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의 미디어 속 이야기]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내가 영국에서 살아보기 전에 가졌던 선입견은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는 거였다. 그런데 6년간 살면서 대문에 달걀 투척을 세 번이나 당했다. 부활절에 달걀을 선물하는 풍습을 악용해 날달걀을 던진 것이다. 동네 청소년들이 한 짓이지만 어른들이 교육을 잘못한 탓이리라.

살아보지 않더라도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사람들에게 어떤 짓들을 했는지 안다면 ‘신사의 나라’라는 별칭에 거부감이 생길 터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머물 때 그곳 원주민인 ‘애버리진’의 전시회에 들른 적이 있는데, “영국인이 원주민을 사냥해 개 먹이로 삼았다”는 내용까지 전시돼 있었다. 영국은 스페인 무적함대에 맞서기 위해 해적인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린 나라였고 축구장에서 말썽을 일삼는 훌리건의 본고장이었다.

그런 오해의 연장선상에 영국 의회가 있다. 한국 국회에서 야유나 몸싸움이 벌어지면 신문 칼럼에 비교 사례로 자주 등장하는 게 영국 의회다. 상대 의원을 부를 때부터 “국민의 사랑을 받는 ○○당의 존경해 마지않는 아무개 의원께서” 또는 변호사 출신이면 “학식 높은”, 군 출신이면 “용감한” 식으로 수식어를 붙이는 등 의사진행이 신사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영국에 살면서 목격한 것은 전혀 딴판이었다. BBC로 생중계되는 것을 보면 ‘우우’ 하면서 온갖 야유를 보내는 게 일상이었고, 매주 수요일 12시에 총리가 등장하면 야유소리는 더 커지곤 했다. 아니, 우리 국회가 훨씬 더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게 아닌가?

어떻게 영국에 대한 허상이 나를 포함한 한국인의 머릿속에 박히게 된 걸까? 원인은 한국 언론에 있었다. 영국으로 가기 전, 박권상씨가 동아일보 특파원 등으로 영국에 머물면서 연재한 기사를 모아 펴낸 <영국을 본다>와 <영국을 다시 본다>를 읽었는데, 책의 내용은 내가 본 영국의 현실과 꽤 달랐다. 그는 존경받을 만한 언론인이었지만, 영국 사회를 제대로 파고들지 못했거나 20여년 만에 영국이 많이 변한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의 언론인들은 그 책 또는 그 책을 인용한 칼럼을 ‘무한반복’ 베껴온 셈이다.

개헌과 관련해 이원집정제와 의원내각제가 거론되고 있는데, 일부 정객과 논객은 허상을 좇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의회 제도의 본질과 언론의 임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결론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원집정제는 단점이 많고 의원내각제도 단점이 있지만, 둘 다 대통령제보다는 우월한 정치체제라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 언론이 의정활동 또는 정치를 무슨 ‘신사들의 봉사활동’ 정도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우선 언론은 정치야말로 다원화한 사회의 온갖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고 갈등이 충돌해 접점을 찾고 타협을 모색해가는 ‘공적 토론의 장’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법 하나에 생명과 생존권이 좌우되고 미디어법처럼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훼손할 수도 있는데 조용히 넘어간다면 그게 오히려 직무유기다. 이번 국정감사에도 ‘기업인들을 기다리게 한다’는 둥 의회정치를 비하하는 보도가 쏟아졌는데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야유가 난무하는 영국 의회야말로 진정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야유도 의사표현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원의장이 지나친 야유에 제동을 걸겠다며 정당 대표들에게 서한을 보냈다는 보도(인디펜던트 2월18일자)가 나왔지만, 나는 그게 일하는 의회의 본모습이라 생각한다.

나중에 매카시즘을 잠재워 더 유명해진 미국 CBS의 에드워드 머로는 2차 세계대전 때 런던지국장으로 있으면서 런던이 폭격당하는 와중에도 영국 의회가 갑론을박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그는 <여기는 런던입니다>라는 인기 프로그램에서 “정부는 전쟁 수행의 전권을 부여받았지만 결코 자제력을 잃지 않았으며 의회가 이를 감시했다”고 보도했다.

▲ 일러스트 | 경향신문 김상민 기자

▲ 영국은 '신사의 나라?
야유도 의사표현의 하나인 영국의회 일하는 분위기
 
▲ 토론 없는 연설에 기립박수 '신사적'인 듯하지만
합의민주주의 차원에선 아무 성과도 못 거둬

 
▲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는 무한대립…
양당정치 부추겨 아래로부터 개헌 위해 진보언론이 여론 이끌어야

2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한 건 어땠나? 보수언론은 국회를 존중한 것이라며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에서 우리 정치체제의 한계를 보았다. 박 대통령은 남북문제와 개헌 등 국민들이 듣고 싶은 현안에는 함구한 채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세월호 유족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전시작전통제권 연기는 대선공약을 뒤집은 건데 국민에게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연설 뒤 회동에서 야당 지도부가 건의한 것도 받아들인 게 없다. 대통령이 국회에 가서 시정연설을 하고 여야 의원이 기립해 예의를 지켰으니 ‘신사적’인 듯하지만, 합의 민주주의나 협의(協議) 정치의 차원에서 본다면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우선 일장연설을 하는 것 자체가 실은 반의회적이다. ‘의회(議會)’는 ‘의견을 모으는 곳’이지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웅변대회장이 아니다. 영국 의회에서는 미리 작성된 원고를 읽는 것까지 금한다. 짧게 묻고 대답하고 따지는 문답식으로 회의를 진행해 진상을 파헤치고 의견을 수렴한다.

회의장도 우리 국회처럼 높은 연단에서 연설하는 식이 아니라 앞줄에 총리 등 각료들과 야당 대표 등 예비각료들이 마주보고 뒷줄에 일반 의원들이 앉아 국정을 논의하도록 좌석이 배치돼 있다. 의회가 거의 일년 내내 열리니 작은 법안을 갖고도 ‘신사적’이기는커녕 좀스러울 정도로 치고받으며 공방전을 벌이고 타협을 통해 국정을 함께 이끌고 간다. 바로 합의제 민주주의의 산실이다.

정치부 기자들이 설문조사를 해서 모범적 의정활동을 한 의원에게 수여하는 ‘백봉신사상’이란 게 있다. 초기에는 김근태·조순형·김부겸 의원 같은 소신파들이 받아 수긍이 갔는데, 2007년부터는 박근혜 의원이 내리 4년을 받아 ‘웃기는 상’이 되고 말았다. 박 의원은 법안 제출 건수와 출석일수가 모두 꼴찌였으니까. 권력의 향배에만 주목하는 요즘 정치부 기자들의 의식구조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소선거구제에 근거한 양당정치의 폐해에 대해서는 기자들도 비판적이지만 실은 그들 자신이 양당정치 존속에 기여한다. ‘여당반장’입네 ‘야당반장’입네 하면서 양당의 시시콜콜한 동정과 입에 발린 말들을 대서특필해 양당의 갈등을 부추기는 지렛대 구실을 한다. 두 보수정당을 보수-진보의 대결구도인 양 포장하니 진정한 진보정치는 설 자리가 없다.

이 국면에서 의아한 것은 경향신문을 비롯한 진보언론의 보도 태도다. 경향은 여야의 개헌 공방만 중계했을 뿐 사설로 개헌의 방향을 제시한 적이 없고, 내부 칼럼도 ‘개헌은 싫다’(21일자)는 제목으로 한번 내보냈을 뿐이다. 미디어오늘은 아예 ‘개헌은 미친 짓이다’(22일자)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야당이 열세이니 개악을 할 것이고 개헌을 하지 않더라도 대통령 결선투표제와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면 된다는 논리다.

걱정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주장에는 타협의 정치보다 민주주의를 ‘한판 승부’로 보고 정권만 찾아오면 된다는 각오가 서려 있다. 선거법 개정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내각책임제와 결합될 때 제구실을 할 수 있다. 권력분점을 노리는 정객들의 ‘짬짜미’일지라도 여당에 개헌의 목소리가 높은 지금이 개헌 논의의 적기가 아닐까? 권력독점의 폐해가 심각한데 권력분점이 왜 나쁜가?

선진국 중에는 우리처럼 강력한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가 없고 동유럽 국가들이 민주화할 때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것을 생각한다면 세계적으로 대통령제의 수명은 다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터이다. 간신히 절반을 넘긴 득표로 대통령이 된 이가 권한을 100% 독점하고 임기 동안 대개 하향세를 보이는 국민 지지를 업고 국정을 이끄는 것 자체가 모순되고 힘겨운 일이다. ‘국민대통합’과 ‘국민행복시대’는 제도적으로도 불가능하게 돼 있다.

승자독식 모델인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에서 권력을 쥔 쪽은 대화를 시간 낭비라 생각하고 반대쪽은 권력을 탈환하려 사생결단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이 ‘배제의 정치’를 하는 것이 그의 품성 때문만은 아니다. 대선공약마저 거의 다 폐기했는데 내각책임제였더라면 정권이 교체됐을 상황이다.

총선에서 42.8% 득표한 새누리당은 민의로만 본다면 127석을 차지해야 마땅한데 152석을 가져간 것은 ‘제도적 부정선거’라 할 수 있다. 내각제였다면 연정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중대선거구제로 가되 독일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대폭 반영하는 것은 민의를 최대한 반영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선택이다.

선진 복지국가들이 다 그런 것처럼 합의제 민주주의는 극도로 양극화한 한국 사회에서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과제이다. 헌법과 선거제도 개혁은 그 주역들이 개혁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어려운 일이다. 여론을 앞세운 언론의 압박과 방향 제시가 대단히 중요한 이유다. 아래로부터 개헌을 위해서는 진보언론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 이 기사는 <경향신문>과 동시에 실립니다.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