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거대한 나선형을 만들어간다는 것, 영화 '가여운 것들'

※이 글은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극장 개봉 전 '아카데미 기획전'을 통해 지난 달 시사했음을 알립니다.

泰山不辭土壤 故能成其大 (<사기>, 사마천)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에는 시황제가 통일제국을 만드는 일을 도운 외국 출신 유능한 인재가 많았는데, 어느 날 시황제가 이들을 추방하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렸다. 초나라 출신으로 자신도 추방의 대상이었던 책사 이사는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시황제에게 축객령을 거두어들일 것을 설득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이 상소문이 유명한 간축객서(諫逐客書)다. 泰山不辭土壤 故能成其大. 태산불사토양 고능성기대. 간축객서의 한 구절이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높은 산이 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사의 주장을 받아들인 시황제는 통일의 과업을 이룬다. 이사는 포용적인 인재 등용을 강조하며 이 말을 했지만, 나는 경험과 결부해서 이 말을 즐겨 인용한다. 세계에 대한 경험의 양과 우리의 성장 속도는 정비례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세계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우리를 성숙한 인물로 만든다.

나와 같은 생각을 최상의 예술로 구현한 영화가 있다. 그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 ‘세계를 적극적으로 경험하면서 우리의 인생은 진정으로 시작되며, 이러한 경험의 기반 위에서 우리는 성장한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最’(최)라는 접두사를 남발하는 게 참 촌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작품이 연출과 연기, 미술이 최상급에 이른 영화라는 말을, 나는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뭉크가 그린 듯한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강으로 투신하는 오프닝숏을 보면서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이 영화 속 이야기가 펼쳐질수록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찬란하고 회화적(繪畵的)인 미장센(mise-en-scène), 배우들의 경이로운 연기,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영화적 기예(技藝).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 감독이 말한 “꿈으로서의 영화, 음악으로서의 영화”가 이런 것이구나, ‘가여운 것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기이한 동화, ‘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의 주인공 벨라. IMDB
'가여운 것들'의 주인공 벨라. IMDB

‘가여운 것들’은 그리스 출신 영화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여덟 번째 장편 영화다. 원작은 스코틀랜드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소설 ‘가여운 것들’(1992)이다. 란티모스 감독은 ‘가여운 것들’로 지난해 제80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관객들은 주연의 탁월한 연기를 찬탄한다. 엠마 스톤이 주인공 벨라를 연기했다. 그녀는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 시상식,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와 영국 아카데미 등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3월 11일에 있을 제96회 아카데미상의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다. 엠마 스톤의 연기는 진정 경이롭다. 영화 초반의 그녀와 후반의 그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걸음걸이가 다르고, 말투가 다르고, 표정이 다르고, 자세와 동작이 다르다. 크게 다르다.

벨라 벡스터는 외과의사 고드윈 벡스터 박사(윌렘 대포)의 피조물이다. 강에 빠져 자살을 시도한 임산부가 벡스터 박사의 실험실에 도착한다. 그는 제왕절개로 자궁에서 꺼낸 태아의 뇌를 뇌사 상태에 빠진 태아의 어머니에게 이식하고 벨라라는 이름을 붙인다. 어머니의 육체에 이식된 벨라의 뇌는 매우 빠르게 지적으로 성장하고 벡스터 박사는 이를 기록하기 위해 자신의 학생인 맥스를 조수로 고용한다. 어느 날, 잠에서 깬 벨라는 침대에서 자위행위를 하며 성적인 쾌감을 알게 된다. (감독은 벨라의 이 첫 성적 유희를 롱테이크숏으로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를 전달한다.) 벡스터 박사는 몸집은 성인이지만 정신은 어린 벨라의 삶을 통제하려 했다. 집 밖은 위험한 곳이라 세뇌하는 벡스터. 벨라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계속 커지지만, 그녀에게는 단 한 번의 철저하게 통제된 외출만 허락됐을 정도였다.

벨라를 곁에서 지켜보던 맥스는 벨라를 사랑하게 되고, 벡스터 박사는 그에게 이 집을 떠나지 않는 조건으로 벨라와 결혼할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결혼 계약서 작성을 위해 벡스터 박사의 집을 방문한 변호사, 던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의 등장은 벡스터 박사가 구축한 질서와 세계를 파괴한다. 저속한 바람둥이인 던컨은 벨라의 성적 충동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자신과 함께 리스본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유혹한다. 벡스터 박사는 벨라의 여행을 저지하지 않는다. 그는 벨라가 여행을 떠난 이후 왜 여행을 묵인했냐는 맥스의 항의성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벨라는 인간으로서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벡스터 박사는 빠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벨라의 인생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쩌면 그간 벨라의 삶을 엄격하게 관리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녀에게 여행을 허락할 것일 수도 있으리라. 던컨과 함께 벨라는 런던에서 리스본으로, 리스본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알렉산드리아에서 파리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인생이 여행이라면,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가여운 것들'의 벨라. IMDB
'가여운 것들'의 벨라. IMDB

감독의 전작에서처럼 ‘가여운 것들’에서도 어안렌즈와 광각렌즈의 과감하고 빈번한 사용이 인상적이다. 현악기로 만들어내는 기괴한 클래식 사운드도 그렇다. 다양한 렌즈의 활용과 특이한 클래식 사운드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1980)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가여운 것들’은 시각적으로는 ‘시계태엽 오렌지’(1971)의 광각렌즈 활용과 초현실주의적 미장센을, 청각적으로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와 ‘아이즈 와이드 셧’(1999)에 삽입된 헝가리 출신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의 음악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스토리에서는 스페인 출신 거장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향이 난다. 그가 28살에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만든 첫 작품인 ‘안달루시아의 개’(1928)는 초현실주의(Le surréalisme) 영화 미학의 시초로 평가된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이나 ‘자유의 환영’(1974)은 위선적이고 허위의식이 지배하는 상류층을 풍자하는 블랙코미디를 초현실주의적 작풍으로 그린 영화다. 주제의식의 측면에서 ‘가여운 것들’은 이 두 영화를 예술적으로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여운 것들’에는 란티모스 감독의 고유한 영화적 인장(印章)이 있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들을 이렇게 규정하고 싶다. 작은 무대에 모인 인물들의 부조리극. ‘자유의 환영’과 비교할 때, 이번 영화는 상류층 풍자에 그치지 않는다. 란티모스 감독은 ‘가여운 것들’을 통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인간의 정신적 성장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한다.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우리의 여행은 우리가 시작한 곳에 도착하며 끝날 것이다.) (<Four Quartets>T. S. Eliot)

이 영화를 보편적인 인간 성장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다. 인간은 ‘발견’과 ‘경험’을 통해 어른이 된다. 발견과 경험은 변증법적으로 작용하며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간다. 영화에서 발견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벨라는 첫 자위행위를 통해 자신의 성적 본능, 즉 자신의 원초적인 생물학적 본능을 발견한다. 본능의 발견은 벨라가 세계를 경험하기 위한 출가를 감행하는 원인이 된다. 집을 떠난 벨라는 경험을 통해 세계를 발견한다. 리스본에서 출발해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증기선에서 그녀는 독서의 즐거움을 배우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세상에는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영화 초반에는 어법에 맞지 않는 말, “No now.” 등을 사용하던 벨라는, 증기선에서 “경험적으로(empirically)”라는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던컨을 놀라게 한다. 벨라는 자신의 동물적 본능을 발견한 이후 자신의 인간적 이성을 발견했다. 긴 여행 끝에 그녀가 궁극적으로 발견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본능의 발견과 이성의 발견 이후 자신의 자아를 발견함으로써 벨라는 어른이 된다. 자아를 발견한 벨라는 벡스터 박사에게 자신은 의사가 될 거라고 선언한다. 세계를 경험하고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역사언어학(historic linguistics)적으로, ‘어른’의 어원이 ‘얼우다’라는 학설이 있다. ‘얼(우)다’는 성행위를 지칭하는데, 백제 무왕이 창작했다는 향가 ‘서동요’에서 그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선화공주님은/ 남 그으기 얼어 두고/ 맛둥(薯童) 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양주동 박사 번역본)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궁정을 나와 서동과 잔다는 의미다. 얼운 사람, 즉 성행위를 경험한 사람이 어른이라는 우리말 ‘어른’의 어원은, 이 영화와 결부하여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벨라의 경우에도 성적 경험이 그녀가 어른이 되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가여운 것들’을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로우’(2016)나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올모스트 페이머스’(2000)와 같은 성장(coming-of-age) 영화로 볼 수 있다. 란티모스 감독은 심원(深遠)한 존재론적 감수성으로 벨라의 성장을 기록한다. 흥미로운 점은 벨라가 성장을 통해서 끝끝내 다다른 지점이 자아의 발견이라는 사실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고유한 특성은 ‘존재물음(Seinsfrage)’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묻는다. 지적으로 성장한 벨라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욕망을 지니게 된다. 그녀의 여행은 성적(性的)인 동기와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했지만, 그녀의 지성이 발달한 이후 그녀의 여행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으로 변모한다. 그녀의 마지막 질문은 자신의 존재론적 시원(始原)이다. 나의 시작은 어디일까. ‘가여운 것들’은 벨라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며 끝난다. 성장영화로서의 ‘가여운 것들’은 결국 벨라가 존재물음의 답을 찾아가며 어른이 되는 서사의 영화다.

‘가여운 것들’을 ‘페미니스트 로드 무비’로 규정할 수도 있겠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91년 작 ‘델마와 루이스’처럼 말이다. ‘가여운 것들’에서 벨라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주체들은 모두 남성이다. 벡스터 박사는 벨라를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던컨은 벨라를 성적으로 지배하고 소유하고자 한다. 던컨은 그녀의 지적인 성장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은 여성의 성생활을 죄악시하며 벨라가 여성의 성감대 중 하나인 클리토리스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를 원한다. 감독의 전작들에서는 인물들을 억압하는 권력의 주체 또는 질서의 정체가 모호했다면, 이번 영화에서의 그것은 또렷하다. 가부장적 관습과 사고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체위를 보여주는 수많은 섹스 신이 나온다. 감독은 클로즈업숏을 통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벨라의 표정을 보여주며 그녀가 느끼는 성적 쾌감을 전한다.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섹스 신은 벨라가 여성인 친구에게 성기 애무(커닐링구스)를 받는 신이다. 이 신에서도 벨라의 얼굴을 클로즈업숏으로 촬영하는데, 그녀는 전보다 강한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가여운 것들’의 섹스 신의 배치는 벨라의 자위행위에서 시작해 여성과의 섹스로 끝난다. 영미권의 평론들 중에는 이를 성기 삽입 없이 혼자 또는 여성과의 성행위를 통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벨라를 통해 여성의 성적 독립성을 드러내는 구조라고 하는 해석들도 있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들은 부조리극이라는 맥락에서 ‘가여운 것들’의 텍스트를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악의가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선의가 악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벨라를 여행 기간 동안 성적으로 소유하겠다는 던컨의 악의는 벨라가 성숙한 어른 여성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반대로 알렉산드리아의 빈민들을 돕겠다는 벨라의 선의는 결과적으로 던컨이 파멸하는 원인이 된다. 앞서 언급한 사마천의 ‘사기’는 백이열전(伯夷列傳)으로 시작한다. 이 열전에서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에 대한 공자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의 독창적인 주장을 펼친다.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즘 시대에 들어서면서 하는 행동은 규범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편안하게 즐거워하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가? 그른가?”

생득적인 불공정과 불공평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세상의 메커니즘. 란티모스 감독은 데뷔 이후 세계의 부조리성(不條理性)을 끊임없이 탐구해 온 작가다.

블랙코미디로서의 이 영화의 유머는 아직 사회화되지 않은 벨라의 사회적 문법과 매너에 대한 무지가 드러날 때 자주 발생한다. 자위행위가 성적 쾌감을 가져온다는 것을 학습한 벨라는 맥스 앞에서 오이를 가지고 자위행위를 한다. 어떤 감정은 사회적으로 학습되는데, 수치심을 배우지 않아 모르는 벨라에게 맥스는 벨라의 행위가 상류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행위라고 말해준다. 리스본의 식사 자리에서 벨라는 직설적이고 노골적으로 성적인 언사를 반복적으로 입에 올린다. 이에 크게 당황한 던컨이 그녀의 언행의 부적절성을 지적한다.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사회에서 허용되는 언행을 학습하며 사회적으로 성장한다. 조지 버나드 쇼의 희극 ‘피그말리온’의 일라이자처럼.

란티모스라는 이상한 함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과 엠마 스톤.  IMDB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과 엠마 스톤.  IMDB

“You are in my sun.” (<가여운 것들>, 극 중 인물 벨라의 대사)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이상한 함수다. 신화적 또는 문화적 모티브가 정의역이라면, 란티모스라는 함수를 통과해 생산되는 독창적인 영화들은 그의 치역이다. 그리스신화 속 이피게네이아의 비극과 인어공주와 프랑켄슈타인이 란티모스의 해석을 거쳐 각각 ‘킬링디어’(2017)와 ‘가여운 것들’이 되는 식이다.

‘가여운 것들’의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유람선에서 벨라는 지적인 인물들과 교류하며 지성의 세계를 발견한다. 육체적·성적 쾌락과는 구별되는 정신적·지적 쾌락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던컨은 벨라의 지적 능력이 향상되는 것이 못마땅하다. 책을 읽는 그녀를 던컨이 방해하자 벨라가 그에게 말한다. “당신이 제 해를 가리고 있어요. (You’re in my sun.)” 누가 떠오르는가? 디오게네스가 떠오르지 않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유명한 일화. 알렉산더 왕이 그를 찾아와 그에게 원하는 소원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철학자가 대왕에게 말한다. “당신이 제 해를 가리고 있어요.” 그에게는 햇볕을 받으며 사색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알렉산더 왕이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한 이야기까지도 유명하다. 디오게네스의 일화가 란티모스라는 함수를 통과해 만들어진 상징적인 신(scene). 인위적인 또는 세속적인 전통이나 가치를 부정하고 냉소한 견유주의(犬儒主義) 철학자의 일화를 - ‘cynical’(냉소적인)의 어원이 ‘cynics’(견유주의자)다 – 영화적으로 변용함으로써 란티모스 감독은 모국의 지적 유산을 상속한다.

감독은 비현실적이고 자체적인 체계와 질서에 의해서 운영되는 작은 세계를 창조한 후 그 세계에 인물들을 집어넣고 그들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을 즐겨왔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송곳니’(2009)에서는 가부장적 질서가 작동하는 집에 갇힌 한 가족이 등장하고 ‘더 랍스터’(2015)에게서는 45일 안에 연애를 시작하지 않으면 동물로 변하는 호텔에 자진해서 입소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는 앤 여왕의 궁정(宮廷) - 국가 최고의 집이지만 왕은 궁에서 평생 산다는 점에서 궁정도 일종의 감옥으로 생각할 수 있다 - 속 세 여자의 이야기다. 자녀를 집에 유폐하는 가부장적 아버지는 전작 ‘송곳니’에서도 등장했다. ‘송곳니’의 아버지는 곧 성인이 되는 아이들에게 집 밖은 매우 위험한 곳이라고 세뇌한다. 벡스터 박사도 벨라에게 집 밖에 있는 세상은 위험하다고 끊임없이 가르친다.

개인을 압도하는 막강한 사회적 질서의 부조리와 불합리성을 일관적으로 탐구해 온 감독은 ‘가여운 것들’에서 운명에 대한 시각의 변환을 드러낸다. ‘더 랍스터’와 ‘킬링디어’의 인물들은 자신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질서, 권력과 운명에 순응한다. 벨라는 그들과 다르다. 벡스터 박사가 창조한 세계에서 탈출하고 주체적인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계를 탐닉한다. 암으로 죽어가는 벡스터 박사와 벨라의 대화는 이 영화를 서사적으로 요약한다. 박사가 자신을 창조했다고 말하는 벨라에게 그는 답한다.  “벨라 벡스터는 네가 만든 거야.”

나선형의 인생

인생에도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나선형이 아닐까. 빙글빙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고 느껴지지만, 우리의 둘레는 끊임없이 확장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 또는 성장한다는 것은 자신에게서 세계를 향해 인생의 넓이를 확장하는 과정일 것이다. 같은 시간을 산 두 사람이라도, 인생의 넓이는 크게 다를 수 있다. 세계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며 경험을 쌓는 사람의 인생은 거대한 나선형이겠지. 사람은 죽기 전에, 하지 말았어야 했지만 했던 일이 아니라,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던 일 때문에 후회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마지막 감정이 회한이라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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