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종전 40년 사진전 심야토크

“안녕하세요. 서해성입니다. 왜 하필 밤 11시, 이 야심한 시각에 모였을까요? 어른들이 옛날부터 귀신 나오는 시간이라는 자시에 말이에요. 이때는 우리가 현실로부터 자유롭고, 마음속 생각이 자유롭게 떠도는 시간이에요. 여러분, 많은 베트남 분들이 한국군 총부리 앞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분들을 추모하자는 뜻에서 모였습니다. 말하자면 제사를 지내는 거죠.”

지난 29일 오후 11시, 정말 야심한 시각임에도 직장인·영화감독·사진사·대학생 등 20명도 넘는 사람들이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전시장 ‘스페이스99’를 가득 메웠다. 베트남전 종전 40년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을 기념하여 이재갑 사진작가, 한홍구 교수, 전시기획자인 서해성 소설가가 관객과 함께하는 토크쇼를 마련했다. 토크쇼에는 베트남전 참전군인 윤영전(75)씨도 초대됐다.

 

▲ 심야토크 참가자 20여 명이 이재갑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 이성훈

행사를 주최한 평화박물관은 참가자들에게 베트남 맥주 ‘사이공’과 전통과자를 제공했다. 과자는 지난 10일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 양민학살’ 생존자인 응우옌티탄씨와 응우옌떤런씨가 한국인들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 모양새와 맛이 꼭 시골 할머니가 만든 약과를 닮았다.

 

▲ 지난 10일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 양민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씨와 응우옌떤런씨는 한국인들에게 베트남 전통과자를 선물했다. ⓒ 이성훈

한홍구 교수는 “참전용사들이 전시하기도 전에 ‘홍보’를 열심히 해주시는 바람에 전시회가 예상 밖에 입소문을 탔다”며 우여곡절을 소개했다. 이재갑 작가는 “한국사람들이 정말 알아야 할 것들을 말해보자”며 참전군인과 대화를 시작했다.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이 너무나 다르다

“베트남 곳곳에는 60개가 넘는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어요. ‘하늘까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증오비에 새겨진 이 구절은 자장가로도 불리며 남조선에 대한 원망으로 남아있습니다.”

 

▲ 광아이성 빈선사 빈호화 증오비. 증오비는 베트남 전역에 60여 개가 있으며, ‘하늘까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등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 사진작가 이재갑

이재갑 작가는 먼저 베트남 곳곳에서 만난 ‘증오비’, 그리고 베트남인들의 기억 속 베트남전을 이야기했다. 베트남에서는 전사의 죽음은 열사비를 세워 모시고, 민간인의 죽음은 사망한 자리에 위령비를 세운다. 현장을 전부 흙이나 풀로 덮지 않고, ‘숨구멍’을 터놓는다고 한다. 혼백이 무덤을 오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지금도 베트남 인들은 하루를 시작하고 끝맺을 때마다 증오비나 추모비 앞을 지나가며 절을 한다”며 “죽음의 기억이 일상과 함께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 작가는 한국군이 양민을 학살하고 현장을 처리하는 방식을 고발했다.

“생존자에 따르면 한국군은 사살 현장을 하루 꼬박 지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튿날엔 불도저를 끌고 와 시신까지 통째 밀어버렸답니다. 범죄를 숨기려 한 거죠. 시신을 찾아야 추모할 수 있다고 믿는 베트남인들에겐 큰 모욕입니다.”

전기기획자인 서해성 작가는 한국사회에서 베트남전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말했다.

“전국에 월남전 기념비가 100개 정도 있는데 위령비와 추모비는 제주도와 강원도에 각각 하나뿐입니다. 죽음이 폐기처분되고 있는 거죠.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에도 모두들 무감각하고 휴머니티를 상실한 탓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산 자의 의무입니다.”

그러자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 소속 참전군인이었던 윤영전씨가 당시 상황을 부연 설명했다. 윤씨는 당시 파견군이 양민학살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베트콩과 민간인의 피아식별이 안 됐고 동료가 죽어 복수심에 불탔을 것”이라며 조심스레 접근했다.

“어떤 부대는 베트콩 시체를 찢어서 차에 매달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특히 청룡부대와 맹호부대는 낯선 지형과 베트콩의 기습작전에 당해 사상자가 3천 명에 이르렀어요. 다들 전쟁의 광기에 휩싸였습니다.”

이재갑 작가도 참전군인이 처했던 상황에 공감을 표했다.

“피아 구분이 안 되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정규군은 제복을 입지만 그게 없는 베트콩은 마을로 쏙 들어가면 민간인과 구분이 안 됐겠지요.”

그러자 한홍구 교수는 손사래를 쳤다. 그는 100년 전 일본군이 동학농민군 소탕을 구실로 양민 30만 명을 학살한 사례를 들면서 베트남에서 저지른 양민학살 역시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피아 구별이 안 된다는 변명은 일본군도 했습니다. 독립군도 군복이 없었어요. 그러자 일본군은 농기구를 든 농민도 독립군으로 덧씌워 모조리 죽였습니다.”

‘참전용사’들은 왜 ‘가스통할배’가 되었나

한 교수는 '참전용사' 대부분이 ‘무슨’ 전쟁에 ‘왜’ 참여하게 됐는지 모른다고 했지만 민간인 학살을 몰랐을 리는 없다고 말했다.

“한국군이 학살한 베트남인은 5천 명 정도입니다. 베트남 전쟁에는 청룡∙맹호∙백마 세 전투부대가 참여했는데 이들 모두가 가해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도 양민학살에 대해서 소문은 들었을 겁니다.”

 

▲ 이재갑 작가에 따르면, 응우옌반찐(참전군인·푸옌성 뚜이호아시, 왼쪽)씨는 ‘진정한 군인은 무장하지 않은 상대를 죽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안하이사 프억동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흐우크엉(오른쪽)씨는 촬영 당시 한국인은 40년 만에 처음이라며 경계했다고 한다. ⓒ 사진작가 이재갑

가만히 듣고 있던 참전군인 윤 씨가 설명을 덧붙였다.

“베트남전은 10년 간 33만 명의 한국군이 참가한 전쟁이었습니다. 귀국을 하고 싶어도 1년을 채워야 했고요. 한국군 사망자는 5860명으로 알려졌습니다. 베트남에선 한국도 미국의 희생자라는 말이 떠돌았지요. ‘돈 때문에 파병갔다’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듣는데 실제로는 장교나 보급업자 말고는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서해성 작가는 인간 기억이 왜곡되는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했다.  
 
“기억이 무서운 이유는 기득권의 기억이 나의 기억을 지우고 다른 기억으로 아름답게 재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 사회가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이 성숙하지 못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서 작가는 가스통할배들의 ‘땡깡’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전쟁이 무서운 이유는 병영생활이 고작 1년일지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기 때문입니다. 가스통할배들이 ‘아동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땡깡’을 부리는 심리의 기저에는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의 양민학살 피해여성은 울면서 “내가 한국을 찾으면 당대 군인들이 손을 마주잡고 미안하다며 사과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반성은 하지 않고 국기 게양을 애국심 고취와 연결시키는 등 국가가 애국을 강요하는 것은 맹목적 애국주의에 가깝다. 같은 전쟁을 다른 시각으로 기억하게 하는 이 전시회는 그런 점에서 뜻 깊은 행사다. 기억을 성숙하게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생각하는 공감이란?

“틀림없이 하나의 행위인데 왜 기억은 두 개일까요? 전쟁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기억과 통해야 합니다. 전쟁은 분명 피해자와 가해자를 만듭니다. 둘이 만날 때 기억은 비로소 휴머니티를 회복합니다.”

서해성 소설가의 말에 이재갑 사진작가는 “예술가에게 공감이란 나와 다른 의견과 소통하면서 삶의 답을 찾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세상이 준 답을 벗어나려면 불편하고 손해를 보지만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알아주는 분들의 후원과 응원 덕에 이 일을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교수는 ‘고통의 연대’를 강조했다.

"평화박물관에선 ‘아프냐, 나도 아프다’고 농담을 합니다. 베트남진실위원회를 시작하던 10년 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다시는 전쟁 피해자가 없기를 바란다며 종잣돈을 보탰죠. 이것이 ‘고통의 연대’입니다." 

 

▲ 참전군인 윤영전(오른쪽)씨가 '평화통일'이라고 직접 쓴 필묵을 펼쳤다. ⓒ 이성훈

토크쇼를 마쳤을 때 시계는 어느덧 새벽 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귀갓길이 막막할 법도 한데 참가자들 얼굴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일본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역사왜곡에서 한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전시회의 주제의식에 공감하는 듯했다. 최택함(32‧인천)씨는 “언론은 편파적이고 역사는 왜곡되고 있다”며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렇다”며 안타까워했다.

사회복지사 이정아(30·여·인천)씨는 “우리나라 군인이 다른 나라 국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며 “교육받지 않은 청소년들은 우리의 범죄를 기억할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직장인 장향미(27‧여)씨는 “학살이 있었다는 것도 작년에야 알았다”며 “사진촬영 하나에도 이만큼 역사성과 진실된 마음이 담긴다는 사실에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이재갑 작가는 마지막으로 다른 작품들이 걸릴 빈 벽을 어루만지며 다음 전시회의 방향을 예고했다.

“사진 속 인물들이 희생자로 보이지만 그들도 실은 평범한 농부였고 한 가정의 아버지였습니다. 다만 구조적∙시대적 비극 때문에 투사가 되었습니다. 다음 작품은 전쟁 이전의 일상과 평온한 삶을 담고 싶습니다. 피해자든 참전용사든 누구든 마찬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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