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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팅 팟, 샐러드 보울 그리고 토마토 수프
[씨네토크] 영화 '셀마' 리뷰
2015년 08월 08일 (토) 22:58:17 강명연 기자 unsaid@naver.com

이민자들이 모여들던 건국 초기의 미국사회는 ‘멜팅 팟(Melting pot)’으로 불렸다. 다양한 문화를 가진,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하나의 ‘미국문화’로 녹아든 인종의 용광로라는 뜻이다. ‘멜팅 팟’은 다양한 문화적 특성을 무시하고 획일성을 강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안으로 등장한 용어가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다. 하나의 그릇 안에서 다양한 재료들이 각자 고유한 맛을 내면서 조화를 이룬 샐러드에 비유한 단어다. 현재 미국은 ‘샐러드 보울’ 문화를 지향한다. 

지금은 다원주의가 일반화된 미국에서 흑인문화가 다양성의 범주에 들기까지 흑인들의 눈물겨운 고통과 저항이 있었다. 1965년 ‘셀마 몽고메리 행진’은 대표적인 흑인저항운동 중 하나다. 영화 <셀마>는 흑인들이 실질적 투표권을 부여한 법안을 통과시키기까지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영화 <셀마>는 흑인들이 실질적 투표권을 부여한 법안을 통과시키기까지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 <셀마> 스틸 이미지

구별되지만 평등하다? 일상화된 차별 

1960년대 미국사회에서 흑인 차별은 흑인과 백인을 구별하는 것일 뿐 평등의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논리에서 출발했다. 이른바 ‘구별되지만 평등하다’는 1896년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 판결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버스 등의 교통수단과 식당에는 백인과 흑인의 좌석이 구별돼 있었고 공립학교도 흑인 학교와 백인 학교로 분리되어 있었다. 대법원은 흑인과 백인의 구별을 당연시했던 판례를 뒤집는 판결을 내렸다. 1954년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 판결에서 공립학교가 인종을 분리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고 선언한 것이다. 분리된 교육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는 판단이었다. 

브라운 판결은 미국에서 흑인 인권 신장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신대륙에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은 1862년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면서 법적으로는 자유를 얻었지만, 일상화된 흑인 차별 속에서 평등권, 투표권, 신체의 자유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인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흑인들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비로소 차별이라는 미국사회의 불합리한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2차대전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대통령령으로 인종분리를 고수했던 군대에 인종평등정책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대통령령을 시행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흑인들은 여전히 흑인 차별을 하는 미국사회를 마주하고 분노하기 시작한 것이다.

   
▲ 1960년대까지 남부 흑인들은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당시 미국사회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 <셀마> 스틸 이미지

‘피의 일요일’, 흑인인권운동의 정점

영화 속 주인공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 흑인 인권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그는 1955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의 백인 좌석에 앉은 사건을 계기로 조직적인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주도한다. 흑인 차별은 흑백 구분만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 흑인들은 법적으로 투표권이 있었지만 남부에서는 아예 투표권을 행사할 수조차 없었다. 영화에서 애니 리 쿠퍼는 유권자 등록을 하기 위해 셀마 법원을 찾아간다. 백인 담당자는 애니에게 헌법 전문을 암송하게 하고 앨라배마 주 판사 수를 묻는다. 애니가 67명이라 답변하자 담당자는 67명의 이름을 대라고 윽박지른다. 애니는 유권자 등록을 거부당하고, 투표권은 자동 박탈되었다. 당시 미국사회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마틴은 린든 존슨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법적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말한다. 대통령은 법이 명시한 국민의 기본적 권리에는 관심조차 없고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총력전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그 사이 KKK로 대표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은 흑인을 대상으로 테러를 저지른다. 백인 유권자가 선출한 백인 공직자는 이들의 범죄를 묵인한다. 드물게 재판을 받는다 해도 백인뿐인 배심원들은 이들을 방면한다. 법은 흑인의 생명을 보호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공권력이 흑인을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 흑인 인권운동을 이끌었다. ⓒ <셀마> 스틸 이미지

1차 ‘셀마 몽고메리 행진’은 ‘피의 일요일’이라 불린다. 행진은 3주 전 인권 시위 도중 경관의 총에 맞아 사망한 지미 리 잭슨 사건에 대한 항의와 투표권 보장을 위한 주지사 면담을 요구하며 비폭력적으로 진행됐다. 평화시위대를 대상으로 주립 경찰대는 곤봉과 최루탄으로 공격했고 숱한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장면이 전국에 방송되면서 남부 인종 차별 문제는 미국 사회 핵심이슈로 떠올랐다. 마틴은 국민들에게 행진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했고 2차 행진에는 수천명의 백인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마침내 흑인 인권운동은 정점을 향해 달리게 된다. 

마틴 루터 킹은 1968년 테러를 당해 39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13년 동안의 인권운동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 속 마틴은 끝날 것 같지 않는 흑인 인권운동의 매 순간마다 고뇌하고 좌절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영화는 치과의사 부인과의 불륜도 짚어낸다. 미국 인권운동에서 신화적 존재인 그의 치부는 그의 공적에 흠집을 내려는 듯하다. 하지만 과실을 인정할 때 공로가 더 빛나는 법이다. 무비판적인 신격화를 경계하는 영화의 시선은 그를 더 인간답게 만든다.  

50년 만에 되살아난 셀마 행진

미국이 지향하는 ‘샐러드 보울’이라는 용어가 미국 내 흑인들의 사회적 조건을 온전히 수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흑인들은 여전히 무장한 공권력의 폭력 앞에서 죽어가고 있다. 미국 시민의 권리도 흑인과 백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지난 1일 흑인인권단체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는 셀마에서 40일 동안의 거리 행진을 시작했다. 50년 만에 셀마 행진이 부활한 것이다. 이번 행진은 ‘정의를 위한 미국의 여정’(America‘s Journey for Justice)으로 명명됐다. 지난해 미주리 주 퍼거슨에서는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을 백인 경찰관이 총으로 쏴 죽인 사건을 계기로 시민불복종운동이 일어나 한 달 가까이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최근에 일어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의 흑인교회 총기 난사 사건, 경찰관 총에 맞아 숨진 새뮤얼 듀보스 사건 등 흑인들의 인권 상황은 50년 전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흑인들은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싸워왔지만 2015년 현재까지도 이들의 열악한 지위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 <셀마> 포스터

미국을 나타내는 또 다른 비유로 ‘토마토 수프(Tomato soup)'가 있다. 미국 주류 사회인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문화에 아시아, 아프리카 이주민은 양념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비아냥이다. 토마토 수프에 아무리 양념이나 향신료를 뿌려봐야 토마토 수프 맛인 것처럼 백인을 제외한 이주민들은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백인의 들러리인 유색인종 중에서도 흑인의 삶은 가장 비참하다. 최근 증가하는 흑인 생명경시 사건들은 흑인들이 여전히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조차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낸다. 퍼거슨 사태 때 경찰은 사건을 은폐했고 해당 경찰관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흑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어져왔다. 흑인 가구 평균 순자산은 백인의 10분의1 수준이고 실업률은 백인보다 3배 가까이 높다.

셀마 행진 후 흑인들이 투표권을 쟁취한지 50년이 지났지만, 1963년 모든 인종과 다른 배경을 가진 국민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함께 나누길 바랐던 마틴의 꿈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뿌리 깊은 미국 흑인 차별의 역사는 오히려 퇴보하는 중이다. 미국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해온 흑인 인권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더 많은 미국민들이 ‘정의를 위한 미국의 여정’에 동참하기를 소망한다.


 

[강명연 기자]
단비뉴스 미디어팀 강명연 기자입니다.
강자의 힘은 폭력이지만 약자의 힘은 평등이라 믿습니다.
약자의 편에 서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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