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10분 희곡 낭독 "수요일엔 빠알간 희곡을"

한 관객이 물었다. "프로그램 제목이 왜 '수요일엔 빠알간 희곡을'인가요?". 자큰북스 김해리 대표가 답했다. "수요일은 주말이 전혀 올 것 같지 않은 사막 속에 있는 느낌이래요. 연극이 사람들의 일상에서 오아시스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수요일을 연극으로 아름답게 해볼까 싶어서요."

수요일엔 빠알간 희곡을

월요일에는 월요병이 있다. 월요병이란 주말을 쉬고 다시 일하러 가야 하는 샐러리맨들의 스트레스, 불안과 우울함을 병으로 지칭해 탄생했다. 금요일에는 불금이 있다. 불금이란 불타는 금요일의 약자로 주말을 맞이하며 주중의 끝인 금요일을 즐겁게 보내자는 의미의 단어이다. 우리는 요일에 정체성을 부여하며 삶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줄이려 한다. 같은 맥락에서 김대표의 말처럼 수요일은 사막일지도 모른다. 지치고, 피곤하지만 일은 끝도 없는 망망한 느낌. 김대표는 수요일 사막에 오아시스를 제공하고 싶다. 어떻게? 연극으로.

▲ 수요일 7시 서울연극센터 1층의 모습. 간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희곡을 읽어주고 있다. 관객은 마음에 드는 곳에 앉아 관람하면 된다. ⓒ 견민정

'수요일엔 빠알간 희곡을'은 웹진 [연극in]의 '10분 희곡 릴레이' 작품을 희곡전문 포켓북 출판사 자큰북스와 서울연극센터가 함께 제작하여 올리는 낭독공연이다. 낭독공연이란 책 읽어주는 공연이다. 배우가 연기를 하며 책을 읽어준다는 데에서 일반낭독과 차이가 있다. 서울연극센터 박영도 차장은 "사람들이 연극을 어려워하잖아요. 이 프로그램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잠시 연극을 만나게 하자는 데서 출발합니다. 연극이 편하게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것이죠"라고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했다.

섬세한 낭독으로 상상하게 하는 연극

지난 15일에는 윤현지 작가의 'Bye, June'이 무대에 올랐다. 삼풍백화점 사건을 배경으로 떠난 자와 남은 자의 모습을 작가와 기획자의 대화로 풀어낸 작품이다. 조명이 켜지고 손에 희곡집을 쥔 배우들이 등장하며 극은 시작된다.

삼풍백화점 사고로 엄마를 잃은 여자는 사고 때 세상을 떠난 남자 환영과 마주한다. 여자는 엄마가 자신의 운동화를 사러 백화점에 갔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에 자신이 엄마를 죽였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엄마를 죽였다 말하지 못하는 사실에 자책한다. 그런 여자에게 남자는 말한다. "내가 그 사람을 떠났고 그 사람은 남겨졌고, 나는 그냥, 나 때문에 그 사람이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원래 떠난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이 더 아픈 거니까." 유일한 가족인 누나를 남겨 두고 생을 마감한 남자의 위로였다. 배우들은 활자를 목소리로 바꾸어 글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김성훈 배우는 "낭독공연은 움직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목소리로 표현해 상황을 상상하게 만들어야 해요"라고 부연 설명했다. 설명에 걸맞게 배우들의 섬세한 낭독으로 간이 무대는 때론 횡단보도가 되고 때론 카페가 되었다. 관객들은 극이 진행 될수록 낭독공연에 몰입해 갔다. 우연이었을까. 그날은 세월호 1주기 하루 전날이었다.

▲ 삼풍백화점 사고로 엄마를 잃은 여자와 당시 세상을 떠난 남자. 둘의 대화를 기획자가 보고 있다. ⓒ 견민정

관객 강선구(31)씨는 "공연을 보면서 계속 세월호를 생각했어요. 삼풍백화점 사건이랑 공통되는 부분이 많으니까요.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때의 슬픔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어요. 4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데 오늘 보아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네요"라고 소감을 말했다.

친구의 소개로 오게 되었다는 정연승(34)씨는 "저에게 연극이 생소한 분야라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보다보니 저절로 몰입되었다"면서 "연극이 세월호 1주기 기획인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놀랐고, 오래 지난 사고인데도 여전히 생생하게 공감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이런 슬픈 이야기는 그냥 먼 옛날이야기처럼 들렸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10분.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하나의 완성된 극이 올라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몰입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위로받기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 '관객이 직접 읽는 희곡' 코너에 참여한 관객 김해리씨가 배우와 함께 희곡을 읽고 있다. ⓒ 견민정

신진작가들의 자유분망한 실험무대

직장인 김해리(28)씨는 낭독공연을 자주 찾는다. 예매를 하고 두 시간 이상 봐야하는 공연과 달리 일상적인 공간에서 10분 정도만 투자하면 공연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퇴근 후, 하루의 피로를 풀어내는 좋은 기분전환 도구가 된다. 이날 김씨는 '관객이 직접 읽는 희곡' 코너에 직접 참여했다. 무대에 나가 자신이 읽고 싶은 부분을 배우와 함께 읽었다. 김씨는 "희곡을 읽을 때, 낭독공연을 볼 때, 배우와 함께 읽을 때 모두 느낌이 달랐다"라며 "연극에 참여해 대사를 읽으니 연극에 더 몰입하게 되고 배우가 옆에서 생동감 있게 읽어주니까 상황이 더 실감났어요. 그동안 희곡집을 조용히 읽었는데 앞으로 소리 내어 읽어야 겠어요"라고 참여 소감을 밝혔다.

'수요일엔 빠알간 희곡을'은 신진작가들이 맨 처음 세상과 소통하는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 10분 희곡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리는 작가가 많기 때문이다. 'Bye, June'의 윤현지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가 "어떻게 활동해야 할 지 몰라 애태우는 작가들을 연극판에 데리고 나와 주는 역할"을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동시에 연극인들이 다양한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실험의 장이기도 하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Bye, June', '집에 가고 싶은 사람들', '카페에서의 담론'의 연출을 맡은 정현씨는 "프로그램 자체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무대도 극장이라는 공간에 갇히는 것이 아니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 도서관처럼 꾸며져 있는 서울연극센터 1층. 개방되어 있어 연극에 관한 책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다. 회원가입을 하면 대여도 가능하다. ⓒ 견민정

신진작가들의 희곡을 배우들의 낭독으로 볼 수 있는 '수요일엔 빠알간 희곡을'은 오는 6월 24일까지 이어진다.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는 서울문화재단 홈페이지(www.sfac.or.kr) 또는 연극전문 웹진 [연극in] (http://webzine.e-stc.or.kr)을 참조하면 된다. 사전 예약 없이 관람 가능하며 관람료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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