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선택'

▲ 최은솔 기자

“그거 다 아빠 선택이잖아.” 15파운드짜리 통조림을 훔치다 정학을 당한 아들 세비는 섬찟한 말로 아빠 리키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리키가 경찰서로, 학교로 불려 다니느라 회사에 벌금을 물었다는 하소연에 세비 입에서 나온 가시 돋친 말이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속 주인공 가족은 서로 괴롭히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삶을 이어간다. 리키는 주 6일 하루 14시간씩 택배 트럭을 모는 영국판 ‘쿠팡맨’이다. 아내는 뚜벅이 신세로 매일 강도 높은 병간호를 하는 돌봄 노동자다. 영화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나락에 떨어진 삶을 돌아보게 한다.

“삶은 B와 D 사이의 C다.” 이미 클리셰가 됐지만 “삶은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다”라는 사르트르의 재치는 아들 세비의 말처럼 선택의 책임을 정당화한다. 리키가 택배기사가 되는 것도, 아내가 병간호 노동자가 된 것도 분명 그들의 선택이었다. 리키는 훗날 가족과 보낼 행복한 날을 꿈꾸며 없는 살림에 트럭까지 마련했다. 높은 수익을 꿈꾸며 내린 리키의 ‘선택’이었다.

▲ <미안해요, 리키>의 각본가 폴 래버티는 이 영화로 2008 금융위기 이후 ‘긱 이코노미’ 등 생산 구조의 변화가 일반인의 삶과 관계에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다뤘다고 밝혔다. ⓒ pixabay

하지만, 선택지를 기만하는 자가 있다면? “당신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리키의 택배사 면접 담당자는 회사가 이래저래 간섭하는 조직도 아니고, 눈치 주는 상사도 없는 꿈의 직장인 것처럼 기만했다. 희망을 가득 채운 리키의 집에는 어느새 ‘절망’만 청구된다. ‘파트너’라서 택배 기사가 져야 할 책임은 무한하지만 ‘노동자’가 아니기에 회사가 함께 나누는 책임이 없다. 사고 친 아들 때문에 대체자를 구하는 것도, 강도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도둑맞은 택배상품까지 물어내는 것도 모두 리키의 몫이다. 

비슷한 사례는 바다 건너 우리 주변에서도 적잖게 일어난다. 지난해 10월 스스로 목숨을 거둔 한 택배기사는 일평생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컴퓨터 조립에 수리까지 배워서 가게를 차렸는데 외환위기 때 파산했다. 신용불량을 회복하려고 평일엔 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엔 피자와 치킨을 배달하며 버텼다. 10년간 새로운 삶을 기대하며 시작한 ‘택배’였다. 그의 유서에는 헛디딘 삶에 디딤판이 없어진 현실이 얼마나 섬찟한지 보여준다. ‘억울하다. 우리(택배기사)는 이 일을 하기 위해 국가시험에, 차량구입에, 전용 번호판까지(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200만 원도 못 버는 일을 하고 있다.’

▲ 오는 7월부터 택배기사 등 14개 특수형태근로종사자도 일하다 다쳤을 때 산재보상을 받을 수 있다. 고용노동부는 해당 법률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 KBS

헛디딘 삶에는 퇴로가 필요하다. 켄 로치 감독이 강조한 영화 속 대상은 ‘성실하게 일하는 리키 가족이 행복할 시간이 없게 만드는 구조’다. 다행히 변화를 만드는 구도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 올해 초부터 주요 택배사들이 기사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도록 하는 판결들이 잇달아 내려졌다.

영화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 택배기사가 수취인 부재 때 남기는 표현이다. ‘미안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놓쳤네요.’ 우리가 받는 택배상품에는 기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그들을 이미 놓친 뒤에 남겨진 저 표현은 얼마나 공허할까? 400년 전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무일푼 백인 이주민들에게 양식과 농토를 나눠줬다. 인디언 말대로 인류 전체가 조금씩 ‘연결된 존재’라면, 서로에게 디딤판이 되어야 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최은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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