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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박은 평등해야 한다
[단비발언대] 여성노동권을 바라보는 눈
2015년 10월 23일 (금) 22:38:32 기민도 기자 kmdwhat1@naver.com
   
▲ 기민도 기자

외박은 평등하지 않았다. 나의 외박은 ‘신고제’였으나, 누나의 외박은 단 한 번도 승인된 적 없는 ‘허가제’였다. 위험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럼 나는 내 놓은 자식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외박권’을 누리기 위해 반항심을 구겨 넣었다. 잠들기 직전에 이불 위로 고개만 내놓고 나누는 친구와의 대화에는 낭만이 있었다. 어차피 다음 날 다시 올 친구 집, 외박이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누나는 학창시절, 낭만적이고 편리한 외박을 누리지 못했다.

영화 <카트>를 보면서 <외박>을 떠올렸다. 김미례 감독의 독립다큐 <외박>에는 <카트>에 등장하는 홈에버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등장한다. <외박>은 <카트>처럼 ‘점거’가 중심이 된 영화가 아니다. <외박>에는 노동자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갈등이 드러난다. 그녀들은 매장을 점거하고 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해 외박을 해야 했다. 외박을 위해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고 남편과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 땅의 여성들은 어렸을 때는 부모님에게,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외박권’을 통제받아야 하는 것이다. 남성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 때는 아내들에게 ‘응원자’의 역할이 부여된다. 쌍용자동차 77일의 옥쇄파업을 다룬 다큐 <저 달이 차기 전에>나 <당신과 나의 전쟁>에는 “설거지하기가 힘들어 죽겠다”며 집으로 남편의 손을 끌고 가는 아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외박하면 이혼할 것”이라 말하는 아내들도 없었다. 외박허가는 홈에버 비정규직 여성들이 실제로 겪었던 일이다.

   
▲ 즐거운 '외박'을 감행하는 여성노동자들. ⓒ 다큐 <외박> 공식 블로그

2007년 홈에버-뉴코아 여성비정규직 투쟁은 ‘여성노동권’ 이슈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여성들은 성희롱이 난무하는 작업장에서 일을 했다. 가장 역할을 하는 여성들이 많은데도 반찬값 벌려고 나왔다며 낮은 임금이 정당화됐다. 여성노동자들은 직장에서의 노동이 끝난 뒤에는 집안일을 해야 했다. 기존의 ‘자본 vs 노동’ 관점으로는 포착하지 못했던 여성들의 ‘특수성’이 드러났다. 감정 노동을 하는 서비스업 대부분은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었고, 저임금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캐셔’들을 관리하는 관리자들은 남성들이었다. 직종과 직위가 성별화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캐셔들은 외모, 머리스타일, 립스틱 색깔까지 지적받아야 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반인권적인 규율로 인해 기업은 이윤을 얻었다. 여성을 차별함으로써 노동시장구조는 지탱될 수 있었다. 특수하지만 보편적인 문제 제기는 수많은 시민단체들을 점거 중인 매장으로 불러들였다. 노동단체와는 거리가 있었던 여성단체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홈에버 투쟁은 남성노동자를 기준으로 해 온 ‘노동권’에 여성의 목소리가 담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외박>에는 민주노총 위원장이 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을 ‘아줌마’로 불렀던 장면이 나온다. 여성노동자들은 위원장에게 여성들도 동등한 노동자라며 당당하게 문제제기를 한다. 여성노동자들의 당당함은 자신들이 비정규직 문제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홈에버 투쟁은 패배했고, 수많은 문제제기는 제도로서 자리 잡지 못하게 됐다.

노사정위원회위원들이 ‘노동개혁’ 합의 후 찍은 사진을 봤다. 노사정위원회를 비판했던 청년단체들의 주장이 이해됐다. 청년을 위해 노동개혁을 해야 한다는 노사정위원회에 정작 청년대표는 없었다. 사진을 다시 봤다. 비정규직노동자를 대표하는 사람도 없었다. 노동자대표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한국노총 위원장 한 명뿐이었다. 사진을 더 꼼꼼히 살폈다. 10명 중 1명만 여성이었다. 비정규직을 대표하는 사람은 아예 없고, 여성과 노동자를 대표하는 사람은 한 명뿐인 노사정위원회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문제를 제대로 논의 할 수 있었겠는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영화 <암살>의 안옥윤이 필요하다. 안옥윤처럼 복수를 대신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주식을 사고 팔면서 경영권이 수시로 바뀌는 경제구조에서 특정대상에 대한 복수는 의미를 갖기 어렵다. 홈에버 사태를 일으킨 이랜드 박성수 회장은 2008년 홈에버를 홈플러스에 매각했다. 최근에는 테스코가 홈플러스를 사모펀드 MBK에 팔았다. 이제 박성수 회장은 홈에버와 상관없는 인물이 돼버렸기 때문에, 여성노동자들이 그에게 복수를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 이들에게 안옥윤이 필요한 이유는 현실을 포기 않는 삶의 자세 때문이다. 안옥윤은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조선 민중들의 해방을 위해 총을 들었다.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 성희롱, 육아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책을 요구할 싸움꾼이 필요하다. 노사정위원회에서 세계여성단체협의회장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암살>의 하와이 피스톨이 안옥윤에게 물었다. “이런다고 해방이 오냐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에겐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말했던 안옥윤이 필요하다.

노사정위원회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반영한다. “1의 노동자, 3의 경영자, 6의 정부.” “0의 청년, 10의 장년.” “1의 여성, 9의 남성.” 엄연한 현실이다. 노사정위원회 멤버가 실질적으로 평등해져야 한국사회가 당면한 노동문제들이 종합적으로 논의되고 개선될 수 있다. 노사정위원회가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한국사회가 평등해져야한다. <외박>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외박’은 비장하지 않았고 유쾌했다. 매장에는 트로트 가락이 울려 퍼졌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여성노동자들 스스로가 ‘미래를 위해 싸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안옥윤’이 돼야 2007년 ‘계기’로만 그쳤던 여성노동자들의 요구를 사회적 제도로 만들 수 있다. 외박은 평등해야 한다.


 

[기민도 기자]
단비뉴스 환경부 기민도입니다.
비관하며 낙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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