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고은 기자

▲ 박고은 기자

샤워실의 바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 교수가 중앙은행의 좌충우돌 경기 대응을 비판하며 쓴 표현이다. 침체된 경제를 살리자고 온수 꼭지(통화량 확대)를 열어젖혔던 중앙은행이 뜨거운 물, 즉 물가상승에 화들짝 놀라 다시 냉수 꼭지(통화 긴축)를 황급히 틀어 경기를 냉각시킨다는 얘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더욱 강력해진 정부와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중앙은행의 부적절하고 과도한 대응이 위기를 증폭시키기도 한다. 그에 따른 고통은 국민들이 겪는다. 그래서 정부와 중앙은행의 결정에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나온 ‘한국형 양적완화’라는 말은 민주적 통제를 피하려는 정부의 심산이 반영된 억지 조어다. 양적완화라는 것은 원래 이자율을 더 낮출 수 없는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채권을 사들이는 등의 방법으로 나라 경제 전반에 직접 돈을 푸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기준금리 인하 여력이 있는 우리 상황에서 새누리당이 들고 나온 이 개념을 들여다보면 그냥 특정 산업의 특정 기업을 살리기 위해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자는 말과 마찬가지다.

사실상의 구제금융에 양적완화라는 포장지를 씌운 이유는 뭘까. 경제를 살리기 위해 뭔가 특단의 조처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구조조정 예산을 조달하는 데 따르는 국회 심의를 피하려는 것이다. 정부 재정에서 구조조정 재원을 마련하려면 국회 동의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책은행의 관리 아래 있었던 대기업이 부실해진 것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고, 여야의 공방을 거치며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다. 이를 생략하기 위해 정부는 손쉽게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겠다는 것이다.

▲ ‘한국형 양적완화’라는 말은 민주적 통제를 피하려는 정부의 심산이 반영된 억지 조어다. ⓒ Pixabay

그러나 부실기업 구조조정으로 산업경쟁력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다면, 정부는 귀찮고 힘들더라도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편법으로 한국은행을 동원하면 국회의 감시와 동의 없이 돈을 찍어낸 뒤 자의적으로 특정 기업을 살리는 일이 반복될 수 있다. 그러면 기업 부실의 원인이 제거되는 대신 정부 특혜로 연명하는 ‘돈 먹는 하마’가 계속 나오고, 전반적인 돈 가치는 떨어져 국민이 피해를 입는다. 지금 정부가 할 일은 조선·해운 등의 구조조정이 왜 필요하며 어떤 방향으로 할 것인지, 주주와 경영진 채권자 노동자 등 이해관계자의 고통분담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정직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구조조정 지원에 필요한 예산편성을 국회에 요청해야 한다. 국회는 부실이 커진 과정에서 기업경영진, 회계법인, 신용평가회사, 은행, 관료 등에게 각각 어떤 잘못이 있는지 따지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세금을 낭비하지 않고 살릴 가치가 있는 기업을 살리며,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정부여당의 압박에 밀린 한국은행은 최근 구조조정을 위한 ‘자본확충펀드’에 10조원을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또 기준금리까지 인하하며 정부의 보폭에 발을 맞추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이 ‘특정 기업 지원을 위해 대출을 해 주는 것은 한국은행법 위반’이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한은 노조도 반발했지만, 총재는 못 들은 체 한다. 과거 통화정책의 독립성 없이 허수아비 노릇하는 한은을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라고 불렀다는데, 한은이 이 별명을 되찾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편집 : 박경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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