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그야말로 ‘소소한’ 행복 찾기

10시간 04분. 오늘 기록한 공부시간이다. 공부시간을 정리하며 하루를 마치게 된 지 어느덧 2년째다. 항상 같은 시간에 산책을 나섰던 철학자 칸트만큼은 아니지만, 공부한 시간을 기록하고, 쌓인 자료들을 모아 하루를 반성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왠지 찝찝하다. 어제, 지난달, 작년과 비교하면서 오늘의 ‘성실’함을 위로하거나 자책해야 잠이 온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난 성실해야 한다.

성실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미덕이다. 성실하게 살라는 말은 ‘아프니까 청춘이다’처럼 달콤한 위로로 포장된다. ‘미쳐야 미친다’ 같이 개인의 노력을 극대화하라는 주문이 되기도 한다. 성실은 이 땅에 사는 자들이 갖춰야 할 필수 요소다. 성실이 성공을 반드시 보장해주는 건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 중 성실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는가. 시대가 가도 미담은 같다. 남들 잘 때 공부했고, 남들 놀 때 일을 했던 사람들의 성공 이야기가 셀 수도 없이 만들어진다.

성실의 대명사가 부서지는 과정

▲ 수남은 성실한 노력과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이다. ⓒ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갈무리

안국진 감독의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런 신화에 도전한다. 영화는 저예산, 4만 관객, 감독의 첫 작품, 주연 배우 이정현의 청룡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이란 수식어 뒤편에서 노동 열위, 헬조선, 5포 세대 등의 사회 담론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래서일까? 주인공의 통쾌하고 잔인한 복수극을 끝까지 뒤쫓고 나면 쏟아지는 씁쓸함을 피하기 어렵다. 영화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성실 신화’를 깨부수면서도 신화에 기댄 기득권의 존재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인물을 다룬다.

주인공 수남은 사회가 바라는 성실의 조건을 다 갖췄다. 그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한다. “나만 열심히 하면 돼”라고 하면서 언젠가 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에 의문은 없다. 영화의 광고 문구처럼 “단지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다.

행복해지고 싶은 수남의 성실 신화는 두 단계로 깨진다. 첫 번째는 교육의 배신이다. 수남은 여공과 엘리트의 삶을 저울질하다 엘리트가 되려고 상고에 진학한다. 그리고 타자 1급, 주산 1급, 부기 2급 등 2학년 때 무려 14개의 자격증을 딴다. 하지만 노력으로 얻은 ‘최연소 최다 자격증’이란 호칭은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기술 변화라는 사회적 조건을 맞았을 때, 그를 보호해주는 건 없다. 공장 경리로 취직해 계산기를 두드려 장부를 기록하는 일을 해야 할 뿐이다.

▲ 밥을 먹으며 명함 던지기 연습을 하는 수남. ⓒ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갈무리

두 번째는 노동의 배신이다. 시련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미래를 약속한 후 찾아온다. 청각 장애인인 수남의 남편은 수남의 설득으로 ‘인공와우’를 이식받는다. 거액을 들인 귀는 ‘압착 작업’을 할 때 부작용이 생기고, 남편은 손가락 세 개가 잘리는 사고를 당한다. 그 뒤 수남은 무기력에 빠진 남편의 꿈이었던 집 장만을 위해 악착같이 일을 한다. 청소, 주방일, 명함 던지기, 신문 배달 등 온갖 일들을 성실하게 해내고 달인의 경지에도 오른다. 결국, 9년의 노력 끝에 집을 산다. 대출금 1억4천을 끼워서.

이탈을 부르는 사회 구조

집은 샀지만 시련은 계속된다. 남편이 자살을 시도해서다. 그런 남편을 겨우 살려내지만 식물인간이 된다. 수남은 대출금에 남편 치료비까지 겹치자 집을 내놓으려 부동산에 갔다가 재개발 소식을 듣는다. 재개발로 모든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가 택한 길은 ‘이탈’이다. 신문 배달소에 가서 일을 쉬겠다고 하는 장면은 수남이 신앙처럼 여겼던 성실과의 이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신문 대신 서명 용지를 들고 동네를 돌며 서명을 받는다.

수남이 서명을 받는 이유는 ‘재개발’을 둘러싼 이권 다툼 때문이다. 수남 동네의 재개발 결정은 다른 동네 주민들의 반발을 부른다. 그들은 ‘통장’의 주도하에 대대적인 ‘재개발 재결정 투쟁’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무력행사를 맡는 인물은 ‘최 원사’와 ‘청년대장’이다. 최 원사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며 폐지를 줍는 중년 남성이다.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청년대장’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며 세탁소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수남을 폭행하고 감금하지만, 이들 역시 수남처럼 재개발로 행복해지길 바라는 소시민이자 ‘을’이다.

서명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노력’은 강조된다. ‘노동’이 아닌 ‘이탈’에서의 노력이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을’과의 싸움은 보이지 않는 사회 구조와의 싸움보다는 더 명료하다. 낮은 임금, 날아드는 고지서, 빈약한 복지, 존엄사를 강요하는 병원 등은 개인이 성실한 노동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문제다. 반면에 눈앞에 보이는 ‘폐지 줍는 최 원사’, ‘분노조절장애 청년’, ‘통장 아줌마’라는 적은 맞서 싸울 수 있다. 을과 을이 싸우게 되는 이유다.

▲ 우리 사회는 성공한 사람들의 발에만 관심을 둔다. 위는 수남의 발. ⓒ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갈무리

을-을 전쟁은 치열하다. 수남은 폭력과 감금을 방어하다 뜻하지 않게 살인을 저지른다. 돌아설 수 없는 강을 건넌 그는 이제 서명에 기대지 않는다. ‘재개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제거’하는 게 편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싸움터에서 그의 노동기술이 빛을 발한다. 신문 던지기, 명함 던지기, 칼 솜씨 등이 전쟁에서 이기는 무기로 사용된다. 노동기술은 한 차원 높은 단계의 이탈인 ‘살인’에 쓰임으로써 비로소 생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신화 하나를 생산한다. “행복과 성공은 이탈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다만 이탈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만 향한다.”

수남은 싸움에서 이겨 재개발을 쟁취하고 밀렸던 병원비를 다 낸다. 남편과 오토바이를 타고 꿈꾸던 신혼 여행지인 바다로 간다. 이 장면에서 순간 허무해지는 것은 그가 죽인 사람이 5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더 거창한 이유가 있다고 그의 죄가 지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작 바다여행 하려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어야 했나. 이때 수남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런 게 아닐까? 내가 바라는 건 단지 ‘소소한’ 행복이었다고.

▲ 재개발 확정 후 수남의 미소는 기쁨의 표현일까. ⓒ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갈무리

작은 행복도 꿈꾸기 힘든 현실

새벽 4시 23분.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이다. 함께 밤을 새우고 있는 친구들은 5명이다. 기자 또는 피디가 되기를 바라는 우리는 성실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체득하며 살아간다. 최종 면접에서 떨어져도 ‘자신’의 부족을 찾는 데 익숙하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란 거창한 게 아닌데, 이 지독한 취업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독해져야 한다. 비단 언론 지망생만의 얘기가 아니다. ‘몇백 대 일’의 경쟁률에 놓인 모든 청년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협동 대신 경쟁의 논리만 주입받고 살아온 우리가 실패를 ‘자신의 탓'이라고 하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남 탓을 하게 되면 수남처럼 죽고 죽이게 될 수도 있으니까. 다만 이 땅의 모든 청년이 한 번쯤은 ‘남 탓’을 했으면 한다. ‘몇백 대 일’의 경쟁률에 떨어지는 게 어떻게 내 잘못이냐고. 한 달에 20만 원도 못 받는 게 무슨 인턴이냐고. 청년 수당이 어째서 포퓰리즘이냐고. 노동에는 왜 그렇게 많은 차별이 존재하느냐고. 당장 눈앞의 사람에게 말고, 바로 옆 사람과 손을 잡고 보이지도 않는 거대한 적들이 겁을 먹도록.


편집 : 이명주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