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고은 기자

▲ 박고은 기자

영국 임페리얼칼리지 런던의 에르코 아우티오(Erkko Autio) 교수는 세계 최고의 교육수준과 인적자원을 자랑하는 핀란드가 혁신적 벤처기업을 키워내지 못하는 현상을 ‘핀란드 패러독스’라고 불렀다. 핀란드 정부는 국가 법인세수 중 25%를 낼 만큼 경제적 비중이 압도적이었던 정보통신기업 노키아에게 국가적 지원을 몰아주었다. 반면 새로운 도전에 나선 스타트업(신생기업)들은 변변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고전하거나 사라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노키아가 애플, 삼성에 밀리자 다른 성장 동력이 없던 핀란드 경제는 2009년 마이너스 8.3%라는 최악의 성장률을 보이며 추락했다. 소수의 거대기업에 ‘몰빵’한 대가였다.

같은 의미에서 우리도 ‘코리아 패러독스’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역대 정부가 소수의 재벌을 집중 지원한 결과 대기업으로의 경제력집중이 심해지고 중소기업과 벤처는 피폐해진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 연장선에서 박근혜 정부는 일자리 창출의 돌파구도 대기업에서 찾겠다는 접근법을 보이고 있다. 지난 15일 타결된 노사정 노동개혁안 중 임금피크제는 대기업 중장년 노동자의 인건비를 줄여 청년 고용을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이는 중장년과 청년 중 한쪽의 일자리가 늘면 다른 쪽이 줄어드는 ‘대체관계’를 전제한 것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내외 기관의 연구는 이 같은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내노동자 중 고작 12% 정도를 고용할 뿐인 대기업들의 ‘협조’를 애걸하면서 이 제도를 도입하면 청년 일자리가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처럼 말하고 있다.

미국 카우프만 재단의 연구결과를 보면 이런 정부의 기대는 매우 비현실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1977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에서 창업한 기업들은 해마다 3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한 반면, 기존 기업들은 이 기간 중 매해 100만 개의 일자리를 파괴한 것으로 나타났다. 창업기업은 5년 내에 전체 인력의 80%를 고용하지만, 대기업이 된 후에는 자동화와 구조조정 등을 통해 일자리를 줄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청년들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려면 재벌과 공기업 등 큰 회사들에 매달릴 게 아니라 중소기업과 신생기업이 쑥쑥 성장할 수 있도록 산업생태계를 바꾸어야 한다. 정부가 그토록 희망을 걸고 있는 대기업들이 실제로는 정규직을 편법 사내하청 등 ‘질 나쁜 일자리’로 돌리거나 정리해고로 일자리 자체를 줄이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 핀란드의 벤처기업 로비오가 개발한 모바일 게임 '앵그리버드' ⓒ 로비오 코리아

그러니 청년 일자리를 만들고 싶다면 박근혜 정부가 공약했다가 슬그머니 밀어놓은 ‘경제민주화’를 진짜, 제대로 추진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협력업체의 납품단가를 후려치고, 공들여 키운 인력을 빼가고, 계열사 일감몰아주기로 경쟁 중소기업을 고사시키는 대기업의 횡포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은 청년들이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벤처기업들이 죽기 살기로 개발한 기술을 대기업이 탈취해가는 기막힌 관행 등을 뿌리 뽑지 못한다면 구글, 페이스북 등 기술벤처가 엄청난 속도로 일자리를 만들며 세계 1위를 향해 성장하는 것은 영영 남의 나라 이야기에 그칠 것이다.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에 나선 노키아는 놀라운 결정을 내렸다. 어쩔 수 없이 해고한 직원 한 명마다 약 3700만 원의 창업자금과 기술훈련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기술력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던 노키아 해고근로자들이 이런 후원을 받아 하나 둘 창업에 나서자 핀란드의 창업 생태계는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았다. 여기에 핀란드 정부도 신생기업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펼치면서 인기게임 ‘앵그리 버드’의 로비오, ‘클래시 오브 클랜’의 수퍼셀 등 글로벌 스타들이 속속 탄생했다. 뒤늦게나마 ‘패러독스’를 극복해가고 있는 핀란드는 여전히 ‘대기업들에게만 좋은 나라’인 한국이 꼭 되새겨야 할 교훈을 들려준다. 소수 대기업뿐 아니라 다수 중소기업과 창업기업도 기를 펴고 커갈 수 있게 만들어야만 경제성장도, 일자리 창출도 가능하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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