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민심’

▲ 민수아 기자

‘심상정한테 투표했는데 문재인이 당선 안 되면 어떡하지?’ 대선 결과를 기다리다가 트위터의 글을 봤다. 이 내용을 본 누리꾼들은 ‘소신투표든 전략투표든 하나만 하라’거나 ‘이중인격 아니냐’고 비난했다. 소신투표와 전략투표 사이에서 갈등하는 유권자는 얼마든지 있다. 소신대로 투표한 사람을 남들과 다르게 보이려고 비주류 감성에 취한 ‘정치 홍대병’ 환자로 깎아내리는 것은 폭력이다. 하지만 선거제도가 바뀌지 않은 환경에서 투표로 정치적 의사를 드러냈다면,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여론조사 숫자에 민심이 정확하게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 허수로 존재하는 민심이 있기 때문이다. 전략투표로 소신을 숨긴 사람, 어느 후보도 마음에 들지 않아 차악(次惡)의 후보를 선택한 사람, 그리고 정치를 문화소비의 한 영역으로 여기는 정치 ‘힙스터’까지. 특히 태도는 밝히지 않고 취향만 누리는 힙스터는 여론을 왜곡한다.

▲ '홍대병'을 연기한 개그우먼 장도연. ⓒ tvN <콩트앤더시티> 화면 갈무리

힙스터는 1940년대 미국의 백인 재즈마니아를 일컫는 속어다. 재즈 특유의 열정과 슬픔에 매혹된 이들은 흑인 음악인들의 옷차림과 말투를 자신의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백인이면서 흑인이 되고자 한 것이다. 힙스터가 하위문화로 자리 잡은 것은 2000년 무렵이다. 뉴욕의 예술가 지망생들이 가담하면서 힙스터란 말에 ‘인디’, ‘대안문화’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힙스터는 비주류 음악과 패션, 영화를 즐기는 백인 중산층 젊은이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되었다.

힙스터는 유행을 싫어한다. 그들에게 ‘새로운 것’은 신앙이다. 힙스터에게 획일화한 대중문화와 신자유주의의 저항자라는 평가와 함께 자본주의의 말초신경을 탐닉하는 소비자라는 비난이 양립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위문화의 ‘쿨’한 태도는 유지하면서 반문화의 저항은 포기한다. 주류와 보수에 냉소적이지만, 의지를 적극 표명하지 않는 이들은 어중간한 유권자가 되기 쉽다. 힙스터의 정치 ‘신상’ 추종은 폼 나는 소비에 그칠 수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계급을 구별하는 취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자본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그의 문화자본론은 계급문화가 남아 있던 1960년대 프랑스 사회를 벗어나서는 유효하지 않다는 비판도 받았다.

미국 연구자들은 ‘옴니보어(omnivore)론’을 제시한다. 미국의 상류층은 고급, 저급 문화를 가리지 않고 잡식동물처럼 고루 즐긴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와 절대적인 미의 기준을 거부하는 예술계의 변화를 반영한 이론이다. 중산층이라는 말을 들으려면 클래식과 힙합도 즐겨 듣고, 갭(GAP)이나 에이치앤엠(H&M) 같은 패스트 패션의 실용성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힙스터는 옴니보어 시장에서 선구자의 자리를 노리는 얼리 어댑터다. 문화자본의 계급적 차이에 상관하지 않고 비주류로 인식되는 영역에 가장 먼저 깃발을 꽂고 사람이 몰리면 그 자리를 떠난다. 힙스터는 수가 많지 않지만 오피니언 리더 구실을 하고 여론에 영향을 준다.

촛불 집회에 참여한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3월 말 페이스북에 개설되어 10만 명에 이르는 지지를 받았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살 만한 세상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설립 취지를 밝힌 이 커뮤니티는 오이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핀잔을 듣거나 오이를 빼고 음식을 주문할 수 없었던 경험을 공유한다. 몇몇 설립자가 시작했을 오이 혐오 발언은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취향이 되었다.

또 어디서 어떤 바람이 불면 취향의 위계에 변화가 생길 것인가? 다원화가 민주주의 발전의 조건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끈질긴 정치적 정체성 없이 ‘힙’한 것만 찾아다니는 ‘정치 소비자’를 민주주의 투사로 여기는 것도 정확한 여론 해석은 아니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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