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새벽이 생추어리를 지키는 사람들

얼마 전 동물원을 탈출한 얼룩말 ‘세로’가 화제였다.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탈출한 얼룩말이 아니라, 가둬 기른 동물원의 잘못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동물의 권리도 인간의 권리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은 어느새 많은 이들에게 번져 있다.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이유 없이 차별할 자격은 없다

그 생각을 ‘동물권’이라는 개념으로 처음 정립한 이는 영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라이더(Richard Ryder)다. 라이더가 동물권을 주창한 때로부터 5년 뒤인 1975년,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가 저서 <동물해방>에서 동물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단어가 됐다. 이러한 동물권을 지키려는 ‘동물권 운동’은 자신이 어떤 종에 속한다는 이유로 다른 종의 동물을 차별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을 뜻한다. 동물권 운동가들이 해결하려는 문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공장식 축산업이 있다. 오직 인간의 이익을 위해 밀집한 공간에 동물을 가둬 키우는 것은 명백하게 동물권을 침해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생추어리’(sanctuary)는 공장식 축산업에 반대하는 동물권 운동의 상징이다. 동물권 운동가들은 공장식 축산에 의해 착취당하는 동물에게 본래 습성대로 살아갈 공간으로 생추어리를 마련했다. 생추어리에는 안식처, 피난처란 뜻이 있다. 1986년, 미국의 동물권 활동가 진 바우어(Gene Baur)가 ‘팜 생추어리’(farm sanctuary)를 설립한 게 시초였다. 비건 닷컴(vegan.com)에 따르면 이러한 동물 생추어리는 현재 미국 98곳을 포함하여 전 세계 137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미처 파악되지 못한 곳을 더하면 그 숫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동물권 활동가 진 바우어는 동물 사체 더미에서 발견한 양 ‘힐다’를 구조한 뒤, 세계 최초의 동물 피난처인 ‘팜 생추어리’를 설립했다. 사진은 ‘팜 생추어리’에 입주한 소 ‘아리’와 함께한 모습. 팜 생추어리 누리집 갈무리
미국의 동물권 활동가 진 바우어는 동물 사체 더미에서 발견한 양 ‘힐다’를 구조한 뒤, 세계 최초의 동물 피난처인 ‘팜 생추어리’를 설립했다. 사진은 ‘팜 생추어리’에 입주한 소 ‘아리’와 함께한 모습. 팜 생추어리 누리집 갈무리

이러한 생추어리가 국내에도 있다. 정확한 현황을 파악하긴 힘들지만, 닭이 거주하는 생추어리, 소가 거주하는 생추어리 등이 조성돼 있다. 그 효시는 ‘새벽이생추어리’다. 지난 2020년 5월에 만들어졌다. 새벽이생추어리에는 ‘새벽이’, ‘잔디’라고 이름 붙여진 두 돼지가 살고 있다.

‘새벽이’와 ‘잔디’, 생추어리의 두 입주민

이제 세 살을 넘긴 ‘새벽이’의 몸무게는 200kg을 훌쩍 넘는다. 공장식 축산 농가에서 태어난 수컷 돼지는 출생 직후 거세되고, 꼬리를 잘린다. ‘새벽이’의 꼬리도 잘려있다. 이선재 기자.
이제 세 살을 넘긴 ‘새벽이’의 몸무게는 200kg을 훌쩍 넘는다. 공장식 축산 농가에서 태어난 수컷 돼지는 출생 직후 거세되고, 꼬리를 잘린다. ‘새벽이’의 꼬리도 잘려있다. 이선재 기자.

‘새벽이’는 2019년 7월의 어느 날 새벽, 경기도의 한 축산 농가에서 공개 구조되었다. 동물권 직접 행동 단체 ‘디엑스이’(DxE, Direct Action Everywhere) 한국 지부가 태어난 지 2주 정도 된 돼지를 축산 농가에서 데리고 나왔다. 활동가들은 구출한 돼지의 이름을 ‘새벽이’라고 붙였다. 공장식 축산의 잔인성을 드러내려는 행동이었지만, 현행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만, 당시 농장주는 활동가들을 고발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라고 밝혔다.

구출 직후의 ‘새벽이’는 어느 활동가의 집에 머물렀다. ‘새벽이’는 빠르게 자랐다. 사람의 집에 머물 수 없게 됐다. 다른 동물권 단체가 운영하는 보호소에 잠시 머물다가, 2020년 5월 너른 땅에 마련된 생추어리로 옮겼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시작이었다.

‘새벽이’ 혼자 머물던 곳에 ‘잔디’가 찾아온 것은 2021년 2월이었다. ‘잔디’는 제약회사의 실험동물이었다. 그 용도가 다해 안락사를 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다. 담당 수의사가 생추어리 활동가에게 연락했고, 활동가들은 ‘새벽이’ 곁에 ‘잔디’가 살 곳을 마련했다.

2020년 5월, ‘새벽이’가 입주하기 전 활동가들이 땅을 고르고 쓰레기를 치우던 모습이다. 새벽이생추어리 제공.
2020년 5월, ‘새벽이’가 입주하기 전 활동가들이 땅을 고르고 쓰레기를 치우던 모습이다. 새벽이생추어리 제공.

생추어리를 만들고 가꾸는 사람들은 ‘새벽이생추어리’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이 기사에 밝히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고, <단비뉴스>는 이를 수용했다. 생추어리의 유지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프리카 돼지 열병’과 이에 대한 당국의 대처 방식이다.

어느 지역에 돼지 전염병이 돌면, 정부는 일대에 있는 모든 돼지를 살처분한다. 공장식 축산 농가에서 자란 돼지만 죽이는 것이 아니다. 2019년 아프리카 돼지 열병이 발생한 인천 강화군에서는 개인이 기르던 반려 돼지까지 강제로 안락사시켰다. 피난 동물, 반려동물, 축산 동물 등을 구분하지 않고 모조리 죽이는 법·제도가 있는 한, ‘새벽이생추어리’의 활동가들은 그 위치를 외부에 공개할 생각이 없다.

산으로 둘러싸인 교외의 어느 마을 한쪽에 마련된 넓은 뜰이 ‘새벽이생추어리’다. 주위에는 민가가 듬성듬성 있다. 땅 주인이 생추어리의 취지와 사정을 양해했는데, 그 밖의 거주민이나 축산 농가와는 교류하지 않는다. 동물의 피난처를 유지하려면 사람끼리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새벽이생추어리’의 하루는 아침 7시 30분에 시작한다. 전날 저녁 당번이 다음 날 아침을 미리 준비한다. 주로 뿌리채소와 곡물을 섞어 돼지들의 아침밥을 마련한다. 이날 아침 메뉴는 보리, 현미, 서리태, 비트, 연근이었다. ‘새벽이’와 ‘잔디’가 밥을 먹는 동안, 활동가들은 물도 준비한다. ‘새벽이’와 ‘잔디’는 쌀겨를 섞은 물을 좋아한다.

‘새벽이’와 ‘잔디’는 분리된 공간에서 생활한다. 제약회사의 실험동물이었던 ‘잔디’는 ‘새벽이’보다 훨씬 작아서, 함께 두면 ‘잔디’가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선재 기자
‘새벽이’와 ‘잔디’는 분리된 공간에서 생활한다. 제약회사의 실험동물이었던 ‘잔디’는 ‘새벽이’보다 훨씬 작아서, 함께 두면 ‘잔디’가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선재 기자

네모난 앞뜰에는 ‘새벽이’의 공간과 ‘잔디’의 공간이 울타리로 분리돼 있다. ‘새벽이’가 지내는 곳의 면적은 약 200평 정도다. ‘잔디’의 공간은 약 100평 정도다. 아침밥을 다 먹은 돼지들은 코로 냄새를 맡으며 자신의 공간을 탐색한다. 돼지는 시각보다 후각이 발달해있다. 코를 이용해 땅을 파거나 반복적으로 무언가를 미는 행동을 한다. 이를 ‘루팅’(rooting)이라 부른다. 가끔 마른 나무에 등을 벅벅 긁기도 한다. 밀집한 공간에서 갇혀 지내는 축산 농가의 돼지들은 땅을 파거나 등을 긁지 못하고 평생을 지낸다.

생추어리에서 지내는 돼지는 뭇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행동도 한다. 이리저리 오가며 놀던 ‘새벽이’와 ‘잔디’는 울타리 한쪽의 특정한 장소에 가서 용변을 본다. 누가 훈련 시킨 게 아니다. 자연 상태의 돼지는 먹는 곳, 자는 곳, 용변 보는 곳을 스스로 알아서 구분하여 생활한다. 돼지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같은 자리에서 먹고, 자고, 용변 보는 축산 농가의 돼지와 사뭇 다르다.

이날 ‘새벽이’와 ‘잔디’의 아침밥과 물을 챙겨준 것은 ‘무모’(활동명·30세) 씨였다. 그는 활동가들 사이에서 쓰는 이름을 표기해달라고 <단비뉴스>에 부탁했다. 이날 오전, 무모 씨는 생추어리의 앞뜰에서 쑥을 뜯었다. 봄이 되니 쑥의 씨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자연스레 싹을 틔웠다. 돼지들은 오전 간식으로 쑥을 먹었다. 그들이 간식을 먹는 동안, 무모 씨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 똥을 치웠다.

돼지는 호기심이 많은 동물이다. 코로 땅을 파면서 새로운 정보를 알아내고 스트레스를 푼다. 3일 오전, 아침 식사를 마친 ‘새벽’이가 자신의 공간에서 ‘루팅’(rooting)을 하고 있다. 이선재 기자
돼지는 호기심이 많은 동물이다. 코로 땅을 파면서 새로운 정보를 알아내고 스트레스를 푼다. 3일 오전, 아침 식사를 마친 ‘새벽’이가 자신의 공간에서 ‘루팅’(rooting)을 하고 있다. 이선재 기자

‘새벽이생추어리’에는 무모 씨와 같은 이들이 찾아와 매일 돼지들을 돌본다. ‘아침 돌봄’과 ‘저녁 돌봄’으로 구분하는데, 3명의 상근 활동가와 19명의 정기 활동가가 서로 분담하여 주 1회 정도 생추어리를 찾아온다. 지난 3년 동안 약 120여 명이 주기적 또는 일시적으로 찾아와 ‘새벽이’와 ‘잔디’를 돌봤다.

아침 돌봄자는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이날 무모 씨가 저녁을 준비할 동안 ‘잔디’는 낮잠을 잤다. ‘새벽이’는 땅에 코를 박고 계속 탐색했다. 덩치에 따라 먹는 양도 다르다. 이날 저녁 ‘새벽이’는 채식 사료 1.5kg과 얼갈이배추 500g을 먹었다. ‘잔디’는 채식 사료 300g과 양상추 200g을 먹었다.

아는 돼지가 생긴다는 것

왜 이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생추어리를 찾아오는 걸까. 김단비(27) 씨는 2년여 전부터 ‘새벽이생추어리’에서 활동했다. 그는 “매끄럽게 짜인 (공장식 축산업의) 구조적 폭력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책임을 져야만 할 것 같았다”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공장식 축산을 당장 멈출 수는 없지만, 그것에 저항하면서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지켜내고 싶었다는 뜻이었다.

김 씨는 5년 차 ‘비건’(vegan)이기도 하다. 채식을 선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동물을 착취해서 생산되는 모든 종류의 식품을 먹지 않는다. 비건이 된 지 2년째가 됐을 때, 그는 자신에게 ‘정치적 현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동물 착취를 거부하는 뜻을 실천할 실질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침 그 무렵 ‘새벽이생추어리’를 알게 됐다. 2021년부터 김 씨는 ‘새벽이생추어리’에 비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돼지들을 돌보았고, 지난해 봄부터 주기적으로 생추어리를 찾는 정기 활동가가 되었다. ‘새벽이’와 ‘잔디’와 만날 때마다, 인간이 누리는 풍요가 다른 종을 착취한 결과라는 진실을 체감했다. “‘아는 돼지’가 생기면서, 추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이야기가 내 몸에 직접 와 닿았다”라고 김 씨는 말했다.

지난달 17일 김단비 씨가 염증이 생긴 뒷발에 약을 바르기 전, ‘잔디’를 안심시키려 쓰다듬고 있다. 김단비 제공
지난달 17일 김단비 씨가 염증이 생긴 뒷발에 약을 바르기 전, ‘잔디’를 안심시키려 쓰다듬고 있다. 김단비 제공

동료가 생긴다는 것

인간이 동물을 존중하는 생추어리에서 인간과 인간도 서로 존중한다. 19명에 이르는 활동가들은 학벌, 성별, 배경과 같은 기준으로 서로를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지난 3일 오후, ‘새벽이생추어리’에 활동가들이 모였다. 이날은 일찍부터 소란스러웠다. 5명의 정기 활동가와 3명의 상근 활동가가 울타리를 고치러 모였다. 봄이 되면서 땅이 녹아 울타리가 위태로워졌다. 질퍽한 비탈길에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퍼서 쌓았다. 20℃를 웃도는 온도에 그늘 하나 없는 땡볕에서 활동가들은 2시간 동안 일했다. 이윽고 둘러앉아 직접 만든 비건 스콘과 식물성 음료로 새참을 먹었다.

지난 3일 생추어리에서 울타리 공사를 하던 활동가 무모 씨가 ‘새벽이’와 눈을 맞추고 있다. 이선재 기자
지난 3일 생추어리에서 울타리 공사를 하던 활동가 무모 씨가 ‘새벽이’와 눈을 맞추고 있다. 이선재 기자

울타리를 정비한 뒤에 물길도 팠다. 진흙 목욕을 좋아하는 ‘새벽이’를 위해 파 놓은 좁은 물길이 있는데, 그 물을 따라 개구리 알이 부화한 것을 활동가들이 발견했다. 비가 내리지 않아 웅덩이가 얕아져, 올챙이들이 헤엄치기 좁아 보였다. 더 넓은 하류로 나갈 수 있도록 물길을 넓혔다. 돼지를 위한 일과 올챙이를 위한 일을 마치자 오후 6시가 다 되었다.

땀샘이 없는 돼지가 진흙 목욕으로 체온을 내리라고 마련한 작은 물길에서 올챙이가 태어났다. 생추어리를 찾아온 활동가들은 그 물길을 넓혀 올챙이들이 하류로 나갈 길을 열었다. 이선재 기자
땀샘이 없는 돼지가 진흙 목욕으로 체온을 내리라고 마련한 작은 물길에서 올챙이가 태어났다. 생추어리를 찾아온 활동가들은 그 물길을 넓혀 올챙이들이 하류로 나갈 길을 열었다. 이선재 기자

지속 가능한 생추어리를 위해선

이들의 작은 실천은 거대하고 완강한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생추어리 설립 초기부터 활동했던 신유정(활동명 보리·28) 씨는 <단비뉴스>와 인터뷰에서 “‘동물은 당연히 죽여도 돼’라는 명제에 도전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동물을 죽여도 된다’는 생각은 ‘사회의 주류가 아닌 것은 착취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고 그는 설명했다. 노동자, 여성, 장애인을 착취하는 일의 끝에 동물 착취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진정한 동물해방은 모든 착취가 사라져야 가능하다. 그런 미래는 신 씨에게 아직 아득하다.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새벽이’와 ‘잔디’는 살아있지만, 사정은 여전히 열악하다. 입지와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 돼지들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가끔은 활동가들도 딜레마를 고민한다. 동물해방을 위해 생추어리를 만들었지만, 결국 구출된 동물도 인간이 만든 울타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상태로는 더 많은 동물을 구조해 돌보기도 어렵다.

그나마 이곳도 떠나야 할 형편이다. 임대료를 내고 땅을 빌렸는데, 땅 주인의 사정으로 올해 안에 생추어리를 옮겨야 한다. 몇몇 시민의 후원으로만 운영되는 ‘새벽이생추어리’를 질적으로, 양적으로 키워나갈 방도를 활동가들은 고민하고 있다. 그들을 버티게 만드는 것은 믿음이다. 돼지가 살아갈 권리를 얻는 미래에는 인간도 서로 착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신 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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