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촌이슈] 제천 의병의 발자취를 따라서

"이놈, 모든 장졸들뿐만 아니라 애비도 홑옷을 입고 이 겨울을 나는데 자식인 네가 솜옷을 입고 있으니, 이것은 군율을 어긴 것이며 군심을 동요시키는 것이니 용서할 수 없다."

의병장 이강년 선생은 1908년 정월 초하룻날 영평에서 장병들로부터 신년 인사를 받았다. 선생의 장남 승재도 장병들과 함께 세배를 올렸다. 선생은 세배를 받고 보니 아들이 다른 장병과 달리 솜옷을 입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 호통쳤다. 아들의 목을 베라는 선생의 호령에 모든 장졸은 이를 만류하고, 아들은 당장 솜옷을 벗고 막사 아래에서 사흘간 빌었다고 한다.’ (이태룡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4>)

여름용 홑옷을 입고 집을 나선 의병대는 겨우내 솜옷 한 벌 없이 눈 쌓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대장의 차림도 병사들과 다를 바 없었다. 1129일 제천참여연대가 주관한 길 위의 인문학은 제천의병이 걷던 길을 찾는 역사기행으로 진행됐다. 세명대 구완회 교수가 참가자들을 인솔해 충북 제천시 한수면과 충주시 살미면 일대 의병전적지를 찾았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답사팀도 의병이 걷던 길을 함께 걸었다.

관찰사 셋, 군수 여섯을 처단하다

▲ 세명대 구완회 교수가 '제천의병'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 계희수

제천의병은 크게 두 번 봉기했다. 전기에 일어난 의병은 위정척사 사상의 연장선에 있어 척사의병또는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어나 을미의병이라 부른다. 양평에서 포군들을 이끌고 내려온 젊은 선비들은 영월에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주장하던 유인석에게 의병장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처변삼사란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의병을 일으키는 것, 망명하는 것, 자결하는 것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당시 유인석은 오십대로 다른 의병장에 견주어 나이가 많고 상중이라는 이유로 사양하다 결국 의병장을 수락해 호좌의진(湖左義陳)을 만들었다. 호좌의진은 호서(충청도)지역 왼쪽에 있는 의병이란 뜻이다.

유인석은 복수보형(復讎保形)을 내걸고 8도에 격문을 띄웠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전통을 보존하자는 뜻이다. 의병장으로 취임한 그는 항일의병 전투를 일으켜 단양군수 권숙, 청풍군수 서상기 등 친일개화파 관리들부터 참수했다. 이후 제천의병은 관찰사 세 명과 여섯 명의 군수를 처단했다.

일개 의병부대가 친일파 관료들의 목을 자르며 국가권력에 맞선 것이다. 제천의병은 친일파 처단이 옳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해 다른 의병들과 갈등이 빚기도 했다. 전기 제천의병은 1896년 남산전투를 마지막으로 제천지역을 토벌군에게 빼앗기고 만다.

의병장에게 씌워진 내란죄

후기 제천의병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폐위를 계기로 봉기했다. 당시 원주에 있던 민긍호가 의병을 일으켰다. 민긍호는 중앙정부의 의견을 따르던 신식군인으로 의병을 진압하려던 사람이었다. 나라가 무너지고 군대가 해산되는데 반발해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군인들이 봉기하면서 신식총이 보급됐다. 비가 오면 쏠 수 없는 화승총으로 애를 먹었던 의병은 신식총을 받아 활동하기 위해 40여 개 의진을 새로 만들었다.

전국의 의병이 제천으로 모였다. 첫 전투는 모래내 지역에서 발발했다. 일본군 1개 소대를 잡기 위해 수천 명 의병이 달려들었다. 일본 정규군과 맞서 군사 5명을 죽이고 1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기록이 있다. 첫 전투에서 이룬 상당한 성과였다. 이전 전투기록을 보면 의병은 군사체계나 작전이 없어 분대 단위 일본군 공격에도 수백 명이 대항했으나 이기기 힘들었다고 한다. 1908년 전후에 전국 10만여 의병 중 약 15천 명이 목숨을 빼앗겼으나 같은 기간 일본군 전사자는 100명을 넘지 않았다.

한말 의병들은 도적떼로 몰리면서도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쳤다. 나라가 없어지자 후기 의병 대부분은 쓸쓸히 죽거나 자결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일본군에 잡혀 재판을 받았다. 조선의 사법권을 쥐고 있던 일본은 의병에게 강도죄, 강도살인죄, 살인교사죄 등의 혐의를 씌어 처형했다. 의병장 이강년은 내란죄로 처형됐다.

기도터로 변한 의병의 은신처

▲ 공이동 동굴은 과거 중요한 은거지였으나 현재는 기도터로 이용되고 있다. ⓒ 김선기

충주시 살미면 공이동에 있는 공이동 동굴을 찾았다. 의병들에게 이곳은 전략요충지였다. 청풍에서 충주로 가거나 경상도에서 충주로 가려면 이곳을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동굴은 차에서 내려 한참 걸어야 나타났다. 중요한 교통로 선상에 있지만, 접근이 쉽지 않아 몸을 숨기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의병장 이강년도 충주성을 공격하려 이동할 때 이곳을 지나가며 이 동굴에 몸을 숨겼다고 한다. 항일운동이나 해방 이후에도 은거지로 이용됐다고 하니 선조의 아픔이 서린 피난처인 셈이다.

현재 공이동 동굴은 1990년 불광사가 매입해 월악산 천연동굴 기도도량이란 기도터로 이용되고 있다. 입구가 아주 좁았으나 다른 용도로 활용되면서 입구도 넓어지고 동굴 크기도 넓어졌다. 동굴 천장에는 물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마감재가 처리됐고, 동굴 입구에는 인위적인 외벽이 설치됐다. 구 교수는 충주시와 제천시가 힘을 합쳐 동굴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냥 내버려둬 이렇게 됐다며 아쉬워했다.

다음으로 충주시 살미면의 장고개를 찾았다. 한참 고개를 따라 올라가니 양쪽으로 언덕이 꽤 높았다. 과거엔 장항’(노루 장, 목덜미 항), 곧 노루떼가 자주 드나들어 노루목이라 불렀다. 구 교수는 장고개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주변 어르신께 물어가며 이곳을 발견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 곳을 넘어야 과거시험을 치러갈 수 있었다는 어르신의 설명을 듣고 장항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냈다.

박정수가 지은 의병장 안승우의 투쟁기를 다룬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1896222·24일에는 장고개를 넘어가던 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포군 10여 명이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의병장 이강년은 안보(현 수안보)에 있는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제천으로 돌아왔다. 전군장 홍대석으로부터 전군이 안보를 공격할 것이니 그쪽을 맡아 달라는 연락을 받고 기다렸으나 전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홍대석은 서창을 수비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이강년의 독촉을 받은 홍대석의 전군은 서창을 지나 수안보로 가던 중 장고개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장고개를 넘으려던 의병들은 이 고개를 다 넘지도 못하고 매복해있던 일본군에게 잡혔다. 10여 명이 희생됐고, 일본군은 시신에 불을 질렀다. 신원을 구분할 수 없는 7구의 시신은 제천의병묘역에 안치됐다. 구 교수는 대개 전쟁이 일어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맞서지 못하고 도망가는 사례가 많은데, 의병들이 장고개를 넘으려다 다 참혹하게 죽었으니 다른 의병들에게 큰 충격을 준 곳이라 설명했다.

▲ 장고개를 넘으려던 의병들은 이 고개를 다 넘지도 못하고 매복해있던 일본군에게 잡혀 참혹하게 희생됐다. ⓒ 계희수

나라가 망한 슬픔에 바다로 들어가다

의병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봉기했으나 나라와도 싸워야 했다. 국가가 외세의 앞잡이였으므로 권력과 싸우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지켜본 지식인은 자결을 선택하기도 했다.

구 교수는 한말의 선비인 김도현이 남긴 시, ‘도해’(蹈海)를 소개했다. ‘도해절개와 지조를 지키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다는 뜻이 담긴 고사성어다. 김도현은 매국노들의 농단을 막고 성패를 떠나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몸소 실천했다. 나라를 잃으면 지식인도 삶을 보전하기 힘든 걸까? 결국 나라가 망하자 김도현은 절명시를 남기고 지금은 대진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영덕 대진 앞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오백년 조선말에 태어나 我生五百末

붉은 피 온몸에 어리어 赤血滿空腸

중년의 항일 19년에 中間十九載

머리터럭은 서리가 내렸구나 鬢髮老秋霜

국망에 눈물은 마르지 않고 國亡淚未已

친상에 마음은 더욱 상한다 親沒心更傷

홀로 서 있는 옛 산은 푸른데 獨立故山碧

아무리 생각해도 어쩔 수 없구나 百計無一方

만리 먼 바다가 보고파라 萬里欲觀海

7일이 양을 회복하는 동지이니 七日當復陽

희고 흰 천 장 물결이 白白千丈水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하겠구나 足吾一身藏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연계된 이 강좌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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