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재난

▲ 박고은 기자

17세기 말 네덜란드 탐험대가 호주에서 흑색 백조와 마주쳤다. ‘백조의 깃털은 하얗다’는 수천 년간 이어진 고정관념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여기서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실제로 발생함을 뜻하는 ‘블랙스완’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과거의 경험이나 데이터를 토대로 아무리 정밀한 분석을 시도해도 모든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예측하지 못한 사건은 큰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최근 한국 사회를 불안에 떨게 한 재난도 마찬가지다. 경주에서 일어난 규모 5.8의 지진은 시민들에게 물질적 피해뿐 아니라 지진 트라우마라는 정신적 피해까지 남겼다.

한국의 재난관리 체계에는 ‘예방’ 단계가 없다. 재난이 지나간 다음에야 피해 복구 지원 등 사후관리에 나선다. 이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비용보다 위험을 감수하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강진에 견딜 수 있는 건물은 6.8%에 불과하다. 건축 당시 내진설계 의무 대상이 아니었다면 추후 내진 보강의무는 없다. 어떤 재난이 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데도 우리 사회는 선제적인 재난관리의 필요성을 뒷전으로 미뤘다. 안전을 경시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2012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보고서는 “원자력발전소 밀집지역 인근의 활성 단층에서 최대 규모 8.3의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정부는 사회적 파장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고, 활성단층 위에 우후죽순의 원전 신·증축 계획을 쏟아낸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감재(減災)' 개념을 찾기 어렵다.

▲ 자연재해를 막을 수는 없지만 피해를 줄이는 건 인간의 몫이다. ⓒ Pixabay

자연재해를 막을 수는 없지만 피해를 줄이는 건 인간의 몫이다. 감재의 핵심은 ‘사전 관리’다. 사후관리에 중점을 둔 기존의 재난관리에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재난에 선제적 대응을 하는 방식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일본 정부는 1995년 한신 대지진 이후 민간의 '내진 진단 비용'을 대준다. 한신 대지진 당시 60%대를 맴돌던 일본 주택 내진율을 2013년 82%까지 끌어올렸다. 가장 큰 피해를 겪은 고베시는 지진 이듬해 '지역 방재 계획'을 새로 만들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첫 한 시간, 첫 하루, 첫 사흘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해 시민과 공무원의 동선을 짰다. 그 매뉴얼대로 반복 훈련 중이다.

‘선제적 재난관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역할과 임무를 명확히 규정한 재난 시스템 구축이 선결과제다. 국민안전처는 안전행정부의 안전 조직과 소방방재청, 해양경찰청까지 합쳐 ‘매머드급’ 조직으로 보란 듯이 첫발을 뗐다. 결과는 조직의 비대화에서 오는 역효과였다. 안전과 재난의 컨트롤타워라는 역할을 부여했지만, 업무 범위가 넓어 효율성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미국의 경우 재난 대응을 전담하는 연방재난관리청이 있고, 실생활의 안전은 각 부처가 따로 맡는다.

1994년 국제사회가 채택한 ‘요코하마 행동계획’이 새삼 떠오른다. 요코하마 행동계획은 재난이 일어난 다음 피해복구를 지원하기보다 재난 피해를 줄일 예방법을 강구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하인리히 법칙에 따르면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 그와 관련된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반드시 나타난다. 이번 태풍과 지진 사태가 한국 사회에 준 충격은 ‘미리 대비하라’는 작은 경고음이자 예방주사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재난. 사후약방문은 의미 없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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