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KBS파노라마, 시청자 아우르다 전문성 잃어

“16살 때 부터 시청해서 이제는 30살이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유일하게 tv수신료가 아깝지 않다고 느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mee)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대한 생각도 할 수 있게 되고 이 프로 아니면 어디서 이런 걸 배운답니까.” (***j1600)

15년 동안 안방을 찾았던 한국방송공사(KBS) <환경스페셜>이 지난 4월 3일 마지막 전파를 탔을 때, 게시판은 시청자들의 아쉬움으로 북적였다. 공중파 방송에선 유일하게 환경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이어서 평일 심야에 방송됐지만 ‘고정 팬’이 많았다.

KBS는 <환경스페셜> 등 이른바 4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지난 4월 11일부터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KBS파노라마>를 선보이고 있다. <KBS파노라마> 신설은 ‘공영성 강화’와 ‘다양성 확대’를 내세운 봄 개편의 일환이었다. ‘정치, 경제, 역사, 자연, 사회, 문화, 인물, 환경, 과학, 문명, 국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공영방송 KBS의 역량을 모두 모아 만든 최고의 다큐멘터리만을 선사’하겠다는 기획의도도 밝혔다. 첫 방영 후 반 년이 넘게 지난 지금, 이 약속은 잘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말랑말랑한 아이템 선정, 접근 방식도 아쉬워

신설이후 지난 12월 10일까지 <KBS파노라마>엔 모두 66편의 프로그램이 나갔다. KBS가 기획의도에서 스스로 밝힌 ‘정치, 경제, 역사, 자연…’ 등 10개 분야 별로 각 프로그램을 분류해 봤다. 여러 분야를 함께 다룬 경우 편의상 중점적으로 다룬 분야에 넣었다. 예를 들어 경제 문제와 여기서 파생된 사회문제를 다룬 ‘가계부채 1000조, 빚 권하는 사회’편은 경제 범주에 포함시켰고, ‘아베의 질주’는 국제 분야에 넣었다.

▲ 전반적으로 자연/환경, 과학 다큐멘터리 비중이 줄어들었다. ⓒ 이성제

분석 결과 전체 66편 가운데 27편이 기존의 <KBS스페셜>에서 다룰법한 소재였고, 19편(역사․문명)은 <역사스페셜>, 14편(자연․환경)은 <환경스페셜> 소재였다. 전반적으로 소재 선택이 특정 분야에 편중된 것은 아니었으나 환경과 과학 분야 전문 다큐멘터리는 이전에 독자적인 프로그램이 있을 때 보다는 횟수가 크게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환경스페셜>은 ‘동물실험’ ‘공장식 축산’ 등 일상과 밀접한 환경 이슈들을 자주 다뤘다. ‘4대강 사업’, ‘수변 습지’ 등 환경 관련 고발 아이템들도 놓치지 않았다. ‘철거촌 고양이’ 편 등에선 도시 속 생태를 포착해 참신하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생태계 파괴의 원인을 기후온난화, 재해/사고, 관리 부재, 인간의 편리 추구 등 다차원적으로 접근했다. 과거 다른 환경 다큐들이 개발, 환경오염 등 정형화된 틀로 이 문제에 접근한 것과는 결이 달랐다. <환경스페셜>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아래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다양한 관계를 고찰해왔다.

▲ 사향노루, 게, 고래상어 등 생태 관찰에 머물고 있는 <KBS파노라마>. 과거 <환경스페셜>이 보여줬던 참신한 자연/환경다큐멘터리는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 이성제

<KBS파노라마>에는 <환경스페셜>이 이전에 보여줬던 자연/환경 다큐가 눈에 띄지 않는다. 신설 초기에 방송된 ‘한반도 야생은 살아있다’ 4부작은 표범, 담비, 여우, 사향노루 등 야생 동물의 생태를 추적한 내용이었고, 이후 프로그램은 바다 게와 어미 새, 고래상어의 생태 관찰 위주였다. ‘밤게가 앞으로 걷는 이유’ ‘바다청년과 고래상어의 우정’처럼 다소 가벼운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숙고하기보다 자연을 대상화해서 보고 즐기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청자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자연, 환경 다큐도 필요하다. 그러나 방영 횟수를 줄이는 대신 온 역량을 쏟아 만든다는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가 흥미 위주로 가는 게 과연 바람직할까?

역사 분야에서도 아쉬움이 있다. 역사 부문으로 분류된 19편 중 석굴암, 고인돌 등을 다룬 ‘문명’ 다큐멘터리가 지금까지 6편이나 전파를 탔다. 지난 1년 동안(2012년 12월~2011년 12월) 방송된 <역사스페셜> 40편 중 문명 탐구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5편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KBS파노라마>의 역사 분야에서 문명 소재의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명 관련 다큐의 기획의도를 살펴보면 “석굴암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가?” “한반도 선사시대 문명은 어디에서 기원했고, 수천 년 전 우린 조상들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프로그램들이 나간 시기는 나라 안팎에서 역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논란이 지속되던 때다. <KBS 스페셜>이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이유다.

▲ <KBS파노라마>의 역사 부문은 '문명'을 다루고 '기념일 기획물'을 소화하느라 바빴다. ⓒ 이성제

문명 탐구를 제외한 <KBS 스페셜>의 나머지 역사 다큐 13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를 다룬 작품이다. 현충일, 정전60주년, 광복절 등 ‘기념일 기획물’ 5편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재일동포의 사연 등 주로 개인사에 초점을 맞췄다. 나머지 8편도 구한말 백정 아버지를 둔 서양 의사, 한국전쟁 시기 합창음악과 예술가의 사연 등을 다뤘다. 과거 <역사스페셜>이 ‘독립운동가’와 ‘양심적 지식인’에 초점을 맞추며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게 한 것과 사뭇 다르다.

시청자의 관심은 끌지만, 문제의식을 잃어

물론 <KBS파노라마>가 방송한 다큐 가운데 호평을 받은 작품도 적지 않다. 개편 초기에 나온 ‘가정의 달 기획, 보이지 않는 아이들’ 2부작은 열악한 환경 속에 방치된 아이들의 실태를 전달해 반향을 일으켰다. 방임 아동들을 돕고 싶다는 의견이 게시판을 채웠고, 닐슨코리아 기준으로 10% 안팎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지난 9월 추석 기획으로 방송된 ‘비와 생명’은 ‘9월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
시청률 측면에서는 일단 성공적이다. 개편 전 같은 시간대 12주 평균 시청률인 6.4%보다 1~2% 높은 8% 수준에서 시청률이 형성돼 있다. 같은 시간대에 <메디컬 탑팀>, <상속자들>과 같은 드라마와 <정글의 법칙>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편성돼 시청률 경쟁이 치열한데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 일부 드라마보다 시청률이 높게 나올 때도 있다.

그러나 시청률만으로 공영방송의 프로그램을 평가할 순 없다. 국민들의 수신료로 제작되는 만큼 공영성 추구가 가장 우선돼야 한다. 실제 KBS도 누리집에 “사회환경 감시 및 비판, 여론형성, 민족문화창달이라는 언론의 기본적 역할을 수행”하는 게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는 KBS가 “우리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최대한 전달하고, 소수 의견에 주목하고, 수용자가 사회 전체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숙의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윤성도 정책실장은 “현재 제작되는 프로그램은 종합편성채널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며 “KBS만이 제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편집기술과 컴퓨터 그래픽(CG)으로 시각효과를 높였는지는 몰라도 주제 의식이 흐릿하고 사회적인 의미가 없다면, 다큐의 품질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덧붙였다.

아이템 공모 형식과 전문성 상실

<KBS파노라마> 제작진은 신설 한 달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아이템 공모 형식의 제작 시스템을 시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략 2달에 1번꼴로 아이템을 공모로 받아 책임 프로듀서 3명과 국장이 모여 아이템을 선정하는 방식이다. 윤성도 정책실장은 “과거에는 책임프로듀서(CP)가 책임지는 방식이어서 제작 자율성이 보장됐다”며 “현재 아이템 공모 형식에서는 사실상 민감한 아이템이 걸러지기 쉽다”고 말했다. 윤 실장은 석굴암 편 등을 거론하며 <KBS파노라마> 신설 이후 KBS 다큐가 연성화되면서 시대정신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KBS파노라마>에서 환경 부문을 담당하는 이광록 PD는 “과거엔 환경스페셜 마인드를 가진 제작자가 모여 구체적인 아이템을 다룰 수 있었다”며 현재는 “다양한 분과의 사람이 아이템 선정에 참여하다 보니 보편적인 관심사에 주목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연성화’라고 따지기 전에 연성화의 기준부터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PD는 “소재 선정 등에 대한 내부 비판이 있지만, <KBS파노라마>라는 그릇의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 <역사스페셜>, <환경스페셜>이 고정된 목표를 가지고 이 분야에 관심 있는 특정 시청자를 겨냥했다면, <KBS파노라마>는 대다수의 보편적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런 틀 안에서 (특정 분야를) 깊이 있게 다루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일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다 보니 이전에 보여줬던 고유의 전문성은 일정 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 유민지 활동가는 “KBS에서 탐사, 재미, 전문 등 프로그램 다양성이 구비돼 있다면 재미를 추구해도 된다”며 “하지만 ‘파노라마’로 묶인 현재는 비판적인 시선을 다 없애버린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오락적인 부분이 덜해도 공영적 가치가 분명하고 제작할 필요가 있다면, 공영방송은 그런 부분을 지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는 “쉽게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은 수용자가 별 노력 없이 보기 때문에 무의미할 수 있다”며 “공익과 재미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공영방송의 특수한 질을 추구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KBS 파노라마>가 공익과 시대정신이라는 공영방송의 가치를 망각하지 않고 ‘최고의 다큐’를 선보이겠다는 약속을 지켜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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