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제천지역 고교평준화 시도 무산…시설 개선 등 과제로 남아

2019년부터 4년여간 논의돼 온 충북 제천시 일반계 고등학교의 입시 평준화 시도가 무산됐다. 평준화 실시를 놓고 지난달 14일부터 20일까지 진행한 주민투표가 부결됐기 때문이다. 충청북도 조례는 고등학교 입학전형 방식을 변경하려면 해당 지역에 사는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해 응답자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에 실시한 주민투표에는 조사 대상 6981명 가운데 94.6%인 6603명이 참여했는데, 최종 결과는 찬성 56.3%, 반대 43.7%로 집계됐다. 찬성이 훨씬 많았지만, 조례의 가결 기준인 3분의 2에는 11.4%, 756표가 모자랐다. 투표 대상은 평준화가 시행될 경우 직접 영향을 받을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2학년까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각 학교 운영위원 등이었다.

제천시에는 제천고등학교, 제천여자고등학교, 세명고등학교, 제천 제일고등학교 등 일반계 고등학교 4곳, 제천상업고등학교, 제천산업고등학교, 제천디지털전자고등학교 등 특성화 고등학교 3곳이 있다. 이번 평준화 논의는 중학교 성적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학교장 전형’을 채택하고 있는 일반계고등학교 4개교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현행 비평준화 체제를 유지하게 됐다.

지난달 25일 제천지역 고교평준화 찬반투표 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충북도교육청 오영록 교육국장. 출처 충북도교육청
지난달 25일 제천지역 고교평준화 찬반투표 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충북도교육청 오영록 교육국장. 출처 충북도교육청

고교 입시 평준화를 위한 활동을 벌여온 ‘제천 고교평준화를 위한 시민연대’는 지난 25일 투표 결과가 발표된 직후 성명을 내고 “고교평준화 준비 과정에서 보여준 교육청의 태도는 공공성을 상실한 처사였다”며 “의제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토론을 활성화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평준화에 반대 목소리를 내온 ‘제천고교평준화반대시민연합’은 같은 날 발표한 성명에서 “제천의 선택은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를 선택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며 “제천의 선택은 비단 제천만이 아니라 충북도민의 의지라 해도 과하지 않다”고 했다. 평준화에 반대해 온 충북자유시민연합 이재수 대표는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제천시의 결과를 본받아 청주시나 충주시 등도 지금의 ‘(학교에) 학생 나눠주기식’ 평준화를 폐지하고 학생들이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도 평준화를 폐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교평준화는 정말 ‘대세’일까…충북 상황은?

고교평준화 정책은 ‘학생 수의 증가와 고등학교의 입시 준비로 인한 중학생들의 과중한 학습 부담, 명문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경쟁의 과열과 인구의 도시집중 등을 막기 위해’ 지난 1974년부터 지역에 따라 단계적으로 도입됐다. 고교평준화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학생들을 학교별로 선발하는 과정에서 특정 고교 입학을 위한 사교육 과열 등의 문제를 막기 위해 도입된 제도였다.

하지만 고교평준화가 성공적으로 정착했는지는 의문이다. 여전히 과학고나 외국어고 등 성적 최상위권 학생들이 진학하는 ‘특수목적 고등학교’가 있어 중학생들의 학습 부담이나 경쟁의 과열이 줄지는 않았다. 또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제도가 도입된 지 약 50년 가까이 지났지만, 평준화를 채택하고 있는 곳은 서울과 광역시급 대도시를 제외하면 153개 시·군 가운데 34곳뿐이다.

전국 지자체 고교평준화 현황. 그래픽 김창용 기자
전국 지자체 고교평준화 현황. 그래픽 김창용 기자

충북도 비슷한 상황이다. 최근까지 충북에서 고교평준화가 시행되는 곳은 1979년 청주의 동지역뿐이었다. 그러다 2021년 들어 충주로 확대됐고, 올해부터 음성군 맹동면과 진천군 덕산읍의 충북혁신도시 지역이 추가됐다. 혁신도시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군 단위에서 평준화가 시행되는 곳은 전국에서 음성과 진천뿐이다. 충북은 도 단위 지자체 중에서 제주를 제외하면 기초지자체 수가 제일 적어서 지자체별 시행 비율을 보면 경기도의 42%에 이어 27%로 두 번째로 높다.

“인재 육성 위해 성적별 구분 필요” vs. “성적 기준 차별은 문제”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논의되어 온 만큼, 제천시의 고교평준화를 둘러싼 쟁점 역시 다양했다.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은 평준화가 되면 학생의 성적 수준에 맞춘 교육이 가능한지였다. 고교평준화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사교육 시장이 활발하지 않아 수도권 학생들과 비교해 제천 지역 학생들이 뒤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만큼, 인재 육성을 위해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을 집중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B고에 다니는 딸을 둔 한 학부모는 “딸이 공부를 잘해 기숙사에 들어가 있다”며 “제천에서는 대입 관련 정보를 얻기 어려워 제도에 대해 잘 알 수도 없고, 어떤 학원에 보내야 하는지도 알기 어려운데, 학교에서 관리해 줘 아이 성적이 잘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B고에는 아무래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모여 있으니 면학 분위기도 형성되어 있지 않겠느냐”며 “아무래도 학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를 A고나 B고에 보내고 싶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평준화에 찬성하는 쪽에서는 일부에게는 그런 교육이 가능할 순 있지만, 사실상 의미가 없으며, 성적을 기준으로 학생을 차별하는 처사라고 반박해 왔다. 제천고등학교 교사로 제천여고에 다니는 딸을 둔 송준숙(47) 씨는 “학교가 일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관리하기는 하지만, 그게 평준화와 관계가 있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 대입 결과를 봤을 때 소위 ‘명문대’라고 불리는 곳에 진학하는 학생의 수는 일반계 고등학교 사이에 큰 차이가 없고, 정말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은 제천을 떠나 특목고로 가기에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모여 있어 면학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얘기는 현장에서 보기에는 ‘신화’나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학업성취도 하향평준화 우려” vs. “이미 사실상 평준화 상태”

일반계 고등학교들이 실질적으로 평준화가 되어 있는지도 쟁점 중 하나였다. 평준화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지난 8월 1일 낸 입장문에서 “수영장 초급 라인에 상급자가 들어오면 상급자, 하급자 모두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일반계열 고등학교를 평준화하면 성적의 양극화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학업성취도 또한 당연히 하향평준화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제천지역은 고등학교를 선택해 지원하면 내신성적을 기준으로 합격 여부가 정해지기 때문에 성적에 따라 지원하는 학교가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대입에서 수시 모집 비율이 점차 높아지면서 입학 점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고등학교에서 좋은 내신 점수를 받아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들로 인해 기존의 입시 성적 순위가 뒤바뀌기도 했다.

제천 시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진학 상담을 담당하는 한 교사는 “사실상 지금 제천의 고등학교들은 평준화가 되어 있는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다”며 “성적으로 (중위권 학생들이 진학하던) C고와 D고에 진학할 수 없는 학생이 (상위권 학생들이 진학하던) A고에 진학한 사례가 조금이지만 실제로 있다. A고와 B고에 지역 최상위권 학생들이 몰리는 건 맞지만, 반대로 간신히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학생들도 A고와 B고에 많이 간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이어 “요즘은 중위권에 있는 학생들이 C고나 D고로 몰리는 추세다. A고나 B고에서는 좋은 내신을 확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스스로 알기에, 같은 수준의 학생들과 경쟁하려는 학생들이 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평준화 무산됐어도 시설 개선 등 주민 요구는 과제로 남아

지난해 4월 충북도교육청의 의뢰로 “제천시 고교평준화 도입 타당성”을 연구한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한송이 교수는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고교학점제의 핵심 사업 중 하나인 학교 간 공동교육과정은 이미 제천에 도입되어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 협력 교육과정은 학생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배우고 싶은 과목을 배울 수 있도록 거점 학교에서 과목을 개설해 지역 내 고등학교에 개방해, 원하는 과목을 듣도록 하는 사업이다.

한 교수는 “제천 일반고는 학교 간 공동교육과정뿐만 아니라‘지역연합 공동교육과정’도 활성화되어 있다”며 “이미 학생들이 학교를 옮겨 가며 수업을 듣는 상황이라, (평준화가 되면)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받아야 할 교육의 질에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지적은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반대 측은 “학생들이 자신의 수준에 맞춰 원하는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평준화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미 공동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사실상 공교육의 질에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주장은 의미가 없는 셈이다.

찬성 측은 평준화 관련 토론회에 반대하는 단체들이 한 번도 오지 않아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제천시 주민으로 찬성 측 단체인 제천 고교평준화를 위한 시민연대에서 활동한 음성교육지원청의 류효숙 장학사는 “결과는 받아들이지만, 과반수가 찬성했다는 점에서 더 논의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이어 “시민토론회를 여러 차례 열고 계속해서 반대 측의 참석을 요청했는데도 한 차례도 참석하지 않아 사실상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한 반대였는지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고, 이번 결정으로 제천의 교육이 10년은 후퇴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7일 ‘제천 고교평준화를 위한 시민연대’가 개최한 주민 공청회에서 참가자들이 쟁점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이날 참가자들은 모두 평준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이었다. 평준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청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옥주 PD
지난달 7일 ‘제천 고교평준화를 위한 시민연대’가 개최한 주민 공청회에서 참가자들이 쟁점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이날 참가자들은 모두 평준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이었다. 평준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청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옥주 PD

앞으로 다시 논의가 시작될 수는 있겠지만, 일단 4년여 동안 계속되던 제천의 고교평준화 논의는 이번 주민투표로 일단락됐다. 학교별 교육격차 해소나 학교 서열화에 따른 차별 정서를 완화하는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한송이 교수가 발표한 “제천 고교평준화 타당성 조사 연구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제천교육지원청과 각 학교의 학교장, 교사, 학부모 등은 제천지역 교육의 문제점으로 ‘여전한 명문고 선호와 그로 인한 위화감 조성’, ‘오래된 건물과 기자재 등 낙후된 교육 인프라’, ‘열악한 교사 정주 여건으로 인한 교육 연속성 상실’ 등을 꼽았다.

찬성 측은 고교평준화와 함께 주장해 왔던 학교 사이의 교육격차와 차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교육청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장학사는 <단비뉴스>와의 통화에서 “A고나 B고 등 오래된 학교의 시설 개선, 지역 내에 만연한 학교 간 차별 정서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교육청에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 교수는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제천 고교평준화 진행이 무산된 건 연구자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며 “결과를 떠나 연구를 수행하면서 제천 교육의 전반적인 변화와 질 제고가 필요하다는 교육공동체의 요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반대 측이 이야기하는 학생 선택권 강화와 찬성 측이 이야기하는 입시경쟁과 서열화 완화는 결코 양극단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제천 교육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제천 공동체 전체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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