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

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윌리엄 맥도널드 엮음/윤서연 외 6명 옮김/인간희극/2만5000원

부고기사는 한 사람의 죽음을 알린다. 뉴욕타임스는 1851년 창간호를 낸 이래로 매년 1천 건이 넘는 죽음을 알려왔다. 저명인사의 죽음으로 한 시대를 조명했다. 부고전문기자는 미리 저명인사의 이야기를 쌓아놓는다. 건강이 악화됐다는 소식이 들리면 미리 기사를 쓴다. 그래서 작은 평전이라 불릴 정도로 깊은 기사가 나온다. 부고기사를 기다리는 부고중독자까지 생겼다.

▲ 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 표지

<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은 2019년 한국어로 번역됐다. 윌리엄 맥도널드가 1851년 창간호부터 2016년까지의 부고기사를 골라 담았다. 윌리엄 맥도널드는 2006년부터 뉴욕타임스의 부고기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미국 남북전쟁 이전부터 오늘까지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기록한 언론은 뉴욕타임스가 유일하다고 자부했다.

부고로 쓴 세계사

누구나 한번쯤은 죽는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만든 빅토리아 여왕도 죽었다. 뉴욕타임스는 여왕의 죽음을 알렸다. 여왕은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몇 주 전에 마비증세가 있었다. 죽음의 원인부터 기록한 것이다. 왕실과 내각 그리고 국민들은 애도했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모습도 적었다. 그다음 전 세계에 식민지를 만들고 영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여왕의 업적이 나온다. 업적 뒤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죽은 사람의 일대기가 나열된다. 일대기는 인상 깊은 평가나 일화로 끝난다. 10문단이 넘는 긴 기사였다. 뉴욕타임스가 죽음을 알리는 방식이다.

뉴욕타임스가 기록한 죽음에는 가감이 없다. 아인슈타인은 대동맥 파열로 죽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랜 투병생활 끝에 신자들의 기도 속에서 죽었다. 미국의 적 사담 후세인은 피난처에서 미군에 체포된 뒤 민간인 학살 혐의로 이라크 법원으로부터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교수형은 선고 5일 만에 집행됐다. 영화배우 제임스 딘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흑역사도 빼놓지 않는다. 윈스턴 처칠은 달변가였다. 영국인들이 공중에서, 바다에서, 평야에서, 언덕에서 싸울 수 있도록 그는 명연설로 용기를 불어 넣었다. 그러나 부고 기사에는 그가 사관학교에 떨어진 일도 기록한다. 대신 처칠은 귀족전형으로 입학했다. 특혜를 받아 뒷문으로 들어간 것이다.

다만, 미국의 숙적을 다루거나 국가적 영웅을 다룰 때 감정을 드러낸 과거의 기사들이 있다. 남부 연합군을 지휘했던 로버트 리를 위대한 장군이라 평가하면서도 문장 곳곳에 북부 사람들의 적개심을 표현했다. 반면 북부에 승리를 가져다준 그랜트 대통령이 죽었을 때는 4만 단어 이상의 긴 기사로 슬픔을 표시했다.

부고 기사는 서로 연결되며 전 세계의 역사를 보여준다. 죽은 이의 일생이 곧 세계사의 기록이라는 것을 뉴욕타임스의 부고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아편전쟁에서 살아남은 쑨원은 신해혁명을 이끌었다. JP모건은 대공황의 시대를 알려준다. 처칠,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을 보여준다. 맥아더와 패튼은 2차 대전의 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월트 디즈니는 미국 자본주의를 대표했고, 스탈린은 소련 공산주의를 상징했다. 호치민의 부고 기사는 냉전 속 베트남 전쟁을, 지미 헨드릭스는 반전운동을 재현했다.

뉴욕타임스가 기록한 한반도 현대사

특파원들은 뉴욕타임스가 전 세계 부고기사를 쓸 수 있는 원동력이다. 뉴욕타임스는 26개 국가에 지국을 운영하고 있다. 노무현, 김대중 부고기사는 한국인 기자가 썼다. 최상훈 기자다. 경상도 토박이인 최 기자는 뉴욕타임스에서 일하며 남북관계를 주로 다뤘다. 최 기자는 민주주의를 이끌었지만 보스정치라는 과오를 범했다고 김대중을 평가했다. 노무현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에서도 그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균형 있게 다뤘다.

김정일 부고기사는 최상훈 기자와 데이비드 E. 생어기자가 함께 작성했지만, 그 이전에 보도된 김일성 부고 기사는 생어 기자 혼자 썼다. 이때 뉴욕타임스는 한국 언론이 취재할 수 없는 북한 현지의 사정을 기록했다. 북한에 세워진 김일성의 동상 개수부터 북한 주민들의 반응까지 세세하게 다뤘다. 김정일이 죽었을 때도 생어 기자는 북한 내부의 소식을 기사에 담았다.

버려지는 한국의 부고기사

이에 비해 한국 언론의 부고기사는 무미건조하다. 뉴욕타임스처럼 역사를 보여주지 못한다. 한국 언론의 부고기사는 대부분 5줄에서 10줄짜리 단신기사다. 인물과 시대가 아닌 망자와 유가족의 지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구체적인 사망 원인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부고 기사는 방송이나 뉴미디어보다 신문이 더 잘 다룰 수 있는 영역이다. 뉴욕타임스의 부고기사를 보면, 인물과 시대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로 풀어 전달한다. 부고 기사의 열독률이 높고, 이는 유료 독자 증가로 이어진다. 논쟁적 인물의 부고 기사를 쓸 때는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해 독자들이 토론할 수 있도록 별도의 공간을 홈페이지에 마련하기도 한다.

편집자 윌리엄 맥도널드는 서문에서 디지털 기술은 부고기사를 더 입체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 적었다. 전달 방법은 변할 수 있어도 한 사람의 일생으로 역사를 비추는 언론의 역할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증거가 이 책 속에 녹아있다. 170년 동안 기자들이 애쓴 결과물이다. 이 결과물을 수백만 독자들이 보증한다. 디지털 시대에 생존을 고민하는 한국 언론이 참고할 만한 책이다.

100자평 
뉴욕타임스가 부고기사로 보여주는 세계사. 뉴욕타임스와 부고기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추천. 부고기사 쓰는 방법을 설명하는 책은 아니라는 점은 참고.


편집 : 유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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