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임의 문답쇼, 힘] ⑧ 김황식 전 국무총리

새누리당의 혁신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김황식(68) 전 국무총리는 지난 4.13 총선에 대해 “오만하고 독선적인 새누리당에 대해 국민들이 채찍을 가한 선거”라고 평가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2년 5개월간 총리를 지내고 2014년 서울시장 선거 새누리당 후보경선에 나서기도 했던 그는 10일 방영된 SBSCNBC <제정임의 문답쇼,힘>에서 “새누리당은 야당이 분열됐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원칙과 기준 없는 공천으로 계파 싸움을 벌였다”고 꼬집었다. 김 전 총리는 이어 “친박이다 비박이다 다툼을 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원칙을 선언해 제동을 걸어줬다면 어땠을까 싶다”며 공천 책임에서 박근혜 대통령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관과 감사원장을 거쳐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이후 최장수 국무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던 그는 독일식 권역별비례대표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협의의 정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또 북핵 문제 해결과 민간차원의 인도적 지원을 분리 추진해서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다음은 이날 방송의 주요 내용.

▲ 10일 SBSCNBC <제정임의 문답쇼, 힘>에 출연한 김황식 전 총리. ⓒ SBSCNBC

장수 총리의 비결은 ‘쫓겨날 일이 없어서’ 

제정임(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최장수총리라는 타이틀을 갖고 계신 분이죠. 김황식 전 국무총리 모셨습니다. 총리님은 이명박 정부 후반부에 2년 5개월 간 재임하셨죠.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최장수 총리시고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통산하면 4번째 장수 총리라는 기록이 있네요. 사실 역대 총리 중에는 불과 수십일 만에 물러나신 분도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오래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을까요?  

김황식(제41대 국무총리): 한마디로 말해 운이 좋았죠. (웃음) 총리직에서 쫓겨날 일이 없었으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국회, 언론, 국민, 대통령 모두로부터 일을 무난히 한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는 소신과 원칙을 지키면서도 겸손하고 성실한 자세로 일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겠죠.  

제: 원칙과 소신, 그러면서도 조화와 타협을 추구하신 게 비결이셨군요. 제가 총리실에 있던 분한테 들은 얘기로는 부처 간 갈등을 조율하는 데 탁월하셨다고요. 대외 개방 문제로 농림부하고 기획재정부가 다툴 수도 있는데 그런 사안에서 현안을 굉장히 빨리 파악하고 굵직하게 맥을 짚어서 일이 되는 방향으로 합의를 잘 이루시더라, 그래서 대통령이 믿고 맡긴 게 아닌가 하는 얘기를 하더군요. 부처 간 갈등을 조정하는 데 있어서 나름대로 적용해 오신 원칙이나 노하우 같은 게 있을까요? 

김: 가장 중요한 것이 원칙이고, 무엇이 기준이며 상식이냐를 따져야죠. 총리가 중간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데, 편견을 가지고 어느 쪽에 치우쳐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되면 힘 있게 조정을 할 수가 없죠. 

제: 공정하게 일을 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김: 예. 그런 신뢰를 먼저 얻어야 하고요. 그 다음으로는 부처의 생각, 나름대로 다 국가를 위한 부처고, 논거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를 먼저 샅샅이 듣고 이해를 조절해서 서로 간에 타협할 수 있도록 하면 쉽게 결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김황식 전 총리가 자신의 공직 생활 노하우를 설명하고 있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제: 치우치지 않고 얘기를 잘 들어주는구나, 듣고 판단하는구나 하는 믿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군요. 2013년 2월에 국무총리직에서 퇴임하고 난 후 독일 연수를 다녀오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디에 가서 무슨 연구를 하셨습니까? 

김: 2013년 5월부터 6개월 간 베를린에서 공부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 독일에서 법률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판사시절 유학을 간 거였습니다. 그리고 공직 생활 40년을 마치고 베를린에 가서 제가 생각한 게, 독일이 분단국가에서 통일을 이뤄 평화를 만들었고,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또 유럽연합(EU)의 중심국가가 돼 있는 데, 정말 잘 하는 국가의 모델이라고 봤습니다. 독일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하는지가 궁금해서 베를린에 가서 독일의 정치, 통일 과정, 복지, 노동 정책, 강소기업과 히든챔피언은 중소기업 사례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를 했습니다. 

제: 그렇게 독일에서 내공을 쌓고 오신 후에, 2014년 6월 지방선거 당시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출마하셨어요. 아쉽게도 정몽준 후보에게 패배하셨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서울시장 경선에 나오셨던 거며 그 실패를 통해 뭘 배우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솔직히 다시 공직에 나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당으로부터 ‘서울 시장 선거에 나가 박원순 후보를 꺾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한사코 피했습니다. 심지어 미국으로 도망가다시피 출국까지 했는데, 세상일이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어서 결국은 수락을 했습니다. 그 때 생각했던 건, 호남 출신의 서울시장 새누리당 후보, 이건 나름대로 지역 화합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그리고 여당 안 친이 친박 대립이 있지만, 저는 어느 계파에 속하지 않고 중립적으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통합도 시킬 수 있다. 나름대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수락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막상 정치 현실에 뛰어들어 보니까 우리가 생각했던 사회 상식과 기준이 통하지 않는 세계더라고요. 정치판이라는 것이. 그래서 제가 아무리 40년 공직생활을 했더라도, 그 분야에서는 신인이고, 경험이 부족해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준비가 부족했고 몰랐던 세계라 실패한 것 같습니다. 

제: 총리시절 ‘울보 총리’라는 별명이 있으셨다고 해요. 여러 현장 방문을 많이 하시면서 안타까운 장면을 볼 때마다 굳이 눈물을 감추시지 않고 공감을 표시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특히나 국민들이 인상 깊었던 건 연평도 포격(2011년 11월 23일 벌어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1주기 추모식 때 장대비 속에서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다 맞으시면서 유족과 함께 울었던 장면이었던 것 같아요. 그 때 어떤 생각이셨습니까?

김: 추모식을 진행하는 도중에 비가 내린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우비를 갈아입었고, 제 뒤에 있던 경호원은 저에게 우산을 받쳐줬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경건한 의식에 주재자로서 우산을 받쳐 쓴다든지, 비옷을 입는 건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비를 맞게 됐습니다. 추모식이 끝나고 묘비에서 참배를 할 때도 기왕 비를 맞았으니, 계속 비를 맞아야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때 유족 중 한 아버지는 실성하다시피 슬픔에 겨워 울고 계셨습니다. 보면서 안타까웠고, 총리로서 해야 할 도리는 그분들과 마음을 같이하는 거라 판단했습니다. 

제: 진심어린 공감을 보여주신 거군요. 원래 눈물이 많으세요?

김: 누님들과 어울려 커왔기 때문에 아무래도 감성적으로 영향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김황식 전 총리가 연평도 포격 1주기 추모식에서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묘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국민에게 ‘연필로 쓴 페이스북’ 100통의 편지  

제: 첫 키워드로 ‘편지’를 꼽아주셨어요. 뭔가 뭉클한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요. 

김: 지금은 사람들이 편지를 잘 안 쓰는 시대죠. 그러나 우리는 살아오면서 늘 편지를 쓰면서 교감을 했습니다. 제가 광주 지방법원장일 때 우리 법관, 직원들과 ‘지산통신’ 이란 이름의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소통을 했고, 감사원장일 때도 마찬가지고, 총리 때는 전 국민과 연필로 쓴 페이스북을 통해 소통했습니다. 

제: 편지를 손글씨로 쓰셔서 그걸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신 거죠?

김: 네.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서울시장 출마 권유를 받고, 좀 피하고 싶어서 미국 버클리 대학에 잠시 가 있었습니다. 그 때 딸이 연수 와 있었는데, 제가 서울시장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딸이 한사코 말려요. 하지 말라. 딸과 싸웠습니다. 저는 “세상은 원래 내 뜻대로만 할 수 없는 거다”라고 답했어요. 결국 서울시장 경선에 나가기로 하고 공항으로 갔는데, 딸이 편지 한 통을 줬습니다. 라운지에서 읽어보니 “아빠의 뜻을 모르고 무조건 반대만 해서 너무 죄송하다. 가서 꼭 열심히 해서 성공하시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어요. 편지를 본 순간 울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수행원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서 난처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제: 연필로 쓴 페이스북을 처음 시작할 때는 총리실 페이스북 구독자가 500명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23만 명까지 됐다고 들었습니다. 손편지를 100회나 쓰셨다고요. 혹시 그 편지 내용 중에서 특별히 애착이 가고 기억에 남는 편지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김: 2011년에 학교 폭력 문제로 대구의 중학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유언장을 남겼는데, 아버지 어머니의 핸드폰 번호를 다 지우고 죽음을 맞는 과정을 유언장에 남겼습니다. 이 사건을 접하고 학교 폭력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겠단 생각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A군, 정말 미안하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유언장을 남긴 A군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이별이 서러워
한없이 망설였을 그는 우리 곁을 떠나갔고 
그를 지켜주지 못하고 허망하게 보내버린 우리는 
죄인으로 남았습니다. 

어떤 이는 저에게 대구로 달려가라고 권합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가 공부했던 교실, 그 책상에 앉아도 보고 
그가 안식하는 도림사 추모관 유골함 밑을 서성이며 
혹시라도 그의 미세한 음성이라도 들리는지 귀 기울여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다 부질 없습니다. 
찾아가 붙잡아줄 A군의 손도 꼭 껴안아줄 가슴도 그곳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못난 나의 손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정말 안타깝고 답답하고 죄송합니다. 
그리고 A군! 정말 미안하다. 
-2011년 12월 30일 김황식 총리- 

▲ 김황식 전 총리가 학교 폭력으로 희생된 학생에게 미안해하며 총리 재임시절에 쓴 편지를 읽고 있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제: 국정을 책임지는 총리로서, 또 사회 어른으로서의 자책감과 진심이 느껴지고요.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현장도 많이 다니셨지만 페이스북을 통한 소통도 하나의 중요한 채널이 됐겠네요. 

김: 네. 페이스북을 하면 댓글이 참 많이 달리죠. 시간이 되는 한 댓글을 챙겨 봤고, 그렇게 국민들의 생각을 파악하니 민심을 국정에 반영하는 데도 굉장히 도움이 됐습니다. 

제: 다음 키워드로는 ‘농구’를 꼽아주셨는데요. 농구를 즐겨 하신 건가요?

김: 중학생 때 3년간 학교 농구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방과 후에 농구를 했는데요, 농구를 통해 얻은 게 많습니다. 건강과 팀원 간 협동심, 배려하고 협력하는 공동체 정신을 배웠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원래 학교에 농구팀이 없었는데, 당시 전남체육회에서 제가 다니는 광주제일고에 농구팀 출전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중학생 때 농구를 했었단 이유로 농구대회에 나가서 고등학교 3학년 때 석달 간 공부를 안 했습니다. 대학을 떨어졌죠. 재수해서 이듬해 대학에 갔는데, 그때 정말 인생의 많은 걸 느꼈습니다. 소속감이 없는 외로움이나, 같이 재수생활 하는 친구들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되면서 일생의 교훈이 됐습니다. 농구는 제게 인생을 사는 지혜도 줬고, 함께 운동하던 친구들과의 평생 끈끈한 우정을 줬습니다. 

제: 만약에 저보고 예전에 중학교 때 농구 했으니까 학교 대표로 농구 대회를 나가라 그러면 고3이라 죄송하지만 못 하겠습니다 그랬을 것 같은데요. 그때 무슨 생각으로 합류하신건지?

김: 제가 철이 없었죠. 공부하느라 못 나간다고 말하는 게 정답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선 철이 없어 실수한 걸 수 있죠. 그러나 그때는 다른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지시를 하니까 따랐는데 결과는 나빴죠. 그러나 길게 보니까 더 좋았더라. 그래서 저는 인생에 있어서는 당장 손해보고 사는 것도 어떻게 보면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춘문예 소설 냈다 ‘미역국’ 먹었던 문학청년

제: 다음 키워드는 ‘문청’을 꼽아주셨는데요. 문학 청년이셨군요?

김: 겉멋이 들어서 시와 소설을 읽고 썼죠. 소설을 신춘문예에 출품하기도 했었지만, 당연히 미역국을 먹었습니다. (웃음) 생각을 정리하고 다짐하는 데 문학을 통해 양분을 얻었다 생각합니다. 

제: 편지를 통한 소통의 뿌리가 거기 있었네요.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소질이 있으셨고, 늘 쓰는 걸 즐겨하셨군요. 총리님이 유치환의 ‘바위’를 좋아한다는 건 언론에 많이 나왔는데, 두 번째로 좋아하는 시는 뭔가요? 

김: 함형수 시인의 ‘해바라기의 비명’(1936)입니다. 

나의 무덤 앞에는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이것도 바위와 마찬가지로 인생을 묵직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게 하는 다짐을 주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제: 문학청년으로서의 예술성뿐 아니라 노래도 잘 하신다고 들었어요. 

김: 어렸을 때 노래 잘 했습니다. 소풍가서 노래자랑에 꼭 선발되는 학생이었습니다. 유행가를 잘 불렀죠. 

제: 요즘은 어떤 노래를 부르시나요?

김: 제가 60년대 말, 70년대 초에는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박인희씨 노래를 즐겨 듣고, 불렀습니다. 그 때 노래는 거의 다 할 줄 압니다. 근데 요즘 노래는 잘 모릅니다. 

제: 그럼 특별히 그 때 애창곡으로 노래를 조금만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송창식의 ‘맨 처음 고백’ 같은 거요. 

김: (노래) 말을 해도 좋을까 사랑하고 있다고 
마음 한 번 먹는데 하루 이틀 사흘 

제: 목청이 참 좋으십니다. 사모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요. 사모님을 향한 마음일 테니까요. (웃음) 다음은 총리님의 ‘인생의 지혜를 나누는 강의’를 듣겠습니다. 

▲ 김황식 전 총리가 애창곡인 송창식의 ‘맨 처음 고백’을 부르고 있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생명과 가족 존중해야 진정한 ‘선진국’

김: 우리나라는 대단한 나라입니다. 짧은 기간 동안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민주주의도 달성했습니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했고,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됐습니다. 그러나 압축 성장하면서 많은 문제를 겪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빈부 격차, 양극화, 저출산 고령화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는 거대한 문제보다 조금은 사소하지만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보다 건강하고 따뜻한 사회로 가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우리가 이만큼 부유해졌지만, 국민들이 행복해진 건 아닙니다. 자살률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1위고, 교통사고 사망률도 1위입니다. 이런 나라는 결코 행복한 나라도, 선진국도 아닙니다. 저는 총리시절에 그런 취지에서 ‘건강사회 만들기’ 프로젝트를 테스크포스팀을 구성해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때 만든 12가지 과제를 소개합니다. 정부뿐 아니라 시민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첫 번째가 자살 예방입니다. 한국은 인구 10만 명당 30명이, 1년에 1만 5천명이 자살하는 나라입니다. 두 번째가 인공임신중절 예방입니다. 한국에서 연간 17만 건의 불법 낙태 시술이 행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국가적으로 재앙이고, 낙태를 한 어머니에게도 평생 짐이 되는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혼모 문제를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건전한 입양문화 만들기입니다. 우리가 고아들을 해외로 입양시켰는데, 국내 입양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네 번째는 가출 위기 청소년 줄이기입니다. 우리 청소년의 17%가 가출에, 또는 범죄에 노출돼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교통사고 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이기입니다. 1년에 5천여 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데,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줄일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학교 폭력, 따돌림의 문제입니다. 우리 학생들의 12%가 학교 폭력과 따돌림의 경험을 갖고 있고, 언어폭력은 50% 이상이 겪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로 무분별한 고소를 줄여야 합니다. 우리 사회엔 무분별한 고소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경찰 수사 사건 중 고소사건이 차지하는 비율이 일본의 50배고, 10만 명당 피고소 인원 비율은 일본의 170배입니다. 여덟 번째는 아름다운 인터넷 세상 만들기입니다. 여러분 댓글 한 번 보십시오. 이게 정상적인 사회인지 의심을 하게 됩니다. 아홉 번째로 관혼상제를 통한 허례허식을 줄여야 합니다. 또 도박 중독, 불법 도박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도박 중독률은 9%고, 치료가 필요한 이들이 80만 명에 달합니다. 외국의 3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인터넷 중독 문제, 마약 오남용, 비만, 퇴폐 향락, ADHD, 본드, 부탄가스 등의 문제들로 인해 우리 청소년들이 병이 듭니다. 이에 대해 우리 국민들 모두가 함께 관심을 갖고 해결해 나가야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김황식 전 총리가 ‘건강 사회 만들기’ 12대 과제를 설명하고 있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조용히 대지를 적시는 ‘이슬비’ 같은 총리

제: 총리 처음 취임하셨을 때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나는 소나기 같은 카리스마 있는 총리보다는, 오는 듯 안 오는 듯하지만 촉촉하게 대지를 적셔서 새싹을 틔우는 이슬비가 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실제로 2년 5개월이 지나고 보니 묵묵히 많은 일들을 해내 좋은 평가를 받으셨어요. 굉장히 많은 일들을 하셨는데 ‘이건 내가 참 잘 했지’하고 특별히 자부심을 느끼는 일이 있으시면 한 두 가지 꼽아주세요.

김: 제가 재임하던 시절에 사회 갈등 문제가 많았습니다. 검찰·경찰 수사권 조정 문제라든지, 대한주택토지공사(LH)의 본사를 전주에 두느냐 진주에 두느냐 하는 문제 등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갈등 과제들을 원칙과 순리에 따라서, 특별히 갈등이 지속되지 않고 사안들을 원만하게 해결하려 노력을 했던 점들에 대해 보람을 느낍니다. 또 대통령께서 애를 더 쓰셨지만, 평창 동계올림픽을 3수 끝에 유치한 것도 보람 있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제: 특별히 해결하기 어려웠던 사안과 관련해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김: 첨예한 갈등이 벌어진 과제 중 하나가 검찰과 경찰 간의 수사권 조정 문제였습니다. 소통을 충분히 하면서 설득을 시켰습니다. 수사권 조정 문제가 결론이 난 다음, (언론에) 발표하기 며칠 전 총리실에 오전 10시에는 하급 경찰관 10명을, 오후 2시에는 젊은 검사 10명을 불러 면담을 했습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소통을 다시 한 것입니다. 현재 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며, 내 생각은 무엇이며, 그래서 이런 방향으로 하는 것이 옳은 바라 생각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그들의 의견을 직접 듣고 오해가 있으면 풀어주고, 검찰과도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총리실에서 최종 결론을 내면 검찰이든 경찰이든 상당히 저항할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그런 절차를 거치면서 충분한 설득 덕분에 별다른 저항 없이 경찰과 검찰 모두 원만하게 수긍했습니다.

▲ 김 전 총리는 검경 수사권 갈등 상황 당시 젊은 경찰관 10명과 젊은 검사 10명을 총리실로 불러 직접 소통해 갈등을 해결했다.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제: 젊은 경찰관 10명, 젊은 검사 10명은 하고 싶은 얘기를 잘 개진하던가요? 총리님 앞에서?

김: 대단했어요. 어떤 한 경찰관은 “총리님, 이런 상태에서 경찰을 할 수 없습니다”라며 자기가 받은 표창장을 들고 와서 반납하려 했습니다. 그 경관보다 상사인 경찰이 나무라기도 하고, 저도 짐짓 “그렇게 버릇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나무라기도 하면서도, 오해를 풀기 위해 충분히 대화를 했습니다. 헤어질 때는 그런 대로 서로 간에 이해하고 돌아갔습니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일부러라도 숙성시키는 절차 필요

제: 어려운 협상이나 대화의 과정을 거쳐서 결실을 본 경우를 말씀해 주셨네요. 반대로 ‘그건 잘못한 것 같아’, 혹은 ‘다르게 할 수 있었는데’ 하며 회한이 남는 부분도 있으실 것 같아요.

김: 제가 재직 중에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 양국 간에 군사 정보를 공유·교환하는 것에 대한 문제였죠.

김: 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 국익에, 국가 안보에 꼭 필요한 협정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소통의 노력이 부족한 결과로 협정 체결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국민들을 충분하게 설득을 시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자책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위안부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생각이 없었던)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문제이지만, 이명박 정부 말기에 한일 관계가 필요 이상으로 악화됐습니다. 그것이 현재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한일 관계가 상당히 어려운 점에 대해 굉장히 아쉽게 생각합니다.

▲ 김 전 총리는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협상과 관련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먼저 찾아가는 설득 과정이 뒤늦게 이뤄진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제: 위안부 협상 관련한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우리 국민들이 보기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그 정부가 진심으로 반성과 사과를 안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 정부가 위안부 협정을 맺었는데, 피해 당사자들은 수용하지 않는, 굉장히 거부하는 내용입니다. 그 한일협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김: 제가 협정 내용에 대해서는 잘했다 못했다 이런 이야기를 한마디로 하기는 어렵구요. 충분하게 피해 당사자분들에게 절차적으로 사전에 더 열심히 설득을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교부 차관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나중에 찾아갔는데, 그 과정을 먼저 했어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절차상의 아쉬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책의 결론이라는 것은 대부분 하루저녁 생각해도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책의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그야말로 일부러라도 숙성시키는 그러한 절차를 거쳐야 그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이 해결이 되고, 그 정책이 강력하게 힘을 가지고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절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민과 소통이 부족했던 이명박 정부

제: 이명박 정부의 임기 절반 정도를 함께 하셨어요. 총리로서 함께 하셨으니까, 어떻게 보면 이명박 정부의 영광과 상처를 공유하시는 셈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공(功)과 과(過),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을 한 가지 정도씩만 꼽아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에서 생긴 글로벌 금융 위기 문제와, 그리스 등 유럽 재정 위기 문제, 이 두 문제를 김대중 대통령께서 IMF체제를 극복했던 것처럼 비교적 빠른 시간에 극복해낸 점이 (이명박 정부가) 가장 잘한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과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소통 부분에서 국민에 대한 설득 부족으로 인해 광우병 사태에 너무 많은 (정권의) 힘을 소진을 했고, 또 한일 관계를 적절하게 끌고 가지 못한 점이 흠이라면 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이명박 정부의 유산 중에서 가장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4대강 사업입니다. 4대강 사업에 대해 너무나 거액의 예산을 낭비했다, 공사 관련 비리가 많다는 등의 비판이 쏟아져 나왔는데요. 그 때 함께 국정을 책임지셨던 전 국무총리 입장에서, 어떤 비판은 수긍할 만하다, 어떤 비판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렇게 나눠서 평가를 해주신다면 어떨까요?

김: 4대강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담합 비리가 있어서 일부 예산이 낭비된 것 아니냐’는 일부의 지적이 있는데, 그 부분은 합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그 부분은 사법처리도 됐었죠. 

김: 또 일부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입장에서도, ‘4대강을 한꺼번에 할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하는 게 낫지 않았겠느냐’는 지적도 저는 일리는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 사실 그때 너무 제한된 시간 안에 빨리 끝내려고 밀어붙인 감이 좀 있었죠. 

김: 그런 점이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강 개발 사업이라는 것은 일단 시작하면 빨리 끝내야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중간에 가뭄 등이 오면 공사비가 더 들게 됩니다. 다만 강을 나눠서 하나씩 순차적으로 해보는 것이 어떠냐 하는 지적은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밖에 4대강 사업은 지금 국민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4대강 사업은 홍수·가뭄 문제를 해결하고, 이 문제는 상당부분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 실증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수질이라든지 생태계 문제라는 것도 상당 부분 과장이 됐습니다. 보를 막아서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생태계 파괴가 됐다고 말하는데, 우리가 댐을 막아서 호수를 만든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 가뭄과 홍수 대처가 일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게 22조씩이나 들여서 했어야 하는 일이냐는 비판, 그리고 ‘녹조라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물이 고여서 썩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론자들이) 양보를 안 하는 것 같아요.

▲ 김 전 총리는 4대강 사업과 관련한 국민의 오해는 정부가 국민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김: ‘녹조라테’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써서 (4대강 사업에 대해) 비난을 하는데요, 고여 있는 물에서 녹조가 생길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문제는 4대강 유역뿐만 아니라 4대강 사업과 관련이 없는, 북한강이라든지 또는 댐이 건설된 곳에서도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지적은 일부는 옳은 지적이지만, 상당 부분은 과장이 됐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22조원 중 상당 부분은 수질개선 사업이라든지 저수지 둑 높이 사업이라든지 하는 사업들이었습니다. 이는 4대강 사업과 관계없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예산을 4대강 사업예산이라고 편입시킨 자체가, 정부가 조금 서툴렀다는 생각입니다. 4대강 사업과 관계없이 해나가야 하는 사업들의 경우는 4대강과 연계돼 있지마는, 계산상 빼놨다면 훨씬 국민들에게 주는 충격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국민들을 잘 설득시키고 하는 부분이 미흡했기 때문에 오해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보면 서류와 다른 점 많아 현장 중시  

제: 총리 시절 굉장히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이 다니셨죠. 어떤 철학이 있으셨습니까?

▲ 김 전 총리는 법관 생활 중 경험을 통해 현장 확인의 중요성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김: 제가 재판을 할 때 사건 기록, 즉 서류에서 보는 것과 사건의 현장이 완전히 다른 것을 경험했습니다. 법관 생활을 하는 동안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현장을 가서 보면, 현장의 실태가 정확히 이해되고, 현장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문현답’,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을 쓰면서 많이 다녔습니다. 국민들과 대면해서 대화를 나누고 하는 가운데 소통도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해결책도 만들어지고, 또 국민들에게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노력을 통해서 불필요한 갈등과 오해를 불식시키고,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새누리당 공천 갈등에는 대통령 책임도 

제: 지난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다수당 지위를 잃었습니다. “새누리당을 다시 살려야한다”,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자” 하면서 김 총리님을 모셔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거론이 됐어요. 실제 제안을 받은 일이 있으신지요?

김: 그런 제안을 받은 바 없습니다.

제: 비대위원장 뿐만 아니라 공동선대위원장이라든지 새누리당이 긴급한 사안이 생길 때 총리님의 존함이 많이 거론되는데, 그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김: 그 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중의 하나겠죠. 그런데 새누리당이 집권 여당이기 때문에, 새누리당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해야 국가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선거가 새누리당에 대해서 국민들이 채찍질을 한 것이거든요. 그것은 오만하고 독선적인 정치 이해 집단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용서를 하지 않는다, 채찍을 가한다 하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 선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총리님께서 보시기에 새누리당은 뭐가 그렇게 오만했나요? 어떤 점을 잘못한 건가요?

김: 새누리당은 기본적으로 야당이 분열됐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하든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공천을 그야말로 사천 수준으로, 합리적인 원칙과 기준 없이 했죠. 계파 간 싸움을 보여줬던 것은 국민을 무시하고 국민을 의식하지 않은 공천 과정이었고 그것이 가장 큰 잘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기네들끼리 공천 다툼으로 밥그릇 싸움만 하는 것, 그게 새누리당의 오만함이었다고 말씀하셨네요. 하지만 그 핵심을 보면 ‘박심’, 친박(親朴)이 어떻고 진박(眞朴)이 어떻다는 둥 대통령의 마음을 둘러싼 공방이었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공천 과정이라든지 당에서 계파가 나뉜 문제에서 궁극적으로 대통령께서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문제들이 친박이다, 비박이다 하며 나오고 있을 때, 대통령께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원칙을 선언해 직접 제동을 걸어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일식 협치 위해서는 대통령 단임제, 소선거구제 바꿔야  

제: (새누리당의 4·13총선 패배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도 책임이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네요. 우리 정치가 독일에서 배울 게 많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고, 요즘 이와 관련한 글도 이곳저곳에 많이 쓰시고 계시는데요. 여소야대를 만든 민의를 반영해서 우리 정치가 개혁이 되려면, 특히 독일에서 이런 점은 배웠으면 좋겠다 하는 부분이 있다면 얘기해주세요.

김: 독일은 의원내각제, 다당제 국가에다 또한 선거제도 특성상 특정 정당이 과반수를 점하기 굉장히 어려운 정치 체제입니다. 이런 정치체제다보니까 1949년 독일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 지금까지 한 번도 예외 없이, 줄곧 두 개 정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해서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 생각이 다른 정당끼리 대화하고 토론하고 절충을 해서, 단일 공약을 만들어내는 연정 협약을 통해서, 오히려 더 안정적으로 정치를 해나가고 국정을 운영해나갑니다. 이것이 독일 정치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헌법상 정치 구조가 독일과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도 제도적으로 독일식 정치 시스템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그 전에라도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체제 하에서도 서로 대화하고 타협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권력도 분점하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대 국회에서는 정치권이나 정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러한 협치의 정치, 타협의 정치를 하지 않으면 국정이 굴러갈 수 없는 상태가 됐습니다. 저는 독일 정치의 모습을 우리가 구현해볼 수 있는 기회라는 기대와 함께, 만약 그렇지 않고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가 굉장히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우려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20대 국회의 3당 체제가) 독일 정치의 정신이 우리나라에서도 구현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 김 전 총리는 한국 정치가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독일 정치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제: 독일이 소수정당도 의회에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또 여러 정당이 연정을 하지 않으면 국정을 끌고 가기가 어려운 것은 선거제도와 관련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독일의 권역별 비례대표제 같은 게 있죠. 그런데 우리는 지난번 선거구 획정 때 오히려 비례대표가 줄고, 독일과는 거꾸로 가는 방향인데,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사람만으로 어떻게 하기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우리나라 선거제도는 앞으로 어떻게 손질을 해야 할까요?

김: 우선 권력구조에서 5년 단임의 대통령제, 이것은 수명을 다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소선거구제를 통해서는 다수의 정당이 출현하기 어렵게 돼 있습니다. 지역정당으로 분화되는 문제도 있고요. 저는 권력구조 문제와 함께 선거제도, 특히 중선거구제나 대선거구제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독일식의 권역별 비례대표제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비례대표의 숫자, 독일의 경우에는 비례대표가 국회의원의 절반 정도거든요. 비례대표를 확충하는 것을 포함해 제도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통령중심제와 소선거구제를 가지고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어렵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는 핵문제와 인도적 지원을 분리해야 

제: 독일에서 우리가 또 참고할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통일문제입니다. 가서 많이 들여다보고 공부도 많이 하고 지금도 아마 많이 고민을 하고 계실 텐데요. 지금 북한은 미사일·핵 도발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고, 우리는 하나 남아있던 개성공단까지 가동 중단 조치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와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대북 정책을 해나가야 하는지, 현실적인 대안을 제언해 주신다면요?

김: 북한의 비핵화 문제가 해결이 돼야 하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6자회담이든 제재든 국제사회와 공조를 통해 북한을 비핵화로 끌어낼 수 있는 노력은 별도로 해야 합니다. 대신 미우나 고우나 북한은 우리의 대화 상대방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정부 당국자 사이에서 대화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대화가 단절되고 어렵더라도, 북한 주민의 마음을 사는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 등에 대해서는 주변 상황과 관계없이 끊임없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예를 들면 기초 식량이나 의료품 등을 보내는 등의 문제겠네요.

김: 그런 경우는 우리가 통일 이후에 지급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을 선급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노력을 부분별로 다른 트랙으로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 통일 과정에서도, 통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동독 주민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북한 주민에 대한 친화적인 노력을 통해서 북한 주민의 마음을 우리가 사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외교부나 통일부의 입장에서는 대화의 상대방으로서 또, 같은 민족으로서 동질성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는 노력들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결코 서로 대립되고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인식을 정부나 국민들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다 손님이다”

제: ‘내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은 어머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위인 중에서 내 스승을 찾을 수도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 어머니를 스승으로 꼽으셨는지, 어떤 기억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 김 전 총리는 어머니의 언행에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태도를 배웠다고 말했다. ⓒ <제정임의 문답쇼, 힘> 화면 갈무리

김: 저희 어머니는 교육을 많이 받으신 것도 아니고 평범한 시골의 어머니이신데, 그분이 제 성장과정에서 어떤 상황마다 한마디씩 던져주시고 했던 것이 굉장히 저한테는 교육이 됐습니다. 한번은 거지가 저희 집에 찾아왔을 때, “거지가 왔어요!”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선 거지가 돌아간 뒤에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다 손님이다. 거지라는 말을 하지 말고 손님 오셨다고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입니다. 저도 괜찮은 아이였나 봐요.(웃음) 그걸 듣고 충격을 먹었다는 자체가.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이야말로 인간 사랑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따뜻하게 인간으로서 대접하려 했던 그런 태도를 배웠습니다.

제: 특별히 교육을 안 받으셨어도, 개개인의 존엄성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셨던 분이군요.

김: 경우에 따라서는 “손해 보고 살아라”고 말씀하셨고, 또 누구와 다툼이 있을 때, “네가 옳고 네가 약한 위치에 있다면 끝까지 주장하고, 상대방이 약하면 양보해줘라”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생활하는 과정에서 교육 아닌 교육을 받았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동안에 어머니께서 해주신 그런 말씀들이 생각이 나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어머니 말씀대로 하면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판단 기준이 되곤 합니다.

제: ‘무조건 양보하라’가 아니고 ‘상대가 약하면 양보하되 네가 옳고 네가 약한 위치에 있으면 끝까지 주장을 해라’는 말씀이 굉장히 인상 깊네요. 이제 이 방송을 보고 계시는 시청자들, 특히나 젊은이들한테 인생을 이런 마음의 자세로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말씀을 간단히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참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합니다. 억울할 때도 있고, 최선을 다했는데 뜻이 이뤄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어떻게 대응을 하느냐, 불평과 불만으로 그 문제에 휩쓸리는 것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선의로 생각하려는 노력들을 해나가면, 오히려 오늘의 어려움이 풀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는 일시적으로 손해인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으로 돌아온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제정임의 마침표: 부지런한 발길과 따뜻한 눈물로 소통의 싹을 틔운 이슬비 재상 김황식.


경제방송 SBSCNBC가 지난 3월 24일부터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가 진행하는 명사 토크 프로그램 ‘제정임의 문답쇼, 힘’을 신설했다. 매주 목요일 오후 9시부터 50분간 방영되는 이 프로그램은 사회 각계의 비중 있는 인사를 초청해 정치 경제 등의 현안과 삶의 지혜 등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풀어간다. <단비뉴스>는 매주 금요일자에 방송 내용을 전재한다. (편집자)  

* 전체 영상은 아래 링크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http://sbscnbc.sbs.co.kr/read.jsp?pmArticleId=10000800313

편집 : 김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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