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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쓸데없는 일’은 없다
[단비농부의 농사일기] ⑤ 울타리 치기
2021년 06월 23일 (수) 19:23:22 박성준 기자 creation619@naver.com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면 시간이 오래 지나도 기억에 남는다. 감동의 크기가 얼마나 돼야 아주 나중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그걸 하나하나 점수로 매겨 수첩에 적어놓는 사람이 바로 나다.

   
▲ 2주 전에 견주어 거의 자라지 않은 옥수수. 한쪽 싹은 노랗게 죽어 있다. ⓒ 최태현

낯선 사람과 대화를 시작하면 조금씩 친밀감을 쌓아간다. 밝은 표정과 점잖은 말투. 둘 중 하나만 있어도 10점 중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다음에는 친절함, 상대방 자리에서 생각할 줄 아는 능력, 배려심, 이런 게 충족되면 8점이 된다. 운 좋게도 식물을 키우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만점이 되고, 나는 그 사람을 거의 잊지 않는다.

식물을 건강하게 잘 키워낸다는 것은 식물의 변화를 눈치채는 섬세함을 지녔다는 것이다. 생명주기를 관찰하며 식물의 변화를 통해 자기 행동을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식물을 키우는 이는 대개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 매일 식물이 잘 있는지 생각하고, 날씨가 안 좋은 날에는 식물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는, 쉽게 말해 누군가 돌볼 수 있는 사람. 따뜻한 성품은 별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런 거라 생각한다.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직접 농사를 짓고 나서다. 농작물을 기르는 행위는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이다. 내 조건에 맞는 작물, 나에게 맞는 땅의 크기,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흙의 질감이 있다. 각자 상황에 잘 맞는 밭을 찾아내는 것, 어떤 모양으로 일굴지 결정하는 것, 이 모든 게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다.

식물과 관계를 맺어 그것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통찰의 자세를 갖게 한다. 식물은 마음을 비옥하게 만드는 비료 같은 존재다. 초보 농부인 나도 이제 이 행복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듯하다. 식물을 키우는 사람에게 감동하는 이유다. 나는 식물을 키우기 전의 나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이전과 영영 다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 기자가 울타리를 치기 위해 고춧대와 그물망을 든 채 밭으로 가고 있다. ⓒ 최태현

2주 만에 밭을 찾았다. 24절기 중 아홉 번째 절기인 망종(芒種)은 음력으로 5월, 양력으로는 6월 6일 무렵이다. 망종은 보리를 수확하기 알맞은 시기라는데, 옥수수를 수확하기에는 한참 멀어 보인다. 아주 미세하게 자라 있을 뿐 2주 전과 달라진 게 거의 없다. 오히려 어떤 싹은 노랗게 죽어 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밭 주변에 울타리를 쳤다. 1m가 조금 넘는 고춧대를 일정한 간격으로 땅에 박았다. 손으로 고춧대를 잡고 망치로 적당히 두들기면 고정된다. 산속에 있는 밭이라 산짐승이 자주 내려온다고 한다. 고모부는 “짐승이 내려와 단 한 번이라도 밭을 헤집으면 1년 농사 거의 전부를 망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내 새끼’를 지킨다는 마음으로 고춧대를 단단히 두들겼다.

고춧대를 심어 놓고 비료를 뿌렸다. 질소 성분이 많이 들어간 화학비료다. 화학비료를 안 쓰는 게 좋다고 주장해놓고 정작 본인이 썼으니, 독자들이 꾸중을 할 것 같다. 안 쓰면 옥수수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수확을 못 할 수도 있다는 고모부 말에 겁을 먹었다. 이 농사는 수익을 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농민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연과 소통하며 느낀 점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해주면 좋겠다. 한쪽에는 비료를 뿌리지 않았는데, 오히려 비료를 뿌리지 않은 곳과 뿌린 곳의 차이를 나타내고자 한 ‘실험정신’에 주목해주면 감사하겠다.

   
▲ 기자가 잡초를 뽑고 있다. 잡초는 옥수수보다 생명력이 강하고 성장속도는 빠르다. ⓒ 최태현

다음으로 그물망을 두르고 잡초를 뽑았다. 옥수수는 별로 안 자랐는데 잡초는 어디서 생겨난 건지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벌써 옥수수만큼 자란 것도 있다. 호미로 깊숙이 파내 뿌리까지 뽑아냈다. 한참 쭈그려 앉아 풀을 뽑으니 벌써 오후 6시. 드디어 일이 끝났다. 밭 옆 계곡으로 가 시원하게 세수를 했다. 계곡물이 얼음처럼 차갑다. 뜨거운 햇볕으로 달궈진 몸에 찬물을 끼얹으니 활기가 돈다. 청정수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문득 내가 키우는 작물에 제때 물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농사는 힘든 일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꼭 그렇지는 않다. 때로는 지옥처럼 느껴지는 삶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잠시 숨 쉴 겨를을 준다. 밭에 나와 있는 동안은 모든 걱정이 사라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가? ‘자연이 하는 일에는 쓸데없는 것이 없다’고.

누군가는 나에게 스스로 즐기면 됐지 그걸 기사까지 써야 하느냐고 물을 것 같다. 다른 뜻은 없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행복을 조금 나눠드리고 싶을 뿐.


 편집 : 김정산 기자

[박성준 기자]
단비뉴스 지역농촌부, 시사현안팀 박성준입니다.
성실하게 취재하고 정직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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