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봄' ➄ 혁명

봄은 쉽게 오지 않는다

봄은 쉽게 오지 않는다. 심술궂은 겨울은 물러가면서도 봄의 길목을 막고 새 생명이 움트는 것을 방해했다. 싹을 틔우던 꽃봉오리들은 꽃샘추위에 떨었다. 따뜻한 봄볕에 올라온 빨간 사과 꽃봉오리는 하얗게 피지도 못하고, 봄철 두릅은 냉해를 입어 검게 죽었다. 때아닌 서리에 파릇하던 부추는 누렇게 썩었다. 올봄도 햇볕을 믿고 나선 식물들에 가혹한 계절이었다.

봄이 되면 한번은 꼭 아프다. 올봄에도 나는 감기몸살을 앓았다. 아침저녁으로 겨울의 추위가 여전한데도, 한낮의 따스한 햇볕에, 봄꽃의 현란한 유혹에 긴장을 푼다. 이제 추위는 다 끝났다고, 이 시샘 추위 따위가 도도한 계절의 순환을 감히 막을쏘냐 자만하다 감기에 걸린다. 겨울은 어김없이 이 빈틈을 파고들곤 했다.

▲ 미얀마의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이 지난 2월 1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2년 네 윈 육군총사령관, 1988년 소우 마웅 국방장관 이후, 역대 세 번째 쿠데타다. 미얀마 시민들은 군부 쿠데타에 저항해 전국에서 시위하며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미얀마 현지 기자가 목숨을 걸고 촬영해 보낸 사진. © 김영미 분쟁지역 전문PD 제공

이 봄에 앓는 감기몸살보다 미얀마 소식이 더 가슴 아프다. 군부독재가 계속됐지만 그래도 정치의 봄을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사망자가 700명을 넘어섰다. 정치에서 독재는 겨울이고, 시민 주권이 회복되는 민주주의는 봄이다. 현실 정치도 이 봄을 닮았다. 정치에서도 봄은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 미얀마 시민이 열망하는 ‘봄의 혁명’ 역시 험난하고 갈 길이 멀다. 정치의 봄도 상처와 희생을 요구한다. 역사가 완성한 수많은 봄이 그랬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 한국의 ‘서울의 봄’이 대표적이다.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시민들의 소박한 바람에서 시작됐다. 전기조차 충분치 않은 경제 상황이었다. 소련 공산당의 필요에 따라 희생을 강요하고 건전한 비판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억압하는 정치 상황이 끔찍했다. 시민의 염원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개혁 슬로건에 오롯이 담겨있다. 1968년 <라디오프라하>가 공산당 독재의 범죄를 폭로하자 시민들은 바츨로프 광장에서 모여 논쟁했다. 정치권 개혁파가 동조했다. 두브체크는 공산 독재를 주도한 노보트니를 몰아내고, 검열제 폐지와 다당제 전환 등 ‘정치 다원주의’ 그리고 민간기업 허용, 서구자유국가에 시장개방 등 ‘부분 시장경제’를 약속했다.

▲ 1968년 8월 바르샤바조약국이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 정책을 반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침공하자 탱크를 에워싸고 항의를 하는 시민들. 소련공산당에 의해 두브체크의 자리에 앉은 구스타보 후삭은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개혁정책을 뒤집고, 개혁 세력을 사회에서 배제했다. © wikimedia commons

정치의 봄이 쉽게 올 리 없었다. 소련 정보기구 KGB 의장인 유리 안드로포프는 비밀경찰을 체코슬로바키아에 파견해 체코슬로바키아 시민을 반혁명분자로 공작했다. 소련군을 중심으로 한 바르샤바 20만 군대가 침공했고, 전 국민의 지지를 받은 프라하의 봄은 피로 물들었다. 스무살 청년 얀 팔라흐가 소련군의 침공과 개혁 철회를 비판하며 분신하고, 시민들이 탱크에 올라가 군인들을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두브체크의 빈자리를 차지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후삭은 억압 정책을 재개하고, 다음해 전체 당원의 21.6%인 32만 3천명을 축출했다. 시민 500만이 반혁명 심사 대상이 됐다. 기업인, 교사, 작가, 언론인, 노동자는 부적격 판정을 받고 일자리를 잃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꿈꾸던 체코슬로바키아의 봄은 겨울로 퇴행했다.

서울의 봄, 그리고 광주

서울의 봄도 다르지 않았다. 유신을 앞세운 독재 정권은 선량한 시민을 납치, 구금하고 고문으로 간첩을 조작했다. 표현의 자유, 노동자의 권리는 금지되었다. 시민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하며 30년 독재가 막을 내렸다. 서울의 봄이 시작됐다. 재야인사가 복권하고, 해직 교수와 제적 학생이 복교했다. 정부 비판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며 개헌 논의가 본격화했다. ‘새 헌법, 선거로 뽑은 새 정부’가 들어설 거라는 희망이 팽배했다. 서울의 봄은 희망의 시기였다.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군사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K-공작계획’을 세워 언론을 장악했다. 1980년 2월부터 5월까지 공수부대 및 후방 주요 부대는 ‘충정훈련’을 받았다. 시민 저항에 대비한 진압 훈련이었다. 폭도에게 뚫리면 얼차려가 이어졌고, 군인들은 ‘폭도’라는 실체도 없는 가상의 적을 증오하도록 훈련받았다.

▲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로 민주화 열망이 가득했던 서울의 봄은 무너지고, 민주화시위가 벌어진 광주는 무자비한 진압에 피로 얼룩졌다. © KBS

5월 17일 전두환은 김대중을 불법 연행하고, 김영삼을 자택에 연금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자 공수부대가 투입됐다. 군 지휘관은 ‘길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체포 명령을 내렸고, 군인은 대검을 장착한 M16 소총과 곤봉으로 시민들을 때리고 찔렀다. 광주 무등고시학원 학생들이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때려도 되는가!”라고 외치자, 군인들은 고시학원에 난입해 곤봉을 휘둘렀다. 매 맞다 학원 밖으로 기어 나오면 기다리던 군인이 다시 구타했다. 광주의 비명은 광주 밖으로 새 나가지도 못했다. 계엄군은 통신을 끊고, 도로망을 봉쇄했다.

80년 광주는 철저히 고립돼 있었다. 언론은 광주를 보도하지 못했고, 안 했다. 광주 민주항쟁의 마지막 날인 27일 새벽, 전남도청에 남은 시민들이 마지막 방송을 했다. “광주 시민 여러분,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계엄군은 확성기로 소리쳤다. “폭도들은 들어라, 투항하라, 투항하라!” 새벽 4시부터 30분 동안 총소리가 요란했다. 다음날 쓰레기차에 관이 실렸다. 계엄군은 5월 더위에 소독약을 뿌렸다. 공식집계만으로 166명, 사망으로 인정된 실종자 76명까지 포함하면 242명이 희생됐다. 서울의 봄은 광주의 희생으로 막을 내렸다.

끝내 오고야 마는 봄

겨울이 물러가기 싫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봄은 온다. 정치의 봄은 사람들의 의지로 움튼다. 앞선 희생을 계승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연대할 때 온다. 벨벳혁명은 프라하의 봄에 분출했던 자유화와 민주화 열망을 이어받았기에 가능했다.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에 시민들이 참여했다. 시위대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프라하성과 공산당 당사가 있는 바츨라프 광장에 모여 ‘자유 선거’, ‘공산당 독재 폐지’ 구호를 외쳤다. 집회에는 100만이 넘는 시민이 참여하고, 학생 주도의 전국 2시간 총파업에 국민 75%가 참여했다. 혁명은 성공했다. ‘시민포럼’을 주도한 하벨은 대통령이 됐고, 프라하의 봄을 주도했던 두브체크는 연방 의회 의장에 올랐다. 프라하 시민은 잃어버린 봄을 제힘으로 되찾았다.

▲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라하의 봄’을 기억하고, 실현하려는 시민의 열망으로 가득했다. 혁명 시민에 압도된 공산당은 권력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고 원만하게 정권교체가 이뤄졌다고 해서 벨벳 혁명으로 불린다. © wikimedia commons

멈춰 섰던 서울의 봄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연결됐다. 항쟁이 본격화되기까지 희생이 이어졌다. 박관현 전남대 학생회장은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운동 중 체포돼 옥중에서 단식을 거듭하다가 세상을 떴다. 김의기는 종로 5가 기독교회관 기도회에서 광주의 진상을 밝히려다가 계엄군 때문에 기도회가 취소되자,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뿌리고 투신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 우러르며 자유 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살 것인가? (중략)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힘 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방향에 서 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 김의기, <동포에게 드리는 글> 중

▲ 6월 민주항쟁은 전국에서 각계각층의 시민이 함께했다. 1987년 6월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에는 재야인사, 학생뿐 아니라 시민 넥타이부대, 종교인도 참여했고 마침내 군부로부터 직선제 개헌 약속을 받아 냈다. © KBS

민주 화산은 터질 듯 터질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벌어지고, 이한열이 사망했다. 이들의 죽음은 민주화 열망에 불을 붙였다. 6월 항쟁이 시작됐다. 시위에는 넥타이부대, 택시기사, 종교인, 학생 구분이 없었다. 시민들은 ‘다시는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대통령을 내 손으로’를 외쳤다.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했다. 전국 4백만에서 5백만의 시민이 참여했다. 마침내 6월 29일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와 평화적 정권이양을 약속하며, 서울의 봄은 완성된다. 계절의 봄도, 정치의 봄도 쉽게, 거저 오지 않는다. 서울의 봄이 성사되기까지 79년 유신독재 종식 이래,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긴 세월 동안 시민의 의지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봄도, 혁명도 거저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아, 미얀마 

이 봄에 다시 미얀마를 걱정한다. 지난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시민들은 냄비 시위, 침묵시위, 불복종운동을 펼치며 저항해 왔다. 군부는 파업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체포하더니 9일부터는 시민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다친 시민들을 치료하는 의료진을 체포하고, 국제사회에 미얀마 사태를 알리려는 기자들을 조준 사격했다. 미얀마 양곤 인근 바고 지역에서 드론과 수류탄을 동원한 군부에게 시위대 8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미얀마정치범지원협회(AAPP)의 집계에 따르면, 2월 13일 첫 사망자가 나온 뒤로 4월 28일까지 최소 756명이 군부에 의해 살해당했다. 군부는 공포로 시위 의지를 꺾으려 시신 훼손 영상과 체포자가 고문당한 사진을 끊임없이 올리는 만행까지 저지르고 있다.

▲ 미얀마에서 학살이 계속되고 있다. 미얀마 군부는 소수민족 반군이 시민과 연대한다는 소식을 듣자, 지난달 31일 카렌족 주거지인 미얀마 파푼을 전투기로 공습했다. 4월 9일에는 도시 바고에서 박격포와 유탄발사기 같은 중화기를 활용해 80명 이상을 살해했다. © 김영미 분쟁지역 전문PD 제공

1962년 군부의 첫 쿠데타 이후, 2015년 사실상 첫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미얀마에 정치의 봄이 조금씩 이뤄지는 것처럼 보였다. 소수 민족에게는 예외였지만, 군부에 의한 납치, 고문, 강제동원, 성폭행과 같은 인권침해도 줄었다. 시민들은 군부를 보호하는 헌법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2020년 총선에서 시민들은 군부에 할당된 166석을 제외한 상·하원 476석 중 396석을 민족민주동맹에게 밀어주었다. 문제는 군부였다. 권력 이양을 하기 싫은 민 아웅 흘라잉 군 총사령관은 ‘부정선거 무효화, 총선 재실시’를 빌미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미얀마 시민은 프라하의 봄과 서울의 봄을 기억했다. 시민은 앞선 희생을 기억하고, 옆에 있는 시민들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미얀마는 남자가 치마 밑으로 지나가면 남성성을 잃는다는 미신이 작동할 정도로,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나라였다. 그 미얀마에서 여성 시위대가 치마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남성 시위대는 치마를 머리에 둘러 연대를 표한다. 소수민족과도 손을 잡았다. 전 국민의 70%를 차지해 소수민족 학살과 혐오를 방관하던 버마족이 과거 소수민족에 대한 학살과 혐오를 반성한다. 소수민족인 카렌족, 카친족, 아라칸, 샨족의 무장병력은 미얀마 민족통합정부(NUG)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미얀마 시민의 항쟁은 이제 민족이나 계층, 세대나 종교 구별 없이 한 마음이다. 쉽게 오지 않지만, 미얀마에도 정치의 봄은 반드시 온다. 지금 미얀마는 마지막 겨울 추위를 견디는 중이다.

혁명은 그냥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 체 게바라

이 봄에 꼭 닮은 두 죽음을 만난다. 이들은 자기 죽음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애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 ‘4.19혁명’ 진영숙 학생

“어머니,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오랫동안 슬퍼하지 마세요. 미얀마 시민의 주권을 얻으려다 죽었으니 자랑스러워해 주세요.”

- 미얀마 ‘봄 혁명’ 티하 틴 툰 의사

앞은 ‘4.19혁명’의 진영숙 학생, 뒤는 미얀마 ‘봄 혁명’의 티하 틴 툰 의사의 글이다. 중학교 2학년인 진영숙은 4.19혁명 당시 유서를 쓰고 4시간 뒤 버스 차창 밖으로 구호를 외치다 총에 맞아 사망했다. 스물일곱 살 티하 틴 툰은 이 유서를 쓴 지난달 27일, 시위를 위해 거리에 나섰다가 총을 맞고 숨졌다. 

이들은 무엇을 보고, 왜 앞으로 나섰을까? 역사나 대의였을까? 이들은 자기 옆에 있던 사람들의 희생을 봤다. 마산의 김주열은 눈에 최루탄이 박혔고, 미얀마의 시위대는 총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다. 혁명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지금 미얀마 시민에게 ‘민족의 해방’과 ‘미얀마 시민의 주권’은 생존 조건이다. 

▲ 몽유와 지역의 저항시위 리더인 학생운동가 웨이 모 나잉(26)은 군부로부터 공개수배를 당한 20인 중 한 명이다. 지난 15일, 군부는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던 웨이 모 나잉을 차로 들이받아 체포했다. 그의 뒤를 이어 칸 웨이 표(26)가 얼굴을 드러내고 시민의 저항시위를 이끌고 있다. © 김영미 PD 제공

혼자는 무섭지만, 연대하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혁명에 나선 사람들은 두려워서 연대한다. 납치, 감금, 고문과 강제동원도 두렵지만, 두려워 포기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더 두렵다. 공포가 커질수록, 연대도 커진다. 혁명에는 선한 의지가 작동한다. ‘언젠가 내 차례가 될 것’이라는 첫 공포는 ‘내가 아니면 다음 사람이, 다음 사람이 못하면 그다음 사람이 누리게 될 봄’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바뀐다. 이 봄, 미얀마를 보며 혁명을 생각한다. 서울의 봄으로 우리는 혁명을 완성했는가. 나는, 당신은 어디 있는가. 우리는 잘살고 있는가. 6월항쟁의 결과물인 87체제는 과연 건강한가. 체 게바라는 말했다. ‘혁명은 저절로 익어 그냥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생명이 움트는 계절인 봄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치 혁명, 삶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일깨운다. 혁명은 거저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니, 지금 행동하라고 부추긴다.


[청년기자의 시선1]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시선2]는 현상들의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봄’이다. 코로나 팬데믹 1년, 재난은 계속되지만 자연의 순환은 어김없다. 생명은 언 땅을 뚫고 대지를 초록으로 물들이고 꽃을 피운다. 생명이 역동하는 이 봄을,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잔인한 4월이라 노래했다. 그렇다, 제주 4‧3이, 세월호가, 4‧19 혁명이 말한다. 생명과 죽음, 혁명이 함께 하는 이 봄을 기억하라고. (편집자)

편집 : 이성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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