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뿌리를 찾아나서는 지역사 교육
경기도 서남부 도시 안산(安山)은 곳곳에 있는 구릉이 평지를 감싸는 지형이어서 ‘편안한 산’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안산은 30년 전만 해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작은 마을이었다. 서해안 갯벌과 염전, 논과 밭이 맞닿아 있는 지역으로 2만여 명 주민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평온하고 넉넉하게 살았다.
역설적이게도 안산은 이런 지리적 특성 탓에 일찍부터 개발의 삽날에 파헤쳐질 수밖에 없었다. 1976년 정부가 ‘반월신공업도시 건설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호주의 캔버라를 모델로 안산을 전원 공업 도시로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갯벌과 논밭, 그리고 구릉을 개발해 전원도시로 만드는 한편으로 서울의 공장들을 이전해 서울의 공해를 줄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자연환경이 빼어났지만 공장입지로도 안성맞춤이었던 안산은 그 후 공단이 계속 확장되면서 환경 오염 문제에 직면한 인구 70만의 회색 도시가 돼버렸다.
도시를 ‘고향’으로 만드는 동아리 활동
안산시 단원구 원일중학교 신대광(51) 교사는 삭막한 공업도시에 묻힌 유적과 문화를 찾아 학생들에게 지역의 역사를 가르친다. 그는 원일중학교 역사동아리 ‘사목(史目)’의 지도교사다. ‘역사를 보는 눈’이라는 뜻의 ‘사목’은 안산 지역 구석구석을 다니며 흩어져 있는 역사의 조각들을 모으는 일을 한다.

“‘고향’ 하면 송아지 치고 분뇨 냄새 나는 모습만 떠올려요. 이곳 아이들에겐 도시가 고향이에요. 도시에도 역사와 문화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지역사(地域史)를 가르칩니다.”
동아리 활동을 통해 지역의 문화재를 수집하는가 하면, 지역 주민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문화재 해설도 한다. 지역사를 배울 기회가 없는 아이들에게 선생님과 함께하는 동아리 활동은 ‘살아 있는 역사 수업’이다.
딱딱한 암기 위주 역사 수업을 재미있게 해보자는 것이 신 교사가 ‘사목’을 만든 목적이다. 그 교육 방법 중 하나가 ‘역사와 나의 연결고리 찾기’. 역사를 지역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나의 역사’로 만드는 작업이다. 신 교사와 학생들은 2008년부터 안산 지역의 사라져가는 유물들을 찾아 나섰다. 옛 산성 터에 그대로 남아있는 토기나 기와 조각을 모아 깨끗하게 닦고 정리했다. 안산 외곽 지역의 농촌에 찾아가서 버려진 농기구들도 모았다. 그렇게 모은 사료는 교내에 ‘민속박물관’을 만들어 전시했다.
“학교 공간이 부족해 박물관은 작년 6월에 문을 닫고 문화재들은 안산문화원에 기증했어요. 아쉬웠지만 지역 주민들 품에 돌려준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뜻 깊었습니다.”
지배자의 역사뿐 아니라 민초의 삶을 들여다본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 직접 답사를 가기도 한다. 아이들은 교과서에서만 보던 문화재가 실제 발굴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역사를 ‘체험’한다. 유적지가 새로 발견됐을 때는 과학 교사가 동행해 건축물의 과학적 원리를 함께 설명해준다. 역사와 과학 수업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교과목의 융합도 현장 체험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신 교사의 생각이다.
원일중 3학년 이혜림(16) 양은 “역사 탐방을 통해 현장에서 역사를 직접 눈으로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다”며 “선생님의 설명이 덧붙여지니 역사 수업이 더 친근해졌다”고 말했다.

신 교사가 동아리 활동으로 지역사를 가르치는 목적은 지역의 복원과 전수에 있다.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도시가 고향이다. 하지만 도시화는 종종 지역 고유의 특색을 지우고 경제적인 이미지를 덧씌운다. 지역이 각종 산업특구로 지정되고, 그것이 지역의 상징이 되는 현상이 그 예다. 안산도 공업도시로 자리 잡으면서, 지역에 대한 애착과 정주(定住)의식이 사라지고 있다고 신 교사는 말했다.
무엇보다 지역사 교육은 아이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는 데 도움을 준다. 권력과 지배자의 역사만 배우던 아이들은 지역의 역사 수업을 통해 민초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가 곧 나의 역사임을 배운다. 신 교사는 ‘내가 나의 역사에서 소외되는 것’이 현재의 역사 교육이며, 그 소외를 극복하는 것이 지역사임을 강조했다.
화가 김홍도와 소설 '상록수'의 배경
안산의 단원구는 단원(檀園) 김홍도가 안산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안산에 살던 조선 후기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은 <단원기>(檀園記)에서 “김홍도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집에 드나들어 그 재능을 칭찬하고 그림 그리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산시의 또 다른 구(區)인 상록구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유래된 것으로, 소설의 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이 된 일제 식민 시기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행정 명칭이다. 이처럼 안산은 지역명을 통해서도 역사와 예술의 가치를 보존해가고 있다.
신 교사는 동아리 활동을 통해 지역사를 가르치는 방식은 일회성이라며, “정규 교육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지역사를 다루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사고가 할퀴고 간 안산은 지금 편안하기는커녕 도시 전체가 슬픔에 잠겨있다. 그러나 안산의 아이들은 이 비극적 역사마저도 잊기보다는 배우고 기억해야 한다는 게 역사교사들의 생각이다.
현재 정규 교육과정 중 초등학교에서는 지역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교육과정을 지역이나 학교의 실정에 맞게 운영한다는 의미에서 ‘지역화 교육’이라 불린다. 교육부가 발간하는 초등교육해설서에 따르면 지역화 교육은 지역에 대한 정체성과 지역애를 함양시키는 것을 목표로 제 6차 교육과정기(1993~1997)에 제도로 굳어졌다. 사회과 보조교육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초등학교 3학년은 시군 단위, 4학년은 보다 넓은 시도 단위의 내용을 배운다. 예컨대, 충북 제천시에서는 3학년은 ‘우리 고장 제천’을, 4학년은 ‘살기 좋은 충청북도’를 배우는 식이다.
하지만 지역화 수업에서 지역의 역사를 다루는 단원은 없다. 현재는 ‘촌락의 형성’, ‘도시의 발달’, ‘주민 자치’ 등으로 단원이 이뤄져, 주로 지역의 자연환경이나 도시 분포의 특성 등을 배운다. ‘경제생활과 바람직한 선택’처럼 지역과 관계없는 내용을 다루기도 한다. 유일한 지역 교육 시간에 지역의 역사와 유적, 인물에 대해 다루지 않아, 지역사에 대해 배울 기회는 없다.
부산 남부교육청은 박물관과 연계해 지역사 수업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지방교육청 차원에서 지역사 프로그램을 만든 곳도 있다. 초등학교 지역화 교육을 확대해, 지역사를 보다 자세히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부산 남부교육지원청은 지난 4월 1일부터 부산박물관과 손잡고 지역사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교육 프로그램은 매주 2회 이뤄지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는 박물관 안내원(도슨트)이 직접 학교를 찾아가 강의한다. 전문성과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춘 이들의 해설은, 학생들이 더욱 생생하게 지역사를 배울 수 있게 돕는다. 사회과 교사 한 명이 맡던 지역화 교육을 외부 기관과 연계해 세분화・전문화한 것이다.
부산 남부교육청 류광해 장학사는 “현재 프로그램이 학생과 교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며 “시행 첫날부터 실시한 모니터링을 바탕으로, 교육 효과가 입증되면 내년 예산에도 편성해 확대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역사 교육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역화 교육의 지역사 비중을 높이고 전문화하는 시도가 이뤄져야 한다. 공주대 사학과 이해준 교수는 “타지 출신 교사는 지역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할 수 있다”며, 수업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지역 문화 자료 목록을 만들어 한국사는 물론이고 한국 문화 전체와 연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역사 교육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도 과제다. 이 교수는 “학교 성적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이상 지역사에 대한 의식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학생과 교사, 학부모가 함께 읽을 수 있는 교재를 개발하고 강연을 하는 등 지역사 교육의 가치를 일깨우는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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