 업신여기자 그가 왕을 꾸짖고 남산으로 홀연히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제아무리 임금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면 남산에 있던 부처가 호되게 꾸짖어 주리라는 바람. 신앙이 예술을 낳듯, 신라인들은 억센 바위에 부처를 새기고 돌로 탑을 만들었다. 신라인들에게 남산은 힘들 때마다 부처와 보살이 굽어살펴주는 염원의 안식처였다.

경주 남산은 동서 4km, 남북 8km의 길쭉한 타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남과 북, 두 봉우리는 500m를 넘지 않는다. 소담한 높이지만 돌산이어서 기세가 제법 험하다. 능선과 산자락은 여인의 한복 자락을 닮아 유연하게 퍼져나간다. 곳곳에 움푹 파인 골짜기는 부처가 깊은 숨이라도 불어넣은 듯 보인다.

연간 120만 방문객이 찾는 남산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린다. 왕릉 13기, 산성터 4곳, 절터 147곳, 불상 118체,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총 672점의 문화유적이 숲과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1968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신성한 것’은 ‘신성한 곳’에 찾아온다

남산은 골짜기가 많아 오르내리는 길도 갖가지인데, 남산 석불을 느낄 수 있는 등산로는 삼릉~용장계곡 코스다. 남산 초입의 삼불사에서 ‘냉골’로 불리는 계곡을 따라 금오산 정상을 거쳐 용장계곡으로 하산하는 산행이라고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이 설명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지역농업문제세미나] 답사반은 먼저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과 삼릉을 만났다. 서늘하고 습한 바람이 부는 것이 심상치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비 오는 날의 산행이 괜찮을까?’ 일행들이 우산을 펼쳐 들었지만 김 소장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 삼존불을 설명하는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 ⓒ 유선희

“한 자리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삼존불이라 합니다. 가운데 부처가 있고 양옆에 보살이 있어 삼존불이라 부릅니다만 본래 삼존불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약간씩 다릅니다.”

김 소장의 설명은 사족 없이 매끄러웠다. 출토 당시 사진을 감싼 비닐에 구깃구깃한 자국이 선명했다. 김 소장이 신라 문화예술의 정수를 알리기 위해 파일을 얼마나 꺼내 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신라인들에게 남산이란 어떤 존재였을까? 고대부터 구전된 남산 유래 설화부터 신라 시조 혁거세가 태어났다는 ‘나정’, 아무 곳에나 묻을 수 없는 왕의 능(陵)이 남산 품에 있다는 걸 연관 짓자 가닥이 잡혔다. 고대의 영기(靈氣)가 신라까지 이어져 성스러운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 소장은 나정을 설명하며 “신성한 ‘것’은, 신성한 ‘곳’을 찾아온다”고 했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머무는 남산에 신라의 시조가 난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 신성성을 보여주는 남산의 왕릉 13기 중, 가장 독특한 특징을 지닌 것은 삼릉이다. 울창한 솔숲 가운데 능이 나란히 줄지어있는 모습이다.

   
▲ 삼릉. 왼쪽부터 54대 경명왕, 53대 신덕왕, 8대 아달라왕을 능의 주인으로 여긴다. ⓒ 박기완

이름만 들어도 불상이 그려진다.

삼릉을 왼쪽에 끼고 천천히 15분여를 올라가면 목 없는 냉골석조여래좌상과 마주친다. 불상은 이름만 들어도 어렴풋이 실체를 그려볼 수 있다. 불상 명칭은 출토 위치, 재료, 부처 종류, 불상의 자세 순으로 붙이기 때문이다. 냉골에서 발견되고 돌로 만들었다 해서 ‘냉골 석조’. 그런데 이 불상은 부처의 종류를 가늠할 수 있는 머리와 손 모양, 무릎 등이 훼손되었다. 그래서 부처의 종류를 정확하게 표시하지 못하고 ‘깨달은 자’ ‘부처’라는 뜻의 ‘여래’를 사용한다. 부처가 앉아 있기에 마지막으로 ‘좌상’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 훼손이 심하지만, 힘이 넘치고 위풍당당함이 엿보이는 냉골석조여래좌상. ⓒ 박기완

냉골석조여래좌상은 계곡에 묻혀 있다가 1964년에 발견해 지금 자리로 옮겼다. 발견될 때부터 머리와 손, 대좌가 다 깨진 채로 나왔다. 훼손 정도는 크지만 가슴에 매듭이 아주 사실적으로 장식되어 있다. 앉아 있는 자세가 위풍당당하고, 목에 있는 세 주름(삼도, 三道)과 가슴에 드러난 살도 탄력이 넘친다. 김 소장은 신라 시대 불상의 기준을 석굴암 대좌불로 잡았을 때, 석굴암 불상보다 시기가 조금 이른 불상들은 힘이 넘치고 박력 있는 모양이라고 설명했다.

남산의 마애불은 “새긴 것이 아니라 찾아낸 것”

석조여래좌상 뒤쪽으로 좁고 비탈진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 바위 중턱에 154cm 높이의 아담한 관음보살이 있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암벽에 새긴 불상을 뜻하는 ‘마애’와 ‘관음보살’을 더한 명칭이다. 도톰하게 살이 붙은 얼굴과 보조개, 연지 바른 입술이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보살 아래쪽에 연꽃을 새기고 발까지 새겼다.

그러나 보살상에 광배(光背)가 없다. 불상이나 보살상은 머리나 몸 뒤쪽에 둥그런 원인 광배를 그려 몸에서 나는 빛을 표현한다. 보살을 올려다보니 뒤쪽 3m가량 떨어져 있는 뾰족한 바위가 겹쳐 광배처럼 보인다. 또 바위가 사선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어 마치 보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순간을 포착한 듯하다.

   
▲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통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관음보살'이다. 세련되고 섬세한 조각기법으로 미루어 9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 박기완

자연 숭배 신앙과 불교가 융합한 경주 남산의 마애불은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산이나 바위에 깃든 부처는 단순히 새긴 것이 아니라 “찾아낸 것”이다. 김 소장은 “신라인들은 남산이나 바위 속에 부처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처를 찾아 들어가며 마애불을 조각했다”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유명한 ‘다비드상’을 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리석 속에서 천사를 발견하고, 천사를 자유롭게 하려고 조각한다”고 말했다.

“부디 저를 데리고 극락으로 가소서”

마애관음보살을 뒤로 한 채 샛길을 빠져나와 다시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울퉁불퉁한 돌길에 숨이 가빠질 때쯤 높이 4m의 바위 벽화 두 폭이 눈 앞에 펼쳐진다. 오른쪽 바위에는 현세의 부처인 석가불과 양옆 문수⋅보현보살이, 왼쪽 바위에는 극락세계 부처인 아미타불과 양옆 협시보살이 있다. 이들은 바위 위에 선으로 새겼다 하여 ‘선각육존불’이라 부른다. 김 소장은 바위 근처 깨진 기왓조각들을 가리키며 바위 위에 건물이 있었다고 짚었다. 실제로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빗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파 놓은 물길과 지붕 거치대용으로 쓰였을 홈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 내영(來迎) 아미타불과 비슷한 모습의 경주 아미타 삼존불. ⓒ 박기완

선각육존불에서 독특한 것은 왼쪽 바위 아미타 삼존불이다. 두 협시보살이 꿇어앉아 연꽃을 손에 받치고 있고, 아미타불은 오른손 바닥을 아래로 향하고 가슴 쪽 왼손은 바닥을 위쪽으로 들고 있다. 김 소장은 “이런 손 모양은 우리나라 경전과 중국⋅인도 경전 어디에도 없지만, 고려 시대 작품 중 내영(來迎) 아미타불에서 비슷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려 시대에는 사람이 죽을 때 직접 아미타불이 찾아와 극락으로 데려간다는 내영 아미타불 신앙이 성행했다. 살아서 부처에게 공 드리고 착한 일을 하면 죽을 때 아미타불이 와서 연꽃 속에 나를 태우고 극락으로 함께 가리라는 믿음이다. 어려운 경전을 읽고 참선에 이르는 불교는 먹고 살기 바쁜 백성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신라의 통일 전후부터 원효대사 등을 중심으로 어려운 지식 없이도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쉬운’ 불교 ‘정토 신앙’이 대두했다.

천 년이 지나도록 미완성인 작품들

선각육존불 바위 위로 올라가 나무 우거진 산길을 올라가다 보면 새삼 등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바쁘게 숨을 내쉬며 오르다 보니 자비로운 부처를 보며 평온해진 마음이 다시 들뜬다. 15분여를 올라갔을까? 잠시 숨을 고르려고 뒤를 돌아보면 경주 시내의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들판 너머에는 ‘남산과 망산’ 설화 속 망산이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 뒤쪽으로는 구름에 가려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 해발 850m, 경주에서 가장 높은 단석산을 중심으로 첩첩이 산의 물결이 굽이친다.

   
▲ 마애석가여래좌상을 에워싼 이끼도 천년의 세월을 함께 견뎠을까? ⓒ 박기완

김 소장은 지금까지 봤던 것 중 가장 거대한 바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높이, 너비 모두 10m 정도 되는 바위에 높이 2m 정도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이다. 무뚝뚝한 표정에 굵직한 선이 뭉툭하게 조각돼 있다. 부처님이 앉아 있는 연화대좌가 세련된 기교 없이 거칠게 표현되어 있다. 부처님의 두 눈도 오른쪽 눈보다 왼쪽 눈을 더 많이 조각했다.

김 소장은 이 여래좌상을 “미완성”이라고 보았다. 그는 935년 전후 당시 불상을 조성하다가 신라 멸망을 기점으로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에 시주가 끊기고 공사도 중단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게 본다면, 남산 불교 유적들의 조성 시기로 보아 7세기 초부터 10세기 중엽까지 내내 남산에는 수많은 불상과 탑들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연에 스며든 남산의 불상과 탑

다시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에는 석굴암 대좌불을 빼닮은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여래의 광배는 불꽃무늬가 화려함을 자랑한다. 부처의 가슴은 탄력이 넘치고 잘록한 허리는 육감적이다. 8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불상이다. 김 소장은 불상의 하대석을 가리키며 연꽃무늬 같은 장식이 없고 거친 자연석 상태라고 지적했다. 그는 “신라인들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조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불상을 조성한 이가 하대석은 땅속에 묻혀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는 해석이다. 막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부처를 형상화했다는 뜻이다.

   
▲ 1923년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복원됐으나, 1963년에 누군가 광배를 넘어뜨려 산산조각낸 것을 다시 복원했다. ⓒ 박기완

석조여래좌상 앞쪽은 단단한 바위 절벽인데, 이곳에도 본래 탑이 있었다. 1923년 남산 골짜기에서 기단이 없는 탑을 발견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는데, 탑에서 쪼개져 나온 두 조각이 이 바위에서 발견되었다. 남산 어디에도 탑의 기단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김 소장은 바위 전체가 탑의 기단 구실을 한다고 일러줬다. 남산의 불교 유적은 홀로 아름다움을 뽐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자연 속에서 찾고 함께 보아야만 마침표가 찍힌다. 김 소장의 설명을 듣고 다시 바라보자 석조여래좌상이 바위를 기단 삼아 솟아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살아야 아름답다

   
▲ 남산의 불상과 탑은 산천초목에 둘러싸여있다. 신라 불교예술은 자연과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완성된다. ⓒ 박기완

금오봉 정상에는 빨간색 우체통이 있다. 엽서를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김 소장이 직접 수거해 발송한다. 2013년부터 4년간 엽서는 전세계 53개국으로 향했다. 남산은 국내는 물론 세계인들까지 신라 불교예술의 가치를 느끼는 공간으로 열려 있다. 신라인의 염원을 오롯이 품던 천 년 보금자리 남산에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까지 포개진다.

남산은 자연이든 인간이든 함께해야 그 삶의 가치가 고양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자연과 어우러진 예술. 백성부터 왕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신앙적 쉼터. 사람 사는 곳이 곧 부처님이 계신 곳이었던 불국토(佛國土). 김 소장은 “남산에 있는 절 중에 담이나 문이 있는 곳은 없다”고 강조했다. 자연과 예술을 품은 남산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는 게 아닐까? ‘더불어 살아야 아름답다’는 가르침을 던지며 남산은 억겁의 시간을 우리와 함께한다.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대산농촌재단과 함께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이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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