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미디어 속 ‘털’의 의미

털이 없어 고민인 사람들

장면 1

▲ '머리 심는 날'의 인범이 면접 도중 이마에 흐른 땀을 닦다 손에 흑채가 묻어있자 공황상태에 빠졌다. ⓒ KBS 드라마 스페셜 <머리 심는 날> 갈무리

신입사원 공개채용 면접 현장. 프랑스인 면접관이 전공으로 불어를 선택한 이유를 묻는다. “현대는 국제적인 시대라….” 어찌나 긴장이 됐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나도 모르게 쓰윽 땀을 닦아내는데, 아뿔사! 이 젊은 나이에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M자형 탈모를 가리기 위해 뿌린 흑채 녀석이 손에 까맣게 묻어 나온다. ‘이마에 흑채가 묻어 버렸나?’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대머리 면접관을 보니 머리가 어지럽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아, 이번 면접도 망했구나. (KBS 드라마 스페셜 <머리 심는 날>의 인범)

장면 2 

▲ <풍문으로 들었소>의 정호가 뽑힌 머리카락 뭉치를 보고 경악하기 일보 직전이다. ⓒ SBS <풍문으로 들었소> 갈무리

상견례 자리. 거지나 다름없는 사돈네의 큰딸 취업과 사돈네 전원생활까지 우리가 지원하겠다는데 감히 아들놈이 나한테 슬프고 부끄럽단다. 사돈이 우리 근처에 얼씬대지 못하도록 돈으로 기 죽인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앞에 있던 밥상을 날려버리고 아들놈을 잡으려 난간에 한쪽 다리를 넘겼는데 생각보다 난간이 높다. 어중간하게 걸쳐진 내 중요한 그곳이 쓸린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순간, 사돈이 내 머리채를 잡는다. 방으로 피신한 나에게 아내가 ‘터진 것 아니냐’며 그곳 안부를 묻는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빗을 꺼내 머리를 빗어본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 피눈물이 난다. 아, 탈모만 아니면 나는 완벽한데!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의 정호)

장면 3

▲ '털'의 운도가 풍성한 가슴털이 자라길 바라며 발모제를 조심스레 바르기 시작한다. ⓒ 장준환 감독 <털> 갈무리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김대리와 놀아나는 것은 왜일까? 다른 사람에겐 있는데 나에겐 없는 것. 가슴 털! 털이 없는 운명은 가혹하다. 털은 사랑이고 권력이며 철학이다. 오늘도 발모제를 가슴에 치덕치덕 발라본다. (장준환 감독 단편영화 <털>의 운도)

세 사람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에 비해 ‘털’이 좀 없다는 것이다.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처절하다. 우연히 목격한 여자친구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찍어 모발이식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협박하거나(인범), 체면 불구하고 수시로 탈모 방지 마사지 빗을 두드리고 두피 마사지를 하며(정호), 한꺼번에 여러 발모제를 사용하다 부작용에 고생하기도 한다(운도).

도대체 털이 뭐길래?

남자의 털은 곧 생명력이다. 괴력을 가진 삼손이 삼손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머리털에 있고, ‘내 목은 자를 수 있지만, 내 머리카락은 절대 자를 수 없다’던 최익현에게 머리털은 나라의 생명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도 남성의 머리털은 힘찬 활력, 생명력, 고도의 지력 등을 의미한다. 남자에게 털이란 태양빛을 향해 땅을 뚫고 올라오는 풀과 같은 강한 힘,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털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본능에 가깝다.

털은 삶의 질까지 좌지우지한다. 탈모 완치 약을 개발하는 사람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부자가 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탈모는 심각한 고민거리다. 실제 탈모 증상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탈모자체만으로도 자신감이 떨어지고 우울증이 심해져 삶의 질 마저 저하된다. 한국방송(KBS) 드라마 스페셜 <머리 심는 날>의 인범처럼 탈모가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의 무의식을 구성하고, 의식의 질서를 교란해 얼굴이 굳어진다든가 목소리가 떨리고 말문이 막히는 등 여러 가지 징후가 나타날 수도 있다.

털이 생기면 문제가 해결될까?

<머리 심는 날>의 인범은 어찌어찌 돈을 모아 모발이식에 성공한다. 이제 ‘이마에 땀이 흘러도 자신 있다’며 의기양양해 한다. 하지만 다음 면접 현장에서 날카롭게 쏟아지는 면접관의 질문에 말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그 곳을 빠져 나온다. <털>의 운도 역시 발모제의 효과로 원하던 가슴 털을 갖게 됐지만 여전히 그녀는 운도가 아닌 김대리와 함께다. 인범이 면접장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며 “머리 때문이 아니잖아.”라고 읊조린 것처럼 모든 문제가 ‘털’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털은 트라우마 그 자체

인범, 정호, 운모 세 사람의 ‘털’ 고민에 어떤 이들은 공감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깟 털이 뭐라고’ 생각하며 웃어 넘겼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털’에 감춰진 우리들의 트라우마를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누군가는 ‘최고만이 살아남는 살벌한 세상 이치가 평범한 우리를 실패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쟁사회 트라우마를 겪고 있으며, 다른 누군가는 ‘자신에게 너무 많은 기대와 바람을 가진 엄격한 아버지로 인해 두려움과 긴장감을 갖고 살아가는’ 아버지라는 트라우마를 껴안고 있다. 수많은 종류의 트라우마가 털에 대한 집착 또는 다른 형태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겪은 실패, 거절, 다툼같이 일상적인 것과 교통사고, 학대, 자연재해 등 우리는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있다. 그 트라우마는 어느 순간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어 나를 괴롭힐 것이다. 그 때 우리는 털이 아니라 트라우마인 과거의 자신과 진지하게 마주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의 본질이 보인다. 당신이 가진 ‘털’은 무엇인가?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