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준용 기자

▲ 박준용 기자
지난해 2월 26일 저녁 7시 무렵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시 샌포드의 한 도로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히스패닉계 백인 자율방범대원인 조지 짐머맨이 17세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을 뒤쫓고 있었다. 그는 소년이 마약 거래 같은 수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의심했고, 말다툼과 몸싸움 끝에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마틴은 도로변에 엎어져 숨져있었고, 소년의 소지품에서는 아버지에게 갖다 주려 편의점에서 샀던 음료수 외에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비무장 상태의 고교생을 경찰도 아닌 민간 자경단원이 총으로 쏜 이 사건에 대해 여론의 비난이 빗발쳤고 짐머맨은 그해 4월 2급 살인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플로리다 형사법원은 지난달 13일 짐머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상대로부터 위협을 느낄 때 총기를 비롯한 살상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정당방위법'을 적용한 것이다.

▲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짐머맨은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 SBS 갈무리 화면
이 판결이 알려지자 마이애미, 뉴욕, 로스앤젤리스, 오클랜드 등지에서 흑인, 백인을 포함한 수천 명이 법원 판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특히 판결 이틀 뒤 오클랜드에서는 시위대가 대형마트를 습격하고 도로를 점거하는 등 유혈사태로 번질 조짐까지 보였다.

미국 사회가 이 사건에 대해 분노한 이유는 짐머맨이 ‘흑인은 잠재적 범죄자’라는 인종차별적 편견에 따라 행동했다는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는 마틴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긴급신고 911에 전화를 걸어 “마약에 관련된 것 같은 흑인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며 거듭 ‘흑인’을 언급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공권력이 정당방위법을 인종차별적으로 적용한 사실도 드러났다. 지난 4년간 흑인을 사살한 백인에겐 정당방위가 인정된 비율이 34%였고 백인을 사살한 흑인에 대한 적용 비율은 10분의 1도 안 되는 3.3%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짐머맨의 편견에는 미국사회의 인식이 투영돼 있었던 셈이다.

인종갈등, 미국만의 문제일까

미국의 흑백갈등 만큼 심각하진 않지만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로 접어든 우리나라에도 다른 인종이나 이주민에 대한 차별이 예사롭지 않다. 지난해 조선족 남성이 여성을 토막 살해한 ‘오원춘사건’에 대한 반응이 대표적이다. 당시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개설된 `조선족 전면 추방 청원 운동`에 1만 명이 넘게 서명했다. 조선족 범죄자 한 사람의 소행을 조선족 이주민 전체의 문제로 일반화한 것이다. 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중국인이 10월 10일에 인육을 먹는다’는 근거 없는 괴담이 퍼지기도 했다. 지난 2009년에는 인도출신 보노짓 후세인 씨가 버스에서 승객으로부터 “더럽다”, “냄새난다”는 등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출동한 경찰관조차 보노짓 씨에게 인종차별적 폭언을 쏟아낸 사건이 있었다.

공권력의 홀대도 만만치 않다. 지난 2010년 외국인이 입국할 때와 장기체류하기 위해 등록할 때 지문과 얼굴 정보를 제공토록 하는 '출입국관리법개정안‘이 발효됐다. 지난 설연휴에는 경찰이 "전국 주요 외국인 밀집 지역에 대한 집중 치안 활동을 실시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두 사례는 다분히 외국인을 ’우범집단‘으로 보는 차별적 인식에 근거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형사정책연구원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최근 5년 간 외국인의 범죄율은 내국인 범죄율보다 오히려 낮았다.

이렇게 제도적, 관습적 차별이 뿌리 깊은 가운데 ‘다문화’와 관련한 각종 지원제도를 쏟아내는 정부의 정책은 이율배반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이주민 출신 첫 국회의원인 새누리당의 이자스민 의원은 “사람들은 다문화라는 단어에서 한국인은 뺀다”고 꼬집었다. 다문화라는 표현을 통해 이주민을 대상화한다는 것이다. 대상화된 이주민은 연민의 대상일 뿐 주체로 존중받지 못한다.

우리 내부의 이주민 차별과 전쟁, 지금부터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를 싣고 오면서 시작된 미국의 인종갈등은 수백 년의 뿌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무수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 흑인의 가난과 소외 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많다. 버락 오바마라는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짐머맨의 무죄판결 뒤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 곳곳에서 시위대의 행진이 끊이지 않고, 일부에서는 “지금부터 전쟁이다”라는 과격한 구호까지 나오고 있다.

▲ 로스엔젤레스(LA), 시카고 등 미국 전역에서 짐머맨 무죄판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 SBS 화면 갈무리
결혼 이주여성, 외국인 노동자의 증가 등으로 앞으로 다문화가 더욱 급진전될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떨까. ‘다문화’로 포장한 ‘그들’을 ‘우리’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인식의 전환, 그리고 그에 걸맞는 법적 제도적 정비를 서두르지 않는다면 우리사회도 언젠가 “지금부터 전쟁이다”하는 구호 속에 휩싸일지 모른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총탄만큼이나 잔인한 폭언으로 이주민들을 공격하는 ‘짐머맨’들이 인터넷 등 곳곳에서 맹활약 중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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