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불패] 대산농촌문화재단 장학생 연수 참가기

쌀시장 관세화로 쌀이 다시 뉴스의 초점이 됐지만 쌀 한 톨에서도 농부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작물을 대량 생산하려는 인간의 욕심은 지구 환경을 훼손하고 인류의 건강까지 위협한다. 농작물은 쓰고 버리는 공산품과 달리 우리의 몸이 된다. 농업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대산농촌문화재단(이사장 오교철)이 지원하는 농촌전문언론인양성 장학생 4명(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재학생)이 농업CEO 장학생 7명과 함께, 우리 농업을 살리려 애쓰는 농업 혁신의 현장을 지난 8일부터 3박4일간 둘러보고, 추가 취재한 뒤 하계 연수 참가기를 썼다. (편집자)

“세계 최초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뭘 먹지?' 매일 적어도 한두 번은 하는 고민이다. 시간을 쪼개 움직이는 바쁜 현대인에게 식사 시간은 업무의 연장인 경우도 많다. 메뉴를 고르는 일도 귀찮은데 이 농산물을 누가 키웠나, 몸에 건강한 것인가, 토종인가 따위는 생각할 여유가 없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무관심한 사이 유전자 조작 종자와 농약으로 키운 다국적 기업의 농작물이 시장을 장악했다. 생명을 기르는 농업이 이윤을 극대화하는 산업이 된 것이다. 이에 반기를 들고 우리 농업을 온전히 살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충북 제천 ‘한가지골 농장’과 강원도 평창 ‘육백마지기 유기협업농장’을 운영하는 이해극(63) 대표는 농사꾼이자 소문난 발명꾼이다.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농민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발명을 시작했고, 세계 최초 비닐하우스 자동개폐기를 탄생시켰다. 사람이 하려면 한참 걸리는 일을 버튼 하나로 간편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한가지골농장 이해극 대표가 자신이 개발한 비닐하우스 자동개폐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대산농촌문화재단

“처음엔 너 같은 돌대가리가 뭘 만드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세계 30여개국에 수출하는 발명품을 만들었죠. 작물과 농부 모두 좋은 환경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세계 최초가 이렇게 쉬울 줄 몰랐어요.”

자동개폐기는 작물의 생육에 적당한 온도에 맞춰 자동으로 하우스를 열고 닫는다. 사람 힘으로는 한번 여닫는 것도 힘들지만, 자동개폐기는 기후에 따라 하루에 열 번도 작동한다. 불필요한 노동을 없애주는 발명에 전 세계 농민들은 크게 호응했고, 현재 연매출은 140억원에 이른다. 기술 공유를 하는데도 이 대표가 만든 제품은 독과점 상태에 있다. 중국에서도 가격을 맞추지 못할 만큼 싼데다 튼튼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10년간 무상수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제품이 너무 좋아서 망할 것”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망하면 영광”이라고 응수한다. 그의 발명은 오로지 ‘농민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표가 이런 발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농사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누구보다 농민의 고충을 잘 아는 사람이기에 나올 수 있는 발명품이었다.

그는 1970년대 초부터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유기농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농약과 비료 없이 농사를 짓겠다는 그를 사람들은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사기꾼 취급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처음 3년은 농사가 쫄딱 망해 고생도 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유기농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병든 엄마가 건강한 아이를 낳기 어렵듯이, 안전하고 좋은 먹거리를 위해서는 땅을 살리고 지력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인류의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해 친환경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그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땅에 쌀겨를 뿌리거나 호밀을 심었다가 갈아엎는 방식으로 지력을 높인다. 유기농업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나자 지력을 회복한 땅이 서서히 결과물로 보답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늘어나는 수확량에 그는 농사일이 힘든 줄 몰랐고 지금은 ‘성공한 농부’가 되어 유기농업계의 신화 같은 존재가 됐다.

그는 스스로를 ‘돈키호테’라고 소개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시절부터 40년간 유기농만을 고집해온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는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이 농민이 해야 할 일”이라며 “제대로 된 농사를 짓는 것이 바로 애국”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흙이 나고, 내가 흙”이라며 지금도 새벽 5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흙과 함께 지내며 농사를 짓는다.

19년 뚝심으로 일군 ‘예술 하는 회사’

충북 충주시 신니면 하랭이길, 장안농장에는 약 400만㎡(130만 평) 땅에 6개 농장이 있다. 유기농 상추, 당근, 양배추, 감자, 브로콜리, 양파 등에 100여 종 쌈 채소뿐 아니라 벼와 가축도 이곳에서 자란다. 풀로 덮인 언덕배기 귀퉁이에 2층 직사각형 건물이 있다. 위층으로 올라가니 빨간색 피케셔츠를 입은 류근모(54) 대표가 웃으며 일행을 반겼다.

“양배추, 브로콜리, 양상추, 상추는 우리나라 시장 점유율 1위, 판매율 1위야. 신세계 바이어가 말하길 장안농장의 유기농 재배기술이 선진국 유기농보다 10년 앞서있다고 이야기해. 지금은 다른 나라가 고급 생산을 해서 7년으로 격차가 줄었어. 다시 10년 격차로 벌려야지.”

‘상추 CEO’로 잘 알려진 류 대표는 유기농 상추 재배로 시작해 매출 100억원을 달성했다. 주변의 농사짓는 친구들이 ‘불가능’이라고 할 때도 류 대표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유기농 ISO 9001 인증, 금탑산업훈장, 대산농촌문화대상, 미국 농무부(USDA) 인증까지 획득했다. 장안농장은 100여 개 인증서와 상을 모두 국내 최초로 받았다. 그는 생산과 판매뿐 아니라 유기농 식품을 소비하는 레스토랑이 있어야 유기농 농장의 성장과 발전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 대표는 19년 전부터 오늘을 계획했다.

▲ 장안농장 류근모 대표는 벽에 붙어있는 사훈처럼 예술을 하는 열정으로 농장을 가꾼다. ⓒ 대산농촌문화재단

식당은 19년 준비를 한 거야. 한국 사람이 날것으로 가장 많은 종류의 채소를 먹는 거 알아? 근데 쌈 채소랑 산나물을 100가지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우리나라에 없어.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유기농 식당을 만드는 게 내 꿈이야.”

류 대표는 “농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하는 회사를 일구고 있다”고 말한다. 당일 수확한 유기농 쌀과 채소를 먹는 것이 교양이라는 것을 소비자가 느끼는 농장을 만들었다. 사람 크기 만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식당을 채우고 엘피판 앨범이 2층 벽면 가슴 높이 책장과 1층 식당 벽을 꽉 채우고 있다.

유기농이 옳다는 확신, 정부 기준 바꿔야

건물 밖으로 나가니 류 대표가 ‘상추’ ‘당근’이라고 이름 붙인 개 두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상추’와 ‘당근’은 얼마 전 새끼를 낳았다. 토끼, 거위, 염소도 얕은 언덕배기에서 자라고 있다. 소낙비가 오는 오솔길을 5분 정도 걸어가니 유기농 돼지와 소 농장이 나온다. 돼지우리에서는 흙 냄새가, 생 양배추를 한 상자 부어준 소 우리에서는 신선한 양배추 냄새가 났다.

축사에서 악취가 나지 않는 것은 생태순환농법 때문이다. 소와 돼지에게 유기농 채소만 먹였더니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물론이고 병도 잘 걸리지 않는다. 소 한 마리가 1년 동안 천만원어치 야채를 먹지만 장안농장 소는 시장에서 일반 소값의 두 배다. 소 배설물을 6개월간 발효시켜 채소농사에 쓸 퇴비를 만드는 것이 생태순환 농법의 마지막이다. 축사 왼편에 2m 높이로 쌓인 소와 돼지똥 더미는 60도까지 온도가 올라 자연발효된다.

“A++쇠고기 기준은 대기업이랑 외국기업에 맞춘 거야. 정말 건강하게 유기농 채소 먹인 소들은 지방이 그렇게 많이 나올 수가 없어. 지금 기준으로는 등급이 낮은 게 오히려 몸에는 더 건강한 거라고. 신장 안 좋은 환자가 A++ 쇠고기 먹으면 바로 투석하러 가거든.”

축사에서 조금 걸으면 고서와 유기농 야채 사진이 전시된 쌈 채소 박물관이다. 장안농장은 1851년 류 대표의 선조인 류재완 옹이 보관한 책 <과채재배법>에서 시작됐다. 올해로 163주년이 된 장안농장의 류 대표는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식당에 들어갈 야채를 직접 챙긴다. 느리지만 옳은 방법으로 키운 맛있는 것을 함께 생산하고 수확해 먹는 이들과 장안농장 200년을 꿈꾼다.

▲ 장안농장의 돼지축사에는 악취가 나지 않는다. ⓒ 대산농촌문화재단

유기농 쌀, 까다롭지도 비싸지도 않다

일행은 셋째 날 충북 괴산으로 이동했다. 흙살림연구소는 이름 그대로 ‘흙을 살리자’는 뜻을 담았다. 유기농의 기본은 흙을 살리는 데서 시작한다는 취지다. 1990년대 초반부터 유기농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로 시작해 현재는 사회적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사단법인 흙살림 연구소 이태근(57) 회장은 “유기농업이 농민도 살고 소비자도 사는 길”이라 말했다.

2013년 한국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67kg, 1970년 134kg에 견주어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농민들은 쌀 생산 과잉에 따른 가격하락과 더불어 쌀 시장 개방의 압박까지 이중고를 겪고 있다. 이 회장은 농민들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 “한반도 전체가 유기농업을 실시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농민들이 유기농업을 꺼리는 이유는 관행농업보다 생산량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유기농업의 생산량도 많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통 유기농법과 현대과학기술을 접목해 농사를 지으면 일정 기간만 지나면 관행농법만큼 생산량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관행농법의 경우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해 지력이 낮아져 장기적으로 시행하면 농민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이에 견주어 유기농법은 수확량이 비슷하지만 판매가격이 높아 농민에게 더 많은 소득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소비자들은 유기농 쌀이 비싸서 못 사 먹는다고 말해요. 일반 쌀이 한 가마니(80kg)에 20만원 정도 합니다. 무농약은 24만원, 유기농은 28-30만원입니다. 1인당 1년에 쌀을 70kg 정도 먹는데 유기농 쌀로 매일 밥을 지어 먹어도 한 끼에 220원입니다. 이 정도면 먹을 만하지 않습니까?”

▲ '참 좋은 미래, 농을 만나다'를 주제로 한 대산농촌문화재단 하계 연수에서 장학생과 재단 직원 등이 흙살림 이태근 대표(앞줄 가운데)의 강연을 들은 뒤 기념 사진을 찍었다. ⓒ 대산농촌문화재단

토종 종자의 중요성, 정부만 모른다

흙살림은 농민들을 위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로 흙살림토종종자연구소를 설립했다. 토종 종자를 수집하고 보전해 종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한국형 유기농업을 연구하려는 목적이다. 과거 문헌에 따르면 쌀을 500종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현재 연구소에서는 485종의 쌀을 보유하고 있다. 쌀 말고도 콩 팥 수수 조 등 다양한 토종 종자를 수집해 보존하고 있다.

토종 종자에는 지역의 문화와 역사, 선조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가락이 긴 쌀은 새가 많은 지역에서 자란 쌀이다. 새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쌀의 가락이 길어진 것이다. 선비잡이콩은 과거시험을 치러가던 선비가 콩이 매우 맛있어서 그릇째 손으로 집어 먹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부채콩은 꼬투리가 부채처럼 생긴다고 하여 부채콩이라 불린다. 오가피콩은 콩잎이 5장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 토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미미한 편이다. ‘토종’을 지정할 때조차 국가가 제시하는 뚜렷한 기준이 없어 민간업체에서 만든 기준을 이용한다. 다국적 기업들이 종자산업을 잠식해 큰 이익을 얻고 있는 반면 소농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져 가고 있다. 이미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이 토종 종자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토종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체계적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언니’들이 만드는 안전한 먹을거리

오후에는 경북 상주로 이동해 언니네텃밭 봉강공동체를 방문했다. 언니네텃밭은 여성농민이 가꾼 텃밭 생산물을 ‘제철꾸러미’로 모아 도시의 소비자회원에게 전달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전국 17개 생산자공동체가 있다. 제철 채소 세 가지와 국산 두부, 방사 유정란, 콩나물, 김치, 전통가공 식품으로 구성된 제철꾸러미에는 요리방법을 설명하는 편지도 담겨 있다.

농민과 소비자의 관계가 단절되어 먹을거리가 위기 상황에 놓인 지 오래다. 언니네텃밭 김정열(48·여) 사업단장은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협력해 안전한 식량 생산소비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꾸러미 사업을 통해 소비자는 철 따라 다양한 먹을거리를 제공받고, 생산자는 판매 걱정 없이 건강한 농산물을 공급한다. 2009년 봉강공동체가 제철꾸러미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는 소비자 31명으로 시작했지만, 2014년 현재 소비자 회원은 300여 명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김 단장은 기자를 꿈꾸고 사회학과에 입학했던 대학생 시절, ‘농활’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귀농을 결심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는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었지만, 한 인간의 성장을 위한 노동은 농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졸업도 안 하고 상주에 내려와 정착한 지 벌써 24년째다.

▲ 언니네텃밭 김정열 대표가 대산농촌재단 장학생들과 함께 마을을 돌며 '봉강공동체'를 설명하고 있다. ⓒ 대산농촌문화재단

“일반적으로 농사지은 소득은 남편 통장으로 들어가요. 언니네텃밭은 꾸러미 사업과 직거래 장터로 번 소득을 여성 농민 통장으로 입금해요. 자기 이름으로 된 소득이 있으면 가정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사회적 관계에서 자신감이 생겨요.”

그는 “소규모 텃밭을 일구는 여성 농민들의 자립기반을 마련해야 농업을 지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봉강공동체는 회의를 통해 매주 꾸러미 목록을 구성하고, 전체적인 생산계획을 함께 결정한다. 텃밭 농사의 의사결정자는 여성 농민이다.

“우리 식구가 먹는다고 생각해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어요. 여성 특유의 공감능력과 감수성이 농산물에 그대로 전달돼요. 소비자를 생각하는 여성들의 마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요.”

죽음의 밥상을 엎어라

‘무엇을 먹을까’를 즐거운 고민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네 곳의 농장에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아닌 우리, 현재의 이익이 아닌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먹거리에 대해 반쯤 체념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야말로 미래의 식생활에 즐거움을 선사할 사람들이다. 건강한 씨앗을 오염되지 않은 흙에 심어 농약 없이 기른 농산물을 먹는 것, 농민은 행복하게 농사를 짓고 소비자는 안전한 먹거리를 믿고 사 먹는 것. 이 ‘당연한 일들’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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