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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 칼럼 > <제5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기꺼이 돌아가련다
[상상사전] ‘길’
2015년 03월 17일 (화) 21:37:13 이유지 sdyouji@naver.com

   
▲ 이유지
병원에 갔더니 간이 부었단다. 병명은 ‘스트레스’. ‘삼포세대’니 뭐니 취업은 갈수록 힘들어질 거라는데 엄마는 얼굴만 보면 닦달을 하고, 아무리 뛰어도 금수저 물고 태어난 갑들과는 거리가 좁아지지 않을 터. 소용없는 상념이 이어지자 또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러니 간이 붓지. 문득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대로 제주도행 티켓을 끊었다.

몇몇 유명관광지 중 ‘올레길’을 선택했다. 조용히 생각 없이 걷고 싶었다. 구석구석 아름답기로 소문난 7코스는 총 14.2km로 너덧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이왕이면 네 시간 안에 정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욕이 넘쳐 열심히 화살표와 리본, 조랑말 표식을 눈으로 좇으며 걷기 시작했다. 쉽게 생각했던 코스였지만 울퉁불퉁한 바위가 가득한 해안가, 잡풀이 우거져 헤치며 지나가야 하는 풀숲 등 생각보다 험한 길도 많아서 시간이 꽤 지체되고 있었다. 심지어 방목된 소를 만나 두려움에 발걸음이 머뭇거려지는 경험도 했다. ‘왜 이런 데 길을 만든 거야?’

숨이 차오를 때쯤 표지석이 나왔다. ‘이제 중간쯤 왔겠지’하고 확인해보니 아직 1/3도 채 안 되는 지점이었다. 굉장히 많이 걸은 것 같은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뒤돌아본 지점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다른 길이 만나는 갈림길의 끝이었다. 내가 온 길은 나뭇가지를 헤치며 건너야 하는 그야말로 밀림이었는데, 다른 길은 단정하게 포장된 아스팔트길이었던 것이다. 지도를 확인해보니 거리상으로도 내가 온 길보다 훨씬 짧아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여태껏 힘겹게 돌아서 왔다는 게 분해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준 리본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네 시간 안에 완주하긴 글렀다. 남들보다 빨리 완주했다는 성취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씩씩대며 반대편 길로 계속 걷던 도중, 뭔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빠르고 편한 아스팔트길에는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도,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빛 줄기도, 큰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소도 없었다. ‘아! 일부러 돌아가게 만든 것이었구나.’

   
▲ 직선으로만 가다가는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큰 길이 아닌 작고 돌아가는 길에서 진짜 자연과 삶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 flickr

마음을 고쳐먹자 그제야 풍경이 들어왔다. 그 뒤로는 기꺼이 돌아가며 더 많은 정경을 눈과 카메라에 담았고 바닷가 우체국에서 1년 뒤 도착하는 편지까지 쓰는 여유를 부렸다. ‘올레’는 제주 사투리로 ‘좁은 골목’을 뜻한다. 어쩌면 나는, 우리는 너무 빠르게만 살아온 게 아닐까? 빠른 것은 부작용을 부르기 쉽다. 사람을 놓치는 경제도, 인성을 놓치는 조기교육도 성급함이 가져다 준 결과였다.

직선으로만 가다가는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큰 길이 아닌 작은 골목길에서 오히려 진짜 자연과 삶의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그날, 완주하는 데 10시간이 걸렸지만 어쩐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조금 늦으면 어때. 더 멋진 장면들을 기억 속에 저장할 수 있었는데… 훗날 누가 ‘그 길이 어땠는지’ 묻는다면 말하리라. ‘돌아가는 길이어서 아름다웠노라’고.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5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이 글을 쓴 이는 부산대 국어교육과 4학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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