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로운 청년] 배리어프리 자막 제작사 오롯플래닛 최인혜 대표

1편 철학 공부하는 야쿠르트 언니

2편 오염된 공공언어를 우리말로 정화하다

‘배리어프리’ (Barrier-free) 자막은 대사 외에도 효과음이나 배경 음악 등에 대한 설명이 추가된 자막을 말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소했지만, 넷플릭스가 ‘폐쇄형 자막’(CC, Closed Caption)이라는 이름으로 배리어프리 자막을 제공한 뒤부터 익숙한 개념이 됐다. 사용자가 자막의 표시 여부를 직접 설정할 수 있는 것이 폐쇄형 자막이다. 영상에 처음부터 자막이 입혀져 제공되는 개방형 자막과 구분된다. 티빙과 웨이브 등 국내 OTT들도 배리어프리 자막 제공을 확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청각장애인들이 배리어프리 자막 영화를 접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서영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멀티플렉스 3사(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의 2022년 전체 영화 상영 횟수 534만 7,227회 가운데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 횟수는 477회로 0.009%에 불과했다. 전체 영화가 1만 번 상영될 때 배리어프리 영화는 1번 상영된 셈이다. 이런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배리어프리 자막 제작에 뛰어든 사람이 있다. <단비뉴스>가 스타트업 ‘오롯플래닛’을 운영하고 있는 최인혜 대표(26)를 만났다.

배리어프리 자막에는 인물의 대사 외에도 효과음과 음악 등이 포함된다.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화면 갈무리
배리어프리 자막에는 인물의 대사 외에도 효과음과 음악 등이 포함된다.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화면 갈무리

한국 장애인의 문화 접근성을 고민하다

최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공연과 연극에 관심이 많았다. 한 잡지에서 미국 청각장애인 극단 ‘데프 웨스트 시어터’(Deaf West Theatre)의 이야기를 접한 후 우리나라 장애인은 어떻게 문화생활을 하고 있는지 고민하게 됐다. 그는 “그때 처음 장애인의 문화 접근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라며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최인혜 대표가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카페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세은 기자
최인혜 대표가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카페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세은 기자

그는 비즈니스 창업 동아리 ‘인액터스’에서 처음 배리어프리 자막을 제작했다. 2019년 동아리 프로젝트로 ‘나는 보리’라는 독립영화의 배리어프리 자막을 제작해 상영회를 열었다. 하지만 “일회성 프로젝트로는 실효성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게 최 대표의 말이다. 단순히 영화 한 편의 자막을 제작한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배리어프리 자막을 지속적으로 제작하기 위해, 인액터스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동료 2명과 2020년 ‘오롯플래닛’을 창업했다. 각각 컴퓨터 공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친구들이었다.

‘오롯’은 ‘모자람 없이 온전하다’는 뜻이다. 모두가 모자람 없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회사 이름에 담았다. 창업 후에는 봉사단을 모집해 자막을 제작했다. 영화를 5~10분 단위로 나눠 각자 맡은 부분의 자막을 쓰면, 오롯플래닛이 종합하여 편집했다. 그 일이 쉽지는 않았다. 소리를 그저 글로 바꾸면 되는 작업이 아니었다. 처음 상영했을 때는 “‘자막이 너무 지저분해 읽기 힘들다’는 피드백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 청각장애인 검수자를 고용해,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읽기 쉬운 자막을 제작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배리어프리 영화로 10회 이상 오프라인 상영회를 열었다. 코로나19가 유행할 때는 온라인으로 영화를 상영했다. 유튜브를 통해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불가피하게 시작한 온라인 상영회였지만, 관객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코로나 때문에 문화생활을 누리기 어려웠는데, 온라인 상영회 덕분에 우울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전하는 관객도 있었다고 한다.

배리어프리 자막은 오롯플래닛이 자체 제작한 웹사이트를 통해 만들어진다. 최인혜 대표 제공
배리어프리 자막은 오롯플래닛이 자체 제작한 웹사이트를 통해 만들어진다. 최인혜 대표 제공

허술한 제도는 여전히 걸림돌

창업 후 최대한 많은 영화의 자막을 제작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저작권 문제가 있으니, 제작사와 배급사 등 모든 관계사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다. 힘들여 설명하여 협조를 요청해도, 답변하지 않거나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작사나 배급사 입장에서 보자면, 배리어프리 자막을 제작한다고 대단한 수익을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허락 없이 배리어프리 자막을 만들 수는 없었다.

영국과 미국 등 해외의 사정은 다르다. 영국에선 OTT 사업자가 전체 콘텐츠 80%에 자막을 의무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미국에선 시청각장애인에게 폐쇄형 자막을 필수적으로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위반 시에는 최소 1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한다. 최 대표는 “한국에서도 배리어프리 자막 제작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걱정도 있었다. “제가 청각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배리어프리 자막 제작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이 됐다”고 최 대표는 말했다. 하지만 ‘도움이 되고 있으니,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해달라’는 청각장애인의 응원을 듣고 힘을 얻었다. 그는 “배리어프리 자막을 만드는 일은 비장애인이 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앞에 나서서 싸울 순 없으니, 뒤에서 돕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의 힘을 조금씩 모아서 앞으로 나가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처음 걷는 길이어서 어려웠지만, 올해부터 사정이 나아졌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내 OTT 라이브러리 강화 후반작업 지원사업’의 덕을 봤다. 문체부가 티빙, 웨이브, 왓챠 등에 약 40억 원을 투자해 기존 콘텐츠의 화질·음향 개선과 청각장애인용 자막 제작을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을 통해 국내 OTT와 협업하여 500여 개 작품의 배리어프리 자막을 제작했다.

또한 기업의 사회공헌사업 차원에서 LG와 KT의 임직원들이 배리어프리 자막을 직접 제작하도록 돕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직접 자막을 제작하면서 배리어프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필요성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이다.

지난해 9월 최인혜 대표가 서울 가든호텔에서 열린 사회공헌 파트너스데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최인혜 대표 제공
지난해 9월 최인혜 대표가 서울 가든호텔에서 열린 사회공헌 파트너스데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최인혜 대표 제공

뮤지컬과 연극에도 배리어프리를

최 대표가 이끄는 오롯플래닛은 이제 또 다른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뮤지컬이나 연극의 경우 스크린에 자막을 띄워주거나, 좌석에 자막을 볼 수 있는 별도의 기기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자막 제공이 이뤄진다. 별도의 스크린이나 기기가 필요한 만큼, 영화에 비해 배리어프리 자막이 제공되는 경우가 훨씬 적다. 뮤지컬과 연극에서도 배리어프리 자막을 적용하는 일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최 대표는 생각한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주관하는 ‘콘텐츠를 새롭게 읽는 방법’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은 그 영역을 개척하려는 첫걸음이다. 창작 과정에서 배리어프리 자막 작업을 적용하고자 하는 각종 공연 기획자나 연출가, 작가를 교육하고 있다. 제작 초기 단계부터 배리어프리가 적용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연이 완성된 후 뒤늦게 자막을 제작하면, 청각장애인이 작품을 온전히 즐길 수 없다. 공연의 분위기와 성격, 창작자의 의도를 온전히 전달하려면 초기부터 배리어프리 자막을 염두에 두고 작품이 제작되어야 한다”고 최 대표는 설명했다.

여전히 난관이 많지만, 오롯플래닛의 노력과 함께 변화하는 세상을 보면서 최 대표는 희망을 느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배리어프리 자막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많이들 알고 있다. 배리어프리가 당연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최 대표는 말했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2021년 실시한 ‘청년세대 인식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81.3%가 ‘요즘은 청년이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고난 앞에 좌절하지 않는 청년도 있다. 그들은 제 삶을 긍정하고 주변에 선한 영향을 주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단비뉴스>는 그들을 ‘단비로운 청년’이라 부르기로 했다. 꼭 필요한 때 알맞게 내리는 단비처럼, 고난이 만연한 세상에 희망과 용기를 주는 청년을 만나 연속으로 소개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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