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말’

▲ 서혜미

‘잘게 부수다’, ‘직장에서 퇴출시키다’, ‘특수치료’, ‘최종 해결책’. 네 단어의 공통점은 뭘까?

‘잘게 부수다’, ‘직장에서 퇴출시키다’는 1970년대 후반 캄보디아에서 자주 쓰인 말이었다. 크메르어로 ‘콤테크(komtech)’는 농사와 관련된 용어로 ‘아주 잘게 부순다’는 뜻이다. 폴 포트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크메르 루주는 사람을 죽일 때 처형한다는 말 대신 이 표현들을 썼다. ‘특수치료’와 ‘최종 해결책’은 1930~40년대 독일에서 쓰인 말이다. 나치 수뇌부는 유대인 수백만의 죽음을 명령하며 결코 ‘학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네 단어는 모두 처형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끔찍한 범죄집단만 말장난을 하는 게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본능처럼 완곡어법을 사용한다. 이라크 주둔 미군의 자살이 문제가 되자, 미국 정치인들은 자살을 ‘자해 행위’로, 미군 철수를 ‘이동 배치’로 바꿨다. 클린턴 대통령은 르윈스키 스캔들에서 자신의 간통을 ‘부적절한 행위’로 표현했다.

▲ 1970년대 크메르 루주 정권은 자국민 수십만 명을 대량학살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 flickr

완곡어법(euphemism)은 고대 그리스의 ‘유피미아’(euphemia)에서 왔다. 유피미아는 ‘듣기 좋은 말’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직접적이고 생생한 표현보다 완곡한 말이 듣기 편하다. 누군가를 죽였다고 말하기보다 ‘조처를 취했다’는 표현은 덜 끔찍하고 가해자의 죄책감도 덜어준다. 그러나 완곡어법은 현실을 감춘다. 유대인은 나치의 ‘이주정책’이 강제수용소 행을 의미한다고 예상하지 못했다. 관련자가 아니면 ‘이주정책’과 ‘특수치료’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본질을 모호하게 흐트러뜨리는 말 덕분에 나치는 오랜 기간 진실을 은폐할 수 있었다.

독일의 언어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는 언어가 현실을 형성한다고 지적했다. 언어는 인간의 무의식을 만들고,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하기도 하고, 인간이 보는 세상을 만들기도 한다. 언어가 가진 힘을 독점한다면 권력의 우위에 설 수 있다. 그래서 권력은 대중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교묘히 가리고 싶어한다.  

그래서일까? 한국 재계도 끊임없이 말을 바꾸려 한다. 지난 4월 자유경제원은 <용어전쟁>을 출간했다. 책의 부제는 왜곡된 이름을 바르게 한다는 의미인 ‘정명 운동’이다. 저자들은 한국에 만연한 반기업 정서를 극복하기 위해 ‘재벌’은 ‘대기업집단’으로, ‘정글 자본주의’를 ‘상생경제’로, ‘승자독식 자본주의’는 ‘소비자선택 자본주의’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경제원은 전경련과 유착하고 있는 점을 부정하지만, 3년 전 전경련의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원이 내놓은 주장이 고스란히 담겼다. 

의도는 명확하다. 얼핏 보기에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해 재벌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폐해나 양극화라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가리려는 것이다. 언어가 만든 잘못된 인식은 경제정책의 차이를 초래한다. 기업과 개인 간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지만 재분배정책 대신 여전히 대기업에게 감세와 각종 특혜를 제공하는 식이다. 이렇게 현실과 맞지 않는 처방전은 더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권력의 말장난은 사기죄 이상의 범죄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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