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기] 부자(父子) 가족 복지시설의 수도권 집중 문제

왕십리역 1번 출구에서 500미터(m)쯤 걸은 후 연립주택이 즐비한 골목 사이를 지나다 보면 6층짜리 회색 건물이 보인다. 철제로 된 대문 옆에는 조그맣게 '진각 선재누리'라고 적힌 은색 명패가 걸려있다. 이곳은 한부모가족지원법에 따라 한부모 부자(父子) 가족이 보증금이나 월세 부담 없이 최대 7년간 거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복지시설이다.

서울시 성동구에 있는 부자 가족 주거 지원 시설 선재누리. 선재누리 제공
서울시 성동구에 있는 부자 가족 주거 지원 시설 선재누리. 선재누리 제공

복지시설의 생활실은 방 2개와 거실 1개, 화장실을 갖춘 14평형의 단독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에는 공용 식당과 헬스장, 독서실 등이 있고, 옥상에는 작물을 키우는 텃밭도 있다. 부자 가족은 이곳 식당에서 전문 영양사가 만든 밥을 삼시세끼 무료로 먹을 수 있다. 퇴소할 때는 자립지원금 1,000만 원도 받는다. 복지시설은 부자 가족이 주거비나 식비 등을 절약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다.

시설 수, 정원, 위치까지…소외된 부자 가족

하지만 부자 가족을 위한 복지시설은 전국에 단 3곳뿐이다. 전체 정원은 45세대에 불과하다. 반면, 어머니와 자녀로 구성된 모자(母子) 가족을 위한 복지시설은 전국에 총 46곳이 있다. 여기에 미혼모 시설까지 포함하면 110곳에 달한다. 정원은 무려 1305세대 578명이다. 부자 복지시설은 시설 수는 물론 수용 인원에서도 모자 복지시설과 많게는 36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2023년 한부모가족 복지시설 지역별 현황. 그래픽 김다연
2023년 한부모가족 복지시설 지역별 현황. 그래픽 김다연

게다가 몇 없는 복지시설마저 수도권에 몰려 있다. 부자 복지시설은 서울 성동구와 강서구에 각각 1곳, 인천 남동구에 1곳이 있다. 그 외 지역에는 단 1곳도 없다. 반면, 모자 복지시설은 세종시를 제외한 전국 16개 광역시도에 골고루 설립돼 있다. 비수도권에 있는 부자 가족은 모자 가족보다 복지시설이 주는 혜택에서 소외된 것이다.

한부모가족 5가구 중 1가구는 부자 가족

2022년 한부모가족 수급 가구 현황. 그래픽 김다연
2022년 한부모가족 수급 가구 현황. 그래픽 김다연

국가통계포털을 보면, 2022년 말 기준 조손가정을 제외한 한부모가족 수급 가구는 총 189,114가구다. 이 가운데 청소년 모자 가구를 포함한 모자 가구는 151,733가구로, 전체 한부모가구의 약 80%를 차지한다. 부자 가구는 37,381가구로, 비율로는 20%에 해당한다. 한부모가족 5가구 가운데 1가구는 아버지와 자녀로 구성된 셈이다.

복지시설이 위치한 지역에 부자 가족이 집중된 것은 아니다. 복지시설 2곳이 있는 서울에 사는 부자 가족은 총 4,649가구로 많은 축에 속하지만, 경남 3,143가구, 부산 2,855가구 등 비수도권 지역에 사는 부자 가족도 서울과 비교해 적지 않다. 나머지 복지시설 1곳이 있는 인천의 부자 가족은 2,600가구로, 시설이 없는 경남과 부산보다도 가구 수가 적다.

2022년 한부모가구 중 지역별 부자 가구 비율. 그래픽 김다연
2022년 한부모가구 중 지역별 부자 가구 비율. 그래픽 김다연

한부모가구 가운데 부자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오히려 대부분 지역이 수도권보다 높다. 지역별 부자 가구 비율은 전남이 32.0%로 가장 높고, 이어 제주(30.0%), 경북(28.8%), 경남(27.6%) 전북(27.4%), 강원(27.3%), 충남(27.1%) 등 순이다. 반면, 시설이 있는 서울과 인천은 각각 22.6%와 22%에 불과했다.

"시설 수요 적어…요즘은 임대주택 가는 추세"

비수도권에 사는 부자 가족이 적지 않은데도 복지시설이 아예 없는 건 적은 수요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여성가족부 한부모가족 복지시설 담당 주무관은 <단비뉴스>와의 통화에서 "복지시설은 지자체나 시민단체 같은 법인이 설치할 수 있다. 수요가 있으면 당연히 시민단체 등이 나서서 움직일 텐데, 부자 복지시설은 설립하겠다고 나서는 단체가 없다"고 말했다.

수요가 부족한 이유로는 정부의 한부모가족 주거지원 정책이 확대된 점을 꼽았다. 이 주무관은 "예전에는 한부모를 위한 주거 정책은 복지시설이 유일했지만, 임대주택 공급이 확대되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한부모가족 임대주택지원 사업 현황을 보면, 무주택 저소득 한부모가족을 위한 매입임대주택의 물량은 2017년 136호에서 2023년 266호로 확대됐다. 이 주무관은 "임대주택은 전국에 있고 부자 가족도 거주할 수 있다. 게다가 한부모가족은 1순위로 뽑다 보니 요즘은 임대주택으로 많이 빠진다"고 말했다.

2023년 부자 복지시설별 입소율. 그래픽 김다연
2023년 부자 복지시설별 입소율. 그래픽 김다연

실제로 부자 복지시설에는 꾸준히 공실이 나온다. 단비뉴스가 각 시설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한 결과, 지난해 11월 기준 부자 복지시설의 전체 정원 대비 입소율은 약 71%였다. 시설별로 보면, 선재누리의 입소율은 60%, 아담채는 75%다. 구세군 한아름은 공실 없이 운영 중이지만, 정원이 5세대인 소규모 시설이란 점에서 앞선 두 시설과 차이가 있다. 이를 고려하면 복지시설 수요가 많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국에 없다 보니 존재도 몰라…알아도 수도권 이주 어려워"

애초에 복지시설이 특정 지역에만 있어 존재조차 알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선재누리 이재남 사무국장은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부자 복지시설은 임시 보호시설이라 일정 기간 거주한 부자 가정이 퇴소하면 새로운 가정이 입소하는 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공실이 생긴다"고 말했다. 이어 "이때 공실이 바로 채워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아무래도 복지시설이 전국에 다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수요가 적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말이다.

2021년 한부모가족 주거지원 정책 인지도 실태조사 결과. 그래픽 김다연
2021년 한부모가족 주거지원 정책 인지도 실태조사 결과. 그래픽 김다연

'2021년 한부모가족 실태조사'를 보면, 한부모가족 복지시설을 알지 못한다고 답한 비율은 34.3%였다. 이는 한부모가족 주거지원 정책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실태조사 결과는 한부모가족 복지시설 중 모자 시설과 부자 시설을 구분하지 않고 있어, 한부모가족 중 부자 가족만 따로 떼어내면 부자 복지시설의 인지도는 더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시설을 알고 있더라도, 비수도권에 있는 부자 가족이 복지시설 이용을 위해 수도권으로 이주하는 것은 어렵다는 비판도 있다. 익숙한 생활 터전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선뜻 거처를 옮기기 쉽지 않은 탓이다. 이 사무국장은 "부산 출신의 싱글 대디가 서울, 인천에 있는 복지시설에 입소하려면 기존의 생활 터전을 다 포기해야 한다. 연고지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있고, 거기다 아이까지 있는데 수도권으로 올라오는 것은 힘들다"고 말했다. 결국 수요가 있어도 수도권에만 시설이 몰려있다 보니, 비수도권 부자가족은 이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경북 구미에서 홀로 아이 둘을 키우는 싱글 대디 김 모 씨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복지시설에 들어가고 싶지만, 수도권으로 이주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씨는 지난해 11월 27일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안 그래도 아이를 혼자 키우는 지금 이혼 전보다 수입이 50~60% 정도 떨어진 상황이다. 내가 몸이 아파서 경제적인 상황이 더 어려워지면 복지시설을 적극적으로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낯선 수도권에서 다시 일자리를 구하기까지의 시간이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 보니, 실제로 갈만한 여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복지시설은 수요공급 논리 아냐"

근본적으로는 복지 문제를 수요와 공급 차원에서 논의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아빠가 엄마야'를 쓴 싱글 대디 이상혁 작가는 복지는 장사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작가는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복지시설은 평상시에 공실이 많아도 되는 곳이다. 주거난을 겪는 미혼부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생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갑작스럽게 아이와 함께 길 밖으로 내몰린 사람이 단 한 명일지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환경을 미리 조성해 둬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부자 가족이 갑작스레 형편이 어려워져 시설을 찾는 일은 종종 발생한다. 대전광역시청 여성가족청소년과에서 지난해 7월까지 한부모가족 복지시설 담당자로 근무했던 직원은 "몇 년 전 아버님 한 분이 아이와 갑자기 갈 곳이 없다면서 급히 머물 복지시설을 찾는다는 민원을 넣은 적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전에는 모자 가족을 위한 복지시설뿐이라 공공임대주택을 안내해 드렸지만, 당시 정원이 다 차서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 싱글대디 가정지원협회 김지환 대표도 복지시설은 수요를 떠나 경제적으로 취약한 부자가족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라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싱글 대디가 갑자기 길거리에 나앉게 됐을 때, 무엇보다 아이들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예산 낭비라 보지 말고 단 한 명의 아이의 생존권을 위해서라도 부자 복지시설은 전국에 증설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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