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은 비주류의 반란, 독립출판

퇴사 경험담, 아파트 추억담…책이 안 되는 게 없네

오지혜(30)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우연히 출판 관련 강의를 들었다. 책 만드는 과정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대학생 때 여행하면서 쓴 글을 다듬어 에세이집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직접 표지디자인과 편집•인쇄 작업까지 하며 책을 만들었다. 작은 서점에 입고됐고, 독자도 생겼다. 두 번째 직장을 나오면서 했던 고민도 책으로 썼다. <두 번째 퇴사>를 쓴 오씨는 벌써 두 권을 낸 ‘저자’가 됐다. 얼마 전에는 서점에서 독자들과 만나는 시간도 가졌다.

구제역 파동 때 돼지 살처분 장면은 디자이너 김성라씨에게 큰 충격이었다. 한동안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돼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돼지섬>이라는 그림 작업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2년 전부터 주변사람들을 모델로 돼지그림을 그렸다. 책으로 엮어 더 많은 이들과 작품을 나누고 싶었다. 김씨는 “제작하고 유통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재미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표지. ⓒ 저자 블로그

서울 둔촌동 주공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이인규(34)씨는 재건축이 결정되자, ‘고향’의 추억마저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이씨에게 아파트는 잿빛이 아닌 다양한 빛깔을 품은 추억의 장소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아파트에 관한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이씨는 “아파트라는 곳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추억을 공유한 이들이 작업을 도왔고 6개월 만에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펴냈다. 첫 호는 500부를 찍었고, 반응이 좋아 ‘세 번째 이야기’는 1천부를 발행했다.

독립출판에 쏠리는 관심

기존 출판관행에서 벗어나 ‘내 책’을 직접 만든 사람의 책들은 일반서점이 아닌 독립출판 서점에서 찾을 수 있다. 독립출판은 ‘자가출판’(self publishing)을 비롯해 기성출판사와 다른 방식과 시각으로 책을 펴내는 소규모출판사들을 아우르는 비주류 출판문화를 뜻한다.

독립출판물을 다루는 서점은 최근 몇 년 간 부쩍 늘어 전국에 40여곳이 생겼다. 2009년부터 해마다 열리는 대표적인 독립출판 축제 ‘언리미티드에디션’의 흥행성적도 눈여겨볼 만하다. 행사를 준비한 서점 ‘유어마인드’ 운영자 이로씨에 따르면 지난해 8천여명이 찾아와 1만8천여권을 사갔다. 5천여명이 다녀간 전년도에 견주면 의미 있는 변화다. 첫해에 900여명이 찾아왔던 데 견주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올해는 11월에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런 흐름을 반영하듯2월 25일부터 3월 31일까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독립출판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다. 전시에 소개된 잡지와 단행본은 400여종 600여권. 지금까지 출간된 독립출판물을 한자리에 모았다. 전시를 기획한 김명수 큐레이터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독립출판 전시가 열렸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며 “도서관의 십진분류법과 서점 분류방식을 혼합한 독립출판물만의 새로운 분류법을 적용했다”고 말했다.

▲ 2월 25일부터 3월 31일까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독립출판 특별전이 열렸다. ⓒ 장환순

미(美)의 기준에 반기를 드는 등 다양한 내용이 장점

관람객들은 진열된 잡지와 단행본을 자유롭게 읽었다. 독립출판 서점을 즐겨 찾는 김수연(24)씨는 “서점에는 절판되거나 품절된 책이 많은데, 구하기 힘든 여러 종류의 책을 볼 수 있었다”며 만족스러워 했다. 공공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강희진(33)씨도 “평소 못 보던 다양한 잡지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는 점은 독립출판의 가장 큰 매력이다. 라면을 탐구하거나, 헌책 수리방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연필깎이에 몰두하는 등 기성출판사가 펴내기 힘든 독특한 주제의 책이 많다. 청년들의 고민을 담은 잡지부터 대중문화•예술 비평서에 이르기까지 영역은 매우 넓다. 성소수자이슈를 다루거나 미(美)의 기준에 반기를 드는 등 사회통념을 흔드는 잡지나 비•정기 간행물도 나온다. 김명수 큐레이터는 “다양한 콘텐츠야말로 독립출판에 주목해야 할 이유”라고 말한다.

독자와 작가의 경계가 멀지 않고 소통이 자유롭다는 점도 특징이다. <돼지섬>의 저자 김성라씨는 며칠 전 포항 ‘달팽이책방’ 주인한테 기쁜 소식을 들었다. 책방에서 <돼지섬>을 보고 간 한 초등학생이 한주 뒤 용돈을 모아 책을 사갔다는 얘기였다. 김씨는 주인에게 부탁해 ‘어린 독자’의 사진을 받았고, 조만간 돼지드로잉을 선물할 계획이다. 김씨는 “제작자와 책을 보는 사람, 서점의 거리가 가깝다는 게 독립출판의 매력인 것 같다”고 말했다.

국내에 독립출판이 싹트기 시작한 건 6~7년 전이다. 홍대주변에 독립출판 서점이 하나둘 문을 연 시기와 맞물린다. 출판기술이 진화하면서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도 제작이 가능해졌다. ‘POD’(Publish On Demand)라 불리는 소량출판시스템의 등장은 출판 진입장벽을 낮추는 결정적 구실을 했다. 정준민 전남대 교수(문헌정보학과)는 “출판기술이 발달하면서 인쇄비용이 절감됐고 책 품질도 좋아졌다“며 ”이런 변화가 독립출판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 서울 통의동에 위치한 독립출판 서점 더북소사이어티. ⓒ 장환순

젊은 세대의 표현욕구 분출 통로

대학문화가 쇠퇴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청년들의 표현욕구가 다른 방식으로 분출된 형태라는 분석도 있다. 동양대 교양학부 박해천교수는 “대학이 기업화함에 따라 젊은 세대가 자율성을 누리던 대학 내 공간과 기회들이 학교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며 “소규모 출판물과 관련 서점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199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키노>, <리뷰>, <TTL> 등 젊은 필진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잡지들이 2000년대 들어 힘을 잃고, 주류 출판계의 진입장벽을 넘지 않고도 스스로 출판 할 수 있는 디지털환경이 마련된 것도 영향을 줬다. 박 교수는 “이런 여러 가지 맥락이 맞물려 소규모 출판물이 자리를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며 “기성세대와 다른 젊은 세대의 취향이나 관점 등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성장기를 맞은 독립출판이 하나의 문화영역으로 뿌리내릴 수 있을까? 정준민 교수는 “비주류 정체성에 맞게 지속적으로 소수 목소리를 반영하고 새로운 실험을 해야 한다”며 “양보다는 종을 다양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명수 큐레이터도 “결국에는 지속 가능한 콘텐츠를 만드는 게 관건”이라며 “독립출판인들이 ‘내 목소리’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애초 목적을 재확인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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