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업이슈] 단양 일대 탐사기행

단양은 소백산맥의 준봉들 사이로 남한강이 흘러들어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단양팔경은 각 지역의 수많은 팔경들 중에도 관동팔경과 더불어 손꼽히는 경승지다.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청풍에서 단양까지 배를 타고 오르내리며 예술적 감흥에 취해 물구비마다 시를 지었다고 한다. 단양팔경을 정하고 이름을 붙인 이도 이황이었다. 그는 제천과 단양 사이에 있는 옥순봉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고 새겨넣었다. ‘단구’는 단양의 옛 지명이니 ‘단구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 팸투어 참가자들이 마중 나온 류한우 단양군수(뒷줄 가운데)와 함께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 입구 매머드 화석 앞에 섰다. ⓒ 이문예

<단비뉴스> 지역∙농촌취재팀이 퇴계마저 홀린 단양의 절경을 탐사하고자 지난 5~6일 단양군이 주최하는 ‘백두대간 역사문화생태탐방열차 팸투어’에 참가했다. 서울시 소재 대학교 재학생 40여명과 함께 1박2일간 단양팔경 중 도담삼봉, 석문, 하선암, 사인암 등 4곳과 수양개선사유물박물관, 이끼터널, 온달관광지, 신라적성비, 다누리아쿠아리움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학생들은 서울 청량리에서 기차로 2시간여를 달려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에 도착했다. 류한우 단양군수는 “단양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좋은 추억을 안고 돌아가 여러 번 되찾아오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며 일행을 환영했다.

문인들 발걸음 붙잡은 도담삼봉과 석문

단양(丹陽)이라는 지명은 ‘연단조양(鍊丹調陽)’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연단'은 중국 신선들이 먹는 환약이고, '조양'은 빛을 골고루 따뜻하게 비춘다는 뜻으로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고을’을 뜻한다. 이 지역은 들이 넓어 일찍이 농경이 발달했고 조상들은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잡고 살아왔다. 단양의 남한강변에서 세계적 규모의 선사유적지인 수양개와 금굴 유적이 발견된 이유이기도 하다.

단양팔경 중 제1경은 도담삼봉이다.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크고 듬직한 봉우리를 ‘남편봉’이라 부르고 오른쪽을 ‘첩봉’, 왼쪽 봉우리를 ‘처봉’이라 불렀다. 이름을 듣고 보니 마치 처봉이 남편봉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편이 첩을 얻었으니 등을 돌릴 만도 하다. 도담삼봉은 예로부터 시인과 묵객들의 시심을 자극해왔다. 이황도 고즈넉한 강가에서 절경에 취해 <도담삼봉>이란 시 한 수를 남겼다. 

▲ 도담삼봉은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이문예

산은 단풍으로 물들고 강은 모래벌로 빛나는데 (山明楓葉水明沙)
삼봉은 석양을 이끌며 저녁놀을 드리우네 (山導斜陽帶晩霞)
신선은 배를 대고 길게 뻗은 푸른 절벽에 올라 (爲泊仙磋橫翠壁)
별빛 달빛으로 너울대는 금빛 물걸 보려 기다리네 (待看星月湧金波)

이황은 ‘신선이 세 봉우리로 갈라놓은 돌섬’이라고 표현하면서 단양의 명승지 중에서도 도담삼봉이 최고라 했다. 조선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도 도담삼봉을 보고 자기 호를 삼봉으로 지었다고 한다. 외가인 단양에서 유년기를 보낸 정도전과 관련된 전설도 있다. 원래 도담삼봉은 강원도 정선군에 있던 삼봉산이 떠내려온 것인데, 당시 정선군은 단양군에 삼봉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단양군이 거부하자 세금을 물렸다. 그러자 소년 정도전이 “누가 삼봉을 가지고 내려온 게 아니고, 그렇게 귀한 것이면다시 가져가면 될 것 아니냐”고 되묻자 세금을 걷으러 온 이가 아무 말 못하고 돌아갔다는 얘기다.

▲ 석문 사이로 보이는 도담리에는 17가구가 살고 있는데 70%쯤이 서울 사람 땅이라 개발이 되지 않고 있다. ⓒ 이문예

도담삼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석문이 있다. 산비탈 계단을 200m쯤 올라가니 산 가운데를 뻥 뚫어놓은 것 같은 모습의 무지개다리가 보인다. 석회암의 약한 부분이 빗물에 녹아 떨어져 아치형으로 남은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선이 사는 동천(洞天)’ 곧 별천지 같은 곳이라고 적혀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우리 땅에는 어김없이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하늘나라에 살던 마고할미가 비녀를 찾으러 지상에 내려왔다가 순식간에 아흔아홉 마지기 논을 만들었다는 게 석문 너머 보이는 도담리다. 마고할미는 놀기를 좋아해 술과 담배를 끼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도담리가 비옥해 농사가 잘 되자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전설이다.

김홍도조차 화폭에 담지 못한 사인암

많은 이들이 단양팔경 중 ‘도담삼봉’을 으뜸으로 꼽는다. 이른 새벽, 물안개를 비집고 떠올라 삼봉 정자 지붕에 걸린 붉은 해는 경탄을 자아낸다고 한다. 하지만 계절이 초겨울인 탓인지 물 가운데 떠있는 도담삼봉은 함께 서있는데도 쓸쓸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계절과 상관없이 홀로 우뚝 서있는  ‘사인암(舍人岩)’을 단양팔경의 으뜸으로 꼽는 이도 있다.

사인암은 갖가지 오묘한 색을 띄는 불규칙한 모양의 돌들을 빈틈없이 쌓아올린 듯하다. 깎아지른 절벽 머리 옹색한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수 백년을 살아온 노송은 조용히 여백을 메우며 비경을 완성한다. 바로 아래 흐르는 계곡은 아홉 굽이마다 푸르고 영롱한 옥빛 여울이 기암절벽을 안고 휘돈다 하여 이름 붙인 ‘운선구곡(雲仙九曲)’ 중 하나다.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그 모습을 보고 선인들도 마음을 빼앗겼나 보다.

▲ 단양팔경 제5경 사인암과 김정희의 <사인암도>. ⓒ 이문예

추사 김정희는 시 <사인암>에서 암벽의 독특한 색감은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오색(五色)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그림’이라 감탄했다.  

괴이하다 한 폭 그림 하늘에서 내려왔나 (怪底靑天降畫圖)
범속한 정과 운은 털끝 하나 없군 그래 (俗情凡韻一毫無)
인간의 오색이란 본시가 한만한 것 (人間五色元閒漫)
임리한 붉고 푸름 정말로 격 밖일세 (格外淋漓施碧朱)

순조 때 기록인 한진호의 <도담행정기>에는 단원 김홍도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단양의 경승으로는 다섯 바위가 있다고 하니, 하나는 삼선암의 세 바위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과 운암 그리고 사인암을 이른 것이다. 일찍이 정조께서 그림을 잘 아는 김홍도를 연풍현감으로 삼아 영춘∙단양∙청풍∙제천의 산수를 그려 돌아오게 하였다. 김홍도는 사인암에 이르러 그리려 했지만 십여 일을 머물면서 익히 보고 노심 초사하였는데도 끝내 참모습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한다.’

김홍도는 인물∙산수∙풍속∙불화 등 못 그리는 게 없고 그 솜씨가 빼어나 이전 대화가들과 비교해도 필적할만한 자가 없었다. 그는 정조의 신임을 얻어 화가 신분으로 종6품에까지 오르는 등 당대 최고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조차도 십여 일을 지내면서도 쉬이 그려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김홍도의 경탄이 대단했던 듯하다.

공터에 버스를 세우고 흔들다리를 건너니 사인암과 바로 맞붙은 곳에 작은 암자 ‘청련암’이 있다. 원래 고려 말에 창건돼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축됐다. 그러다 1954년 공비소탕작전으로 주민 소개령이 내려지자 지금 자리로 대들보와 기둥을 옮겨오는 등 수난을 겪었다.

사인암 사이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가면 법당 옆 돌벽에 많은 시인과 풍류객들의 자취가 음각돼있다. 고려말 정주학의 대가였던 우탁은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할 때 이곳에 자주 들러 초막을 짓고 기거했는데 그가 죽은 뒤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 임재광이 우탁을 기리기 위해 바위 이름을 ‘사인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해송 문화관광해설사는 한 부분을 가리키며 “우탁이 본인 시를 새겨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 우탁의 시구가 새겨진 사인암(위). 우탁이 새긴 것으로 알려진 장기판(아래). ⓒ 이문예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할 바가 아니나(卓爾弗群)
확실하게 빼어나지도 못했도다(確乎不拔)

돌에 새겨지지 않은 시의 뒷 부분은 이렇다.

홀로 서도 두려울 것 없고(獨立不懼)
세상에 은둔하여 근심도 없노라(遯世無憫)

청련암에서 계곡을 내려다보면 바위에 우탁이 새겼다고 전해지는 우리 고유 순장바둑판이 장기판과 함께 그려져 있다. 사인암 아래에서 굽이치는 계곡을 바라보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선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탈속하고 싶다면 단양으로 떠나라

단양휴게소(춘천방향) 뒤쪽 언덕을 오르니 여러 겹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단양 일대가 한 눈에 보이는 곳에 단양적성비가 있다. 성재산에 자리한 단양적성비는 1978년 온달 유적을 조사하러 나온 단국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굴됐는데, 적성비 발굴 뒷 얘기가 흥미롭다. 당시 단국대 정영호 교수는 “유물을 발견하면 맥주를 사주겠다” 학생들의 적극적인 발굴 참여를 유도했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모두들 허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삐죽 나온 돌부리에 신발의 흙을 털려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흙을 쓸어 보니 한자가 적혀 있었다. 학술조사단은 몹시 흥분했지만 날이 어두워 나뭇가지를 덮어 둔 채 내려왔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파보니 비석이 나왔다. 단양적성비가 천년 사직 신라 역사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비문을 판독한 결과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에 속한 지금 단양, 곧적성현을 얻은 기념으로 세워진 척경비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고구려인이었던 야이차가 신라의 국경을 단양까지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준 공을 명시해뒀다. 야이차처럼 충성한다면 고구려인이라도 후한 상을 내리겠다는 뜻이었다. 단양을 포함한 중원(中原) 지역은 삼국시대 요충지였다. 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수로와 백두대간으로 남북이 연결된 육로의 요충지를 두고 각축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 국보 198호인 단양적성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행에 참여한 광운대 박재우(20)씨는 “오기 전 관광지 검색을 통해 좀 더 알고 왔더라면 더욱 흥미로운 여행이 됐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알면 알수록 보이는 게 더 많은 고장이 단양이다. 한양여대 양자윤(23)씨는 “서울에서 벗어나 학교 생활해서 경험하기 힘든 걸 할 수 있었다”며 “친구들과 휴대폰만 보다가 서로 여유롭게 대화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단양은 인구 3만의 작은 군이지만 가진 게 많다. 빼어난 산수는 과거부터 수많은 문인들의 발길을 붙잡았고, 지금은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천금을 들여도 얻을 수 없는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단양을 관광명소로 만들고 있다.

도시의 인위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여행객들에게 단양의 예사롭지 않은 탈속성은 잠시나마 속세의 번뇌마저 잊게 한다. 무엇이든 만들었다가 금세 허물어버리는 도시의 허무함과 달리 빼어난 자연 속에 선조들의 자취를 오랜 기간 간직해온 단양의 매력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으리라.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연계된 이 강좌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편집자)

 

* 댓글 달고 책 받자!
단비뉴스가 댓글 이벤트를 엽니다. 1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기사를 읽고 댓글을 달아주시는 독자 중 매주 두 분에게 경품을 드립니다. 1등에게는 화제의 책 <벼랑에 선 사람들>, <황혼길 서러워라>, <동네북 경제를 넘어> 중 1권을, 2등에게는 커피 기프티콘을 드립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