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채린 기자

▲ 박채린 기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매주 수요일 위안부 소녀상 앞에 모인 시민들의 손 팻말에서, 친일·역사왜곡 교과서 퇴출을 요구하는 시위대의 구호에서, 그리고 지난해 7월 동아시아컵 축구 한일전 응원석에서도 우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이 경구를 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는 오욕의 근현대사만이 아닌 것 같다. 개인 피해자만 4만 명이 넘는 동양증권 사태를 보면 ‘금융사고의 역사’도 꼭 기억해야 함을 확인하게 된다. ‘모피아’, 즉 재무관료 출신 금융인과 당국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잘못된 역사를 숨기고 지우면서 또 다른 파국과 희생자를 낳았기 때문이다.

동양 사태와 관련한 당국의 책임 논란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양증권은 당시 불법이었던 계열사 기업어음(CP) 판매로 1조원이 넘는 수익을 올렸지만 규제당국인 금융감독원은 이를 제재심의위원회에 보고하지 않았다. 2008년에는 같은 회사가 7200억원이 넘는 계열사 CP를 불법보유하고 있는 것을 알고도 금감원은 ‘문책성 경고’를 주는 데 그쳤다. 2009년 통과된 자본시장법으로 동양증권의 CP판매는 더 활기를 띠었고, 과도한 CP발행이 문제로 지적됐지만 금감원은 적극적으로 제동을 걸지 않았다. 

금감원의 이런 ‘눈감아주기’행태가 계속된 것은 동양그룹이 정․관․법조계 유력인사들을 무더기로 영입해 로비창구로 활용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의 끈끈한 정관계 인맥이 이 회사에 유리한 쪽으로 정책을 휘게 하고 감독당국의 칼끝을 무디게 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11월 6일 동양증권 관련 설명회에서 피해자들은 “(금감원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이냐”고 따져 물었지만 당국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대형사고가 터진 후 ‘침묵’으로 응수하는 감독당국의 행태는 저축은행 사태 때도 많은 이들을 피눈물 흘리게 만들었다. 피해자가 10만 명이 넘고 피해금액이 수십조원에 달하는 저축은행 사태 역시 정책당국의 잘못된 규제완화와 감독당국의 직무유기가 빚은 합작품이었다. 그러나 책임 있는 고위관료 중 누구도 이 사건과 관련해 문책 당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재무관료나 금감원 고위직들이 금융회사의 경영진·고문 등으로 ‘낙하산’을 타고 나가고, 나중에 다시 정부고위직으로 돌아오는 ‘회전문인사’는 우리 금융계의 불법과 비리가 좀처럼 뿌리 뽑히지 않는 원인으로 오래 전부터 지적돼 왔다. 또 금융사의 이해가 반영된 수상한 정책과 감독기관의 직무유기가 수많은 금융사고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도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청산되지 못한 친일(親日)’이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낳은 것처럼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는 관료와 감독기관’은 시장과 소비자의 거듭된 파탄을 낳고 있다.

검찰은 지난 7일 현재현 회장과 동양그룹 계열사 경영진 등 4명에 대해 사기․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사기성 CP와 회사채 발행 등을 통해 투자자들과 계열사에 1조원대의 피해를 입힌 혐의가 적용됐다. 그러나 이 사태를 방치한 정책 및 감독당국과 관련해서는 금감원의 담당부원장이 사표를 낸 것 외에 별다른 조치가 없다. 누가 어떤 정책을 잘못 추진했고, 무엇 때문에 감독과 제재조치가 그토록 소홀했는지 진상규명도 이뤄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금융피해사건의 역사’가 조용히 묻히고 있는 분위기다. 

지난해 10월 민주당, 정의당과 안철수·송호창 무소속 의원은 ‘제2 동양 사태’를 막아야 한다며 금산분리를 강화하고 독립된 금융소비자보호기구를 신설하는 내용의 법률 제·개정을 촉구했다. 동양그룹이 계열 증권사를 사금고처럼 활용한 것을 볼 때 금융과 산업자본의 분리는 은행 뿐 아니라 제2금융권으로 확대되어야 하며, 소비자보호를 위해 감독기관으로부터 분리된 독자적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치와 함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재벌 및 금융권에 ‘포획’된 관료와 감독기구가 ‘생선가게의 고양이’가 되는 것을 막는 장치다. 사고에 대한 진상규명을 시작으로 불법과 비리엔 엄정한 사법처리가, 부주의와 태만에 대해서는 도의적 문책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나아가 낙하산과 회전문 인사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현실성 있게 마련되어야 또 다른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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