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S 제천나들이 기획] ③ 배론성지 편

여름이 한창일 즈음, 빽빽한 글자와 컴퓨터 모니터에 또 한 번 피곤함을 느꼈다. 인생에 지름길은 없을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책들과 신문, 컴퓨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심신이 지친만큼 즐겁게 여행하며 돌아다니는 곳보다는 조용히 걷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배론성지가 눈에 들어온 이유다. 배론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신념으로 가득했던 공간이다. 문득 자문했다. 매일을 열심히 살려고 하지만 목숨까지 걸 만큼 무언가를 위해 간절하게 살고 있는가. 역사적으로 그 어느 곳보다도 치열했던 삶의 현장이었을 배론성지로 떠났다.

배론성지는 치악산 동남기슭에 우뚝 솟은 구학산(983m)과 백운산(1,087m)의 연봉이 둘러싼 험준한 산악지대다. 외부와 차단된 산골이면서도 산길로 약 4km만 가면 박달재 마루턱에 오르고, 이어 충주, 청주를 거쳐 전라도와 통한다. 배론성지는 베일에 싸인 요새 같으면서도 그 주변 어느 곳과도 연결되어 있는 중심지다. 탁사정도 배론성지 입구에서 차로 5분도 안 걸리는 곳에 위치해있다.
 

▲ 성지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누각 성당인 배론본당과 그 뒤로 보이는 대성당 건물. ⓒ 윤연정

배론(徘論)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위치한 첩첩산중 깊은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과 흡사하다 해서 지어졌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표현하고자 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성지 중앙을 가로지르는 내(川)를 건너면 보이는 대성당과 소성당도 ‘배론’과 어울린다. 이 건물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년) 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7년 동안 몇 차례 승선했던 배를 상기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은 시원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대성당에 들어가 최양업 신부와 다른 순교자들의 희생을 가슴에 담으며 기도를 올리고 천장을 바라보니 배 안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당을 나와 뒤로 돌아가면 최양업 신부의 조각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이자 ‘땀의 신부'로 불리는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를 조각해놓은 곳이다.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 귀국 후 하루도 쉬지 않고 사목하다 과로사 한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가 담겨 있는 조각 공원. ⓒ 박기완

지형이 완만해 점심을 먹고 소화 시킬 겸 1시간에서 길게는 2시간 정도를 배회하다 보면 전체를 다 둘러볼 수 있다. 옛 터가 모두 남아 있진 않지만 오랜 세월 겹겹이 쌓인 세월의 흔적들이 보여 아무 말 없이 더 조용히 걷게 되었다.

성지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와 신자들이 머무는 피정의 집과 정갈하게 정리된 정원들을 지나면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배론 신학교와 황사영 순교자(1775-1801)를 기리는 공간이 펼쳐진다.

황사영은 처삼촌 정약종이 들려준 천주학에 매료되어 1790년 이후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한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은 당시 박해 상황과 신앙의 자유, 한국 교회의 재건을 가톨릭 북경교구 주교에게 청원하는 백서를 8개월간 이곳 토굴 속에 숨어 집필한다. 가톨릭에 대한 탄압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순교를 막고자 한 절실함이 눈에 선하다. 옹기 저장소로 위장한 이 토굴을 지나면 옆에 황사영 순교자를 기리는 현양탑이 있다. 그 앞에 팔을 높이 뻗어 하늘을 향해 외치는 황사영 동상은 종교의 자유를 염원하는 그의 간절한 외침을 그대로 전해준다.

▲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토굴, 그 안에 13,000자가 넘는 백서. ⓒ 윤연정

수도 없이 많은 국내외 신부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 곳에 은둔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고, 그중 많은 이들이 결국 순교했다. 건물 안의 작은 기념관과 성지 곳곳에 숨어있는 조각물을 하나하나 찾을 때마다 그 핍박 속에서 꿋꿋이 신앙을 지켰던 그들의 삶을 곱씹어 보았다.

▲ 1855년(철종6년)에서 1866년(고종3년)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배론 신학교가 소재했던 터. ⓒ 윤연정

조용하고 정적이 감돌았지만 모든 건물들과 조각상들은 처절한 순교로 점철된 천주교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고요하지만 성스러운 표정으로 순교한 그들의 모습이 나를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고요함은 강인함의 다른 말이라고 했던가. 험준한 산세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사람들이 찾아오는 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과 교우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세월을 타고 묵묵히 흐르고 흘러 형성된 산 속 배론성지. 이번 방문은 스스로를 위해서 선택한 공부가 힘들다며 투정을 부렸던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현재의 고통을 사사로이 만들고 다짐을 다잡게 하는 이곳은 제천에 온다면 꼭 한 번쯤 들려야 할 마음의 안식처다.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신념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걸어가라고 배론성지는 말하고 있다.

 

■ 관련 영상
https://youtu.be/L7NhAIdNgmM

■ 여행 정보
배론 성지는 충북 제천시 봉야읍에 위치해 있다. 산 속에 위치해 있는 만큼 자가용이 편리하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갈 수도 있다. 제천 중앙공원 앞에서 탁사정/노목/배론성지 행 버스를 타면 배론성지까지 1시간 10분이 소요된다. 배차시간은 제천 중앙공원 앞 기준 06시, 08시 10분, 13시, 18시 40분에 있으므로 배차를 잘 확인하고 가야 한다. 관련 문의는 제천시 관광 안내 콜센터(043-641-6731~3).

배론 성지를 순례하기 위한 코스는 일반순례, 기차순례, 도보순례가 있다. 일반코스에는 약식코스인 30분짜리부터 박달재 산행코스 4시간짜리까지 총 6가지의 코스가 있다. 열차순례는 예약을 통해서 가능하다. 도보순례는 박달재부터 배론성지까지 걷는 2시간짜리 코스다. 자신의 취향에 맞게 알맞은 코스를 골라 순례해보자. 주의할 점은 성지(聖地)이기 때문에, 복장과 행동거지를 주의해야 한다. 특히 반바지, 민소매 등 노출이 심한 복장은 출입을 금하니 가기 전 참고하자.

배론성지 초입에 있는 ‘또랑길’은 배론성지 올라가기 전 꼭 들러야 할  맛집이다. 또랑길의 정식메뉴인 또랑길정식은 돌솥밥, 된장찌개, 돼지감자조림, 수육을 비롯해 직접 만든 갖가지 반찬이 나온다. 식당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밭에서 직접 가꾼 식재료로 요리한 것이라 믿고 먹을 수 있다. 또랑길 정식은 1인당 12,000원. 위치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49-21로 배론교를 지나 나오는 왼쪽 도로에 위치해 있다. (043-651-2121)

■ 주변 가볼만한 곳
제천 9경에 속하는 탁사정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위치해 있다. ‘맑은 물에 갓끈을 씻고(청사탁영) 흐린 물에 발을 씻는다(탁사탁족)’. 중국 초나라 시인 굴원의 ‘어부사’에서 글귀를 따와 탁사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구학산과 감악산 궁골 마을의 뾰족한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를 탁사정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 주변 맑은 물과 노송이 함께 절경을 뽐내는 계곡 일대를 의미한다. 구한말 의병활동에 선두로 나선 정운호도 이곳을 제천의 절경 중 한 곳이라 했다. 찾아가는 방법은 배론성지와 같다.

▲ 멀리서 바라본 정자. ⓒ 박상연

편집 : 김평화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