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바람 밝은 달, 그곳에 산다] ④ 충주의 크로키 화가 문은희

해방 후 한반도의 정정이 점점 불안해지던 1948년, 가는 눈매의 키 작은 소녀가 서울 흑석동 산꼭대기의 ‘남관 미술연구소’문을 두드렸다. 어떻게든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무작정 전차를 타고 시내를 헤매다 도착한 것이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남관(1913~1990) 선생은 그녀를 보며 그저 허허 웃었다. 그날로 선생의 문하생이 된 소녀는 ‘남자들과 내외하느라’ 하루 종일 석고상만 보며 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선을 그렸다.

당시 풍문여고 2학년이었던 소녀의 검고 풍성하던 머릿결은 이제 듬성한 은발로 변했다. 지겨웠던 생활고, 남편과의 이혼과 사별, 국내 미술계의 무관심 속에 오직 그림 하나만 붙잡고 버틴 70여년 세월이었다. 한때 일본과 프랑스 등 해외 평단에서 ‘색채도 굴곡도 없이, 절대적이랄 만큼 선명하게 붓으로 누드를 표현한다’고 주목받았던 소원(小園) 문은희 화백(83). 충주호가 내려다보이는 충북 충주시 동량면의 화실에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겠다’며 여전히 붓을 잡고 있는 그를 지난해 11월 24일 만났다.

▲ 충주시 동량면 자택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문은희 화백. ⓒ 유순상

애 키우며 미대 공부 했지만 마흔까지 꿈 못 펼쳐

문 화백은 1931년 경기도 김포에서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서울 종로의 옛 화신백화점 근처에서 퍼팅장 형태의 골프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명동에서 ‘브라이드홈’이란 예식장을 운영하던 어머니 밑에서 부유하게 자랐다. 국악과 그림에 일가견이 있던 아버지는 성악을 전공한 두 여동생이 무대에 서는 것을 반대했지만 문 화백이 그림 공부하는 것은 반겼다. 그러나 딸을 일찍 시집보내던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문 화백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하게 된다. 남편은 고 황의철 한양대 교수. 결혼 당시 문 화백은 시댁에 ‘미술대학에 보내줘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문 화백은 만삭인 채로 홍익대학교 미대 입학시험을 봤다. 주변에서 “두 사람이 시험 보러 왔다”고 놀렸다. 첫 아들을 낳고 4개월 만에 미대 신입생이 됐다. 아침에 기저귀 빨아 널고 아기 울음소리를 뒤로하며 등교했다. 그날그날 친척과 이웃들 도움을 받아가며 어렵게 학교생활을 했다. 단체로 야외스케치를 나갈 때는 미대 친구들이 아이를 돌아가며 업어주기도 했다. 당시 남편은 공군장교로 복무 중이었는데, 대학교 2학년 때 둘째 아들을 또 낳았다.

“시댁에서는 결혼했는데 설마 그림을 배울까 했나 봐요. 그런데 난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해야 하거든. 친정에서 홍대 근처에 집을 마련해줘 애들 키우며 학교를 다녔지요.”

▲ 1959년 홍익대학교 동양학과를 여성 최초로 졸업할 당시 흑백사진이다. 두 아들을 안고 있다. ⓒ 문은희

문 화백이 대학교 3학년일 때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문 화백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혼자 두 아이를 키우고 남편 유학비까지 보내야 했다. 언제까지 친정에 손을 벌릴 수가 없었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지물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로 벽지에 산수화 등을 그리며 돈을 벌었다. 남편이 8년 만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당시 교수 월급 2만 5천원으로는 생활이 여의치 않았다. 1959년 28살 나이로 홍익대학교 동양학과 최초의 여성졸업생이 됐으나 이후 십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39살에 셋째(딸)를 낳은 뒤 참고 눌러 온 마음이 폭발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했죠. 누구에게 내 재능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었죠. 그림이 바로 나의 생명이고 삶이었기 때문이죠.”

살림살이 형편도 좀 나아진 덕에 세 아이를 가정부 두 명에게 맡기고 그림에 몰입했다. 10년여의 갈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1백호(162.2x130.3cm)짜리 그림 20점을 단숨에 그렸다. 대학시절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와 1만원지폐의 세종대왕 초상을 도안한 운보(雲甫) 김기창에게 배웠던 내공이 빛나기 시작했다. 산과 들의 풍경, 성난 파도 등을 거침없이 화폭에 담았다. 1975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첫 개인전은 성대하게 진행됐죠. 여러 선생님도 찾아오시고. 부산, 마산 등을 돌며 전국 전람회도 했지요. 그 당시에 큰 꿈은 없었어요. 나이 마흔 살에 감 하나만 잘 그려놓고 죽자는 생각을 했죠. 감만 15년을 그리기도 했어요.”

수묵으로 누드 크로키에 도전하다

▲ 문은희 화백은 충주시로 거주지를 옮긴 뒤 작품화하지 못했던 그림을 붙이며 콜라주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 유순상

하지만 주부라는 신분은 여전히 화가의 길에 족쇄가 됐다. 남편은 그림을 그만 두길 원했다. 문 화백은 49살에 이혼했다. 아이들이 다 커서 출가했으므로 마음이 덜 무거웠다. 하지만 막상 혼자가 되니 회한이 밀려왔다. 흘려보낸 세월이 억울했다. 격정적인 감정을 여성의 벗은 몸을 그리며 풀었다. 학생의 마음으로 돌아가 연필과 콩테(목탄과 흑연 등으로 만든 회화재료), 크레용이 닳도록 연습했다. 모델료가 비싸 혼자 화실에서 옷을 벗고 거울을 보며 그렸다.

“모필(毛筆/붓)은 다양한 질감과 입체감, 운동감을 표현할 수가 있어요. 또 먹의 농도에 따라 여성의 머릿결과 목, 엉덩이 등 자연 그 자체인 신체의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가 있죠. 덧칠해서 그려내는 서양화와는 격이 달라요.”

수묵으로 누드를 그려내는 일은 그러나 쉽지 않았다. 붓을 들고 약간만 머뭇거려도 화선지에 먹물이 번져버리기 때문이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하루 백 장을 그려도 온전한 한 장을 건지기 힘들었다. 수많은 파지가 나와 하루에 종이 값만 30만원이 훌쩍 넘기도 했다. ‘동양화가가 무슨 누드냐’며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의기소침할 때 스승 김기창 화백이 화실로 찾아와 “(수묵 누드는) 나도 못 그린다. (네가) 마티스보다 낫다”, “세계 제일이다”며 격려해 주었다.

“3시간 신들린 듯 붓을 휘두르다 보면 옆에 한지가 수북이 쌓여요. 마음에 드는 그림이 한 장이라도 나오면 저는 그림에 대고 절을 해요. 그 그림은 제가 그린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 예술과 현실을 잊은 무아지경에서 저절로 탄생한 거죠.”

▲ 문은희 화백의 수묵 누드 크로키 작품으로 1990년 일본 브래태니카 사전에 실렸다. ⓒ 문은희

1987년 문 화백은 조선호텔 화랑에서 국내 최초이자 아마도 세계 최초였을 수묵 누드 크로키 전시회를 열었지만 국내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런데 뜻밖에 일본 화단에서 관심을 보였다. 문 화백의 수묵 누드화집을 받아 본 일본 화가이자 동경전(東京展) 회장인 우사미 쇼오고가 일본 4대 미술전인 동경전 참여를 제안한 것이다. 이 전시회에 문 화백은 작품 12점을 내걸었다. 이듬해인 1988년 14회 동경전에도 작품을 선보였다. 미술평론가 와시오 도시히코는 문 화백의 그림을 칭찬하며 “모필로 그리는 묵의 농담과 윤갈(기름지고 마름)의 선에는 화가의 기량과 인간성의 모드가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보신적인 화가라면 피하고 싶은 일일 것”이라며 일본 미술계를 질타하기도 했다.

문 화백은 1989년 일본 동경 롯본기 스트라이프 하우스 미술관에서 개인기획전을 열었고 아사히 TV에 15분 동안 단독 출연하는 등 일본 대중매체에 크게 소개됐다. 미술전문출판사인 이와사키는 한국작가로는 유일하게 화집 <누드백태(百態)>를 냈다. 1990년판 일본 브리태니카 국제연감 미술부문에는 피카소, 칸딘스키와 함께 문 화백이 세계 작가 5명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이 시절 일본에서의 일정이 너무 고돼 이가 빠질 정도였다고 문 화백은 회고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나는 나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일본에서의 반응은 매우 적극적이었어요. 먹으로 그리는 누드 크로키는 잡념이 사라져야 잘 그릴 수 있어 그런 흥분은 좋지 않은데, 그래도 8년의 노력 끝에 이뤄낸 성과였기 때문에 기뻤어요.”

▲ 1989년 서울 바탕골 미술관에서 그린 34미터짜리 누드 크로키로 나일론면에다 인쇄했다. ⓒ 문은희

문 화백은 1989년 서울 바탕골 미술관에서 화가와 기자들만 모아놓고 ‘누드 해프닝’이란 퍼포먼스를 열었다. 여자모델 3명과 남자 모델 1명에게 몸을 꼬는 등 고통스런 자세를 취하게 하고 연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남자의 몸을 그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마치 신이 내린 듯 힘든 줄 모르고 가로 34미터짜리 누드를 그린 날이었다.

교수 자리 마다하고 작품에 매달렸지만 전시 공간 없어

“아름다움보다는 박진감이 느껴진다.” “로댕의 박진감과 마티스의 아라베스크(1931년 누드작품) 사이를 오가고 있다." 1992년 프랑스 파리의 한국문화원에서 문 화백의 개인전이 열렸을 때 세계 10대 미술지 중 하나인 오피스(OPUS)의 평론가 로제 브이에와 잔 룩 살로메는 문 화백의 작품을 극찬했다. 하지만 국내에선 여전히 문 화백의 작품세계에 무관심했다.

문 화백은 ‘죽을 때까지 그림이나 그리자’는 생각으로 1994년 충주시 동량면 충주호 근처로 내려왔다. 괴로울 때마다 법문을 들으러 찾아갔던 불교학자이자 미술평론가 김구산(83) 선생이 당시 그 근방에 살고 있어 내린 결정이었다. 남편도 그 때 충주로 내려와 재결합했지만 이듬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최근에는 두 아들이 문 화백 집 가까운 곳에 이사를 와서 문 화백을 돌보고 있다.

“조용한 곳에서 작품 활동만 하고 싶어서 교수 자리도 두 번 내쳤어요. 오로지 그림만 그려도 어렵거든. 여기와 내려다보는 충주호가 너무 아름답기도 하고.”

▲ 4.19 혁명을 추모한 작품이다. 문 화백은 촛불을 켜 놓고 종종 기도를 한다. ⓒ 문은희

문 화백은 요즘 버려진 종이, 즉 파지를 이용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작품으로 살리지 못한 누드습작을 뜯어 붙여 콜라주를 만들고, 아예 쓰지 못하는 종이는 짓이겨 종이 인형을 만든다. 주제는 윤회와 관계. 생을 정리한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4․19 혁명을 기리며 종이공예도 했어요. (1960년) 서울에 있을 때 그 광경을 가까이서 봤잖아요. 시위하던 청년들이 경찰차에 무더기로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만 봤어요. 항상 미안한 생각이 들었죠. 촛불이라도 켜 놓고 운동하던 사람들 기도드리려고 만들었죠.”

충주에 내려온 후에는 2001년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지역에서 전시를 해본 적이 없다. 전시할 공간을 못 찾아서다. 충주시도 처음에 관심을 보이는가 싶더니 잠깐이었다. 충주 화실에 작은 불이 난 적도 있어 화재로 작품들이 소실될까 늘 걱정이다. 외국에서 팔라는 것도 마다하고 간직한 것들인데 이러다 잃게 되지 않을까 불안하다. 문 화백은 소박한 바람을 털어놓았다.

“누드를 20여년 그리다보니 응어리가 모두 풀린 느낌이에요. 이젠 아무런 삶의 원한도 욕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어디선가 지원을 해준다면 쌓여 있는 그림을 걸어놓을 만한 미술관을 만들고 싶고, 그림을 나누기 위해 판화 제작도 하고 싶네요.”

▲ 문 화백의 콜라주 작품이다. 불교학자 구산 스님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모습에 대해 "상호관계에서만 존재성이 드러나는 연기(緣起)사상이 담겼다"고 평한다. ⓒ 문은희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리거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에는 유독 사연 많고 소신 있는 예술인과 공동체운동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단비뉴스>는 이렇게 충북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문화인과 활동가들을 찾아 나섰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인 CJB청주방송 황상호 기자가 글을 쓰고 서양화가 유순상 씨가 사진기와 붓을 들었다. (편집자)

*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